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9화 (9/95)

# 9화

9.

“너 지금 뭐 하냐?”

그록은 자신의 곁에 선 매튜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그는 마음이 넓은 사람도 아니었고 사람이 고픈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이 고프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매튜를 곁에 두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돈자팔. 이 소문은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소문이었다.

과거엔 사실이기도 했고 남들의 말은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문득 생각이 든다.

‘블란에게는 이 말이 상관없었을까?’

그 소심하고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자신처럼 그냥 흘려들었을까.

문득문득 그록은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약초와 다른 것들이 조금씩 궁금해졌다.

그록은 매튜에게 답하지 않은 채 묵묵히 책을 한 권 책장에서 꺼내어 품에 안았다. 도서관이라 작게 속삭이는 매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야. 무슨 책을 열 권이나 한꺼번에 빌리냐?”

매튜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록을 바라봤다. 그의 품 안에 안긴, 아니 쌓아올려진 많은 책. 원래도 책을 많이 읽는 놈이었지만. 그런데 그 주제가…….

매튜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워보트 병 관련 책은 왜 그렇게 빌려? 그거 불치병 아냐? 아직 우리 교육 과정에는 안 나오잖아. 아, 무슨 병이더라? 그 병 좀 내용이 많이 복잡했던 것 같은데.”

그록의 품에는 몇 권 없는 워보트 병 관련 논문과 서적들이 쌓이다시피 안겨 있었다. 그록은 묵묵히 책장을 보며 또 한 권의 책을 품에 안았다.

하나씩, 하나씩.

그록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아, 하나 기억나네. 쓰이는 약초도 비싼 것밖에 없다고. 맞지? 또 뭐 있더라. 암튼, 그거 별로 수요도 없는 약초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매튜는 자신의 말에 답하지 않는 그록을 보며 계속해서 작게 속삭였다.

도서관이지만 가장 안쪽. 사람들이 없는 곳이라 그런지 매튜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쉴 새 없이 말을 해댔다.

“공부해도 별로, 돈도 안 될 거 같은데.”

순간 그록은 책장에서 손을 떼며 매튜를 바라봤다.

돈자팔.

자신에게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가 연구에 대해서 돈이 별로 안 될 것 같다고 하다니. 과연 연구자의 명예란 무엇이란 말인가.

매튜는 그록의 무심하면서도 정확히 눈을 향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그, 지도 교수님한테서 뭔 소리라도 들었냐? 면담하고 오자마자 이렇게 워보트에 파고들고.”

그록은 매튜에게서 다시 고개를 돌리며 책장을 바라봤다.

지도 교수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워보트 병과 쉴단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다고?’

돈자팔이라는 이름이 그록의 앞에 붙자마자 저를 내팽개쳤던 그 교수와의 면담이었다.

‘흐음, 어려운 분야이고 굳이 지금부터 연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돈이 많이 드는 연구라 연구소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눈빛으로 그 교수는 그록에게 말했었다.

‘후원자를 좋은 사람으로 구해야겠구나.’

순간 그때 그록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실소를 겨우 속으로 삼킬 수 있었다. 지도 교수는 말했다.

‘참 어려운 길을 가는구나. 후원자가 생길지 알 수가 없어. 워보트와 쉴단이라면.’

그록은 그때 교수의 눈을 바라봤다. 연구자의 명예에 대해서 늘 말하던 교수였다. 그렇기에 그록은 그 교수에게 답했다.

‘지금은 곁에 후원자가 없지만,’

지금은 없지만 있었다. 그리고 있다.

‘반드시 할 겁니다.’

자신은 연구자로서 자신의 유일한 후원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하나 더.

남편으로서 아내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기다릴 수 있어요.’

그록은 떠오르는 목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다시 책장을 바라봤다. 그록은 다시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매튜는 여전히 이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저렇게 손이, 팔이 떨릴 정도로 무거우면,’

잠시 옆에 내려놓으면 될 건데.

매튜는 의아함을 담아 그록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그록은 무거워서 부들부들 팔이 떨림에도 끝까지 책들을 품에 안은 채 도서관을 벗어났다.

***

그록은 흰 종이를 묵묵히 바라봤다. 그는 바꾸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는 처음으로 연구가 아닌, 연구를 위한 목적도 아닌 다른 이유로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돈만 드는 연구와 돈을 만들기 위한 접근. 그 모든 것이 아닌, 돈과 관련이 없는 이유에 그록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록은 블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저기.’

‘무슨……?’

‘성함이 뭐죠?’

어색하고, 예법에 맞지 않는 질문이었다.

‘저는 서 우드 약초학과 2학년 그록 바서입니다.’

‘왜 그러시죠?’

‘궁금하네요.’

‘브, 블란 샤를입니다.’

‘……그록 바서입니다.’

그는 블란이 기억할 두 사람의 시작점을 바꾸고 싶었다. 그록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펜을 움직이는 그의 손끝이 하얬다.

후두둑, 후두둑.

창밖으로 봄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비가 왔던가?

그록은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안녕하십니까?]

톡. 톡.

그록은 그록은 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는 쓰던 종이를 치우고 새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그록은 다시 그 종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록은 몰랐다.

그 여섯 글자의 인사말을 적기까지 시간이 삼십 분이나 흘렀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록은 마치 기말고사 시험을 볼 때처럼, 졸업 논문의 마지막 한 자를 적을 때처럼. 몸을 수그린 채 종이를 묵묵히 바라봤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자신은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며, 멍청한 연구자이다.

그리고 연구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인간이며 자신의 마음과 감정이 무엇인지도, 이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모르는 인간.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그록 바서, 자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록은 몇 글자를 적기 위해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무언가를 진득하게 하는 것,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도서관 이용 시간이 끝났습니다. 10분 안으로 짐 챙겨서 나가세요.”

아.

그록은 도서관 사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이렇게 자릴 잡고 앉은 지 2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록은 하얀 빈 종이를 바라봤다.

모든 약초의 손질법을 처음 배울 때 힘들고 어렵듯이, 역시 처음인 일은 모두 어려웠다.

그록은 조심스럽게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가방 안에 넣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도서관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런 그를 약초학과 학생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늘 공부를 하러 오는 약초학 연구광이 오늘은 공부를 하지 않은 채 도서관을 떠나갔다는 사실에 그들은 그록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그록의 눈과 머릿속에는 오직 하얗게 빈 종이뿐이었다.

***

역시.

그록은 남 우드 아카데미의 한 벤치에 앉아 있는 블란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책장을 가득 채우던 약초 관련 책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약초 관련 책을 읽고 있을까?’

부쩍 그록은 궁금한 것들이 요즘 많이 생겼다.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마냥 떨어져 있는 블란에게로 그록은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다가 잠깐 멈칫했다.

인사를 해야 하나?

하지만 그록은 어느새 블란 앞에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서 있었고 블란은 움츠러든 채로 연신 그를 힐끗힐끗 보며 우물쭈물했다.

그록은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저기.”

그리고 손이 저절로 앞으로 나갔다.

아.

처음으로 그록은 블란을 앞에 두고 당황했다.

하지만 더 당황한 얼굴의 블란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작은 실눈이 쉴 새 없이 그록과 그의 손을 왔다 갔다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블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굴던 주변의 지나가던 이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바라봤다.

여전히 뚱뚱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역한 냄새가 날 것 같은 돈혐지.

그리고 그녀의 두 걸음쯤 애매하게 떨어진 곳에 선 남자.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정말 잘생긴 얼굴. 서 우드 아카데미의 상징인 흰 코트를 입은 남자.

그리고 블란에게 내민 손.

그리고, 그 손에 들린 편지 하나.

하늘색의 작은 편지봉투였다. 냉랭한 분위기의 미남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귀여운 디자인의 동글동글한 편지 봉투.

그록과 블란은 당황한 채로 서로만을 보고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힐끗힐끗 둘을 바라봤다.

그록은.

‘저기.’

그렇게도 바꾸고 싶었던, 처음 말을 걸었던 순간을 또 다시 반복했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때처럼 블란은 자신의 눈치를 봤고 두려운 듯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 모습에 그록은 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블란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받으십시오.”

블란은 당황으로 얼굴이 물들었다.

힐끗힐끗 보던 이들의 얼굴은 묘한 표정을 띠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인사말도, 다른 말도 없이 편지를 내밀며 그저 받으라고만 하다니.

하지만 그록은 담담했고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조금씩 심장이 뛰었다.

“그, 그. 그러니까.”

블란은 팔이 아프지도 않은지 여전히 자신의 앞에 내민 손과 그 위의 편지를 보면서 우물쭈물 말을 내뱉었다.

“가, 갑자기 무슨. 그, 누구시길래. 왜 이러시는지.”

으음.

순간 그록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이러시는지.

그 답으로 할 말은 무수히 많았다.

누구시길래.

그녀가 모르는 나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록은 생각하고 또 했다. 모르면 생각을 해야 한다. 그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책을 잡고 있지 않은 그녀의 손이 보였다.

그록은 움직였다.

“헐.”

그록과 블란을 보고 있던 누군가의 입에서 당황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은 몰랐다.

블란은 너무나도 당황하여서.

그록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에.

각각 다른 감정에 휩싸인 채 마주 잡은 손을 바라봤다.

그록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는 것을. 그록의 머릿속에는 그보다 중요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대신 항상 잡던 그 온기에 그록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울렸다.

조금 더 잡고 싶었지만 이를 꾹 눌러 참으며 그녀의 손바닥 위에 편지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어버버, 하며 당황한 블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편지입니다.”

그녀가 해보고 싶었던 일. 그록이 하고 싶은 일.

스무 번째, 편지 받기. 스무 번째, 편지 주기.

그록은 시작을 이렇게 바꾸고 싶었다.

그는 손바닥 위에 올려진 편지를 멍하니 보는 블란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가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블란에게서 멀어져갔다. 블란을 얼굴 가득 당황스러움으로 채운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천천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편지봉투를 들여다봤다.

어릴 적 몇 번 그녀는 놀림과 재미를 가장한 협박을 받아봤었다. 편지를 가장한 악의들.

하지만 이 편지는 뭔가 달라보였다. 묘한 기분에 그녀는 편지를 천천히 뜯었다.

동글동글한 모양새의 편지봉투를 뜯자 안에서 하얀 편지지가 나왔다. 그녀는 편지지를 펼쳤다.

흰 종이엔 세 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서 우드 약초학과 2학년 그록 바서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블란은 멍하니 편지를 바라봤다. 당황스러움 위에 언뜻 다른 표정이 하나 더 얹혔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작게 그록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는 편지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날이 블란이 기억하는 그록과 블란의 첫 만남이었다.

그록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짐했었다.

이번에는 기다리는 일은 모두 자신이 하기로.

그 힘든 일을 다시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지금 그록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늘 늦게 올 때면 저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입가에 지어졌던 미소의 이유를.

그록은 저 멀리 평소처럼 벤치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도로 도망가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조금씩 다가왔다.

이를 그록은 묵묵히 바라봤다. 묘한 느낌이었다. 다가오는 모습을 기다리면서 바라보는 기분은.

그록의 묵묵히 바라보는 시선에 블란은 엉거주춤 천천히 다가갔다. 누가 보아도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눈빛과 자세였다. 그리고 마침내 벤치에 앉아 있는 그록의 두 걸음 앞에 그녀가 섰을 때.

그록은 여전히 블란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답장.”

“……예?”

블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표정을 보며 그록은 손을 내민 채 담담하게 말했다.

“답장 주십시오.”

그록이 하고 싶은 일.

스무 번째.

편지 주기. 그리고 답장 받기.

무뚝뚝한 그록의 얼굴이 당황으로 흔들리는 블란의 눈동자에 담겼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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