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8화 (8/95)

# 8화

8.

그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기숙사 방이었다. 약초학과 차석을 위한 독방. 희미한 기억 속의 그 방이 맞았다. 독한 냄새는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는, 은은한 향이 배어 있는 곳.

그록은 자신의 목으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타오르는 불길이 지나가는 것마냥 타듯이 썩어가는 것 같던 그 목은 부드러웠다.

그는 소리를 내어보았다.

“아.”

타지 않은 것인지 목에서는 제 소리가 났다.

소리. 냄새. 시각.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쳤다.

마프렌 왕국력 721년.

달력을 본 그록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진실이었다.

과거다.

이건, 지금이 아니다.

순간, 심장이 서서히 작게 뛰었다. 그리고 그록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종이를 다시 펼쳐들었다.

하지만,

똑똑똑.

들려온 노크 소리에 그록은 종이를 다시 접어야 했다. 그리고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그록! 뭐 하냐? 너 어디 아프냐? 문 연다?”

아.

기억 속 희미한 목소리였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달칵.

문이 열렸다.

그록은 매튜의 찡그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그록을 향해 말했다.

“너…… 지금 일어났냐? 오늘 중급 약초해설학 수업 있는 거 몰라?”

그록은 아무 답도 못하고 멍하니 매튜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매튜는 찡그리던 인상을 펴며 조금의 걱정을 담아 말했다.

“야, 너 어디 아프냐? 왜 그리 평소 같지 않게 멍해?”

그 배려 가득한 표정에서 그록은 다시 한 번 느꼈다.

과거다.

그리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경멸하던 이의 걱정 가득한 표정을 보고 느끼는 이상한 기분.

“아.”

그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장은 서서히 전보다 조금 더 세게 뛰기 시작했지만 그는 담담할 수 있었다.

“준비해서 나갈 테니 먼저 밑에 가 있어.”

“어, 어, 그래. 뭐, 어디 아프면 말하고.”

“어.”

그록은 매튜를 내보내고 수업을 들으러 갈 준비를 했다. 하나하나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필요한 것을 막힘없이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록의 머릿속은 하얬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록은 서 우드 아카데미의 상징과도 같은 흰 코트를 걸쳤다. 그러고 나서 가방을 메었고.

하얀 머릿속을 채우는 단 한 가지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책상 위에 잠시 올려두었던 종이 쪽지를 들었다.

[해보고 싶었던 일.]

‘기다릴게요.’

순간 다시 들려왔다. 블란의 목소리가. 그록은 심장이 순간 멈추는 것 같았다. 다시 숨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그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숨을 막던 것을 삼켰다. 마지막에 삼키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삼켜졌다.

그록은 달력을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생각이 이어졌다.

언제 블란을 처음 봤더라?

그는 날짜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만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예 그럴 생각조차 못했다.

그록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 쪽지를 흰 코트의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달칵.

그는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17살의 그록 바서는 수업을 듣기 위해 서 우드 아카데미 약초학과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32살 그록 바서는 이상한 기대로 심장이 조금씩, 조금씩 세게 뛰기 시작했다.

“너, 평소라면 먼저 가자고 할 사람이 오늘은 왜 이렇게 굼뜨냐?”

함께 강의실로 걸음을 옮기는 매튜가 건넨 말에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말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늦잠 잤다.”

“헐. 니가? 아, 연구하다가 그랬나 보네.”

하지만 머릿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복잡한 것 같으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하얀 머릿속 때문에 그록은 대충 대답했다.

매튜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은근슬쩍 그록에게 물었다.

“그러면 요즘 무슨 연구 하냐?”

“쉴단.”

아차.

그록은 순간 튀어나온 답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평생의 반 가까이를 함께한 존재는, 지금까지 남아서 그록의 지워지지 않는 한이 되었다.

매튜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

“아. 아니다.”

그록은 황급히 아니라고 답했다. 매튜는 그제야,

“그러면 그렇지. 야, 네가 무슨 쉴단을. 그게 얼마나 비싼데.”

그 순간 그록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매튜를 바라봤다. 늘 다정다감하게 말하는 그 눈동자와 자신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던 눈동자가 교차했다.

역시, 그런 건가.

돈자팔.

그 소문을 확실히 매튜가 낸 것이 맞을 것이라고, 그록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

“세상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많은 약초들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견한 약초들의 진정한 효능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네.”

교수는 계속해서 강의를 진행했지만 그록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 그런지. 아니면, 돈자팔은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며 지도 교수 자리를 내팽개쳤던 교수의 수업이라 그런 것인지.

그록은 칠판을 보는 대신에 조심스럽게 흰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종이를 꺼냈다. 그록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첫 번째. 같이 손잡고 걷기.

창밖은 4월이라 그런지 조금씩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마 5월 우드 축제 때가 되면 아주 화려하게 그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뽐낼 것이다. 하지만 그록은 이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밤이나, 수업을 들으러가는 아침.

그리고 가끔씩 블란을 만나러 가거나 돌아오는 길에 조금씩 보았을 뿐.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걷기 참 좋은 날씨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많구나.

갑자기 그록의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맑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러면 이만 오늘 수업은 마치도록 하지. 다들 과제를 해오도록.”

수업이 끝나자마자 매튜가 다가와 그록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 좀 이상하다. 오늘 왜 이리 멍하고, 딴짓을 자꾸 해?”

그록은 약초학과 세 분반 중 2분반에서 1등이자 전체 차석인 엘리트로, 평소에는 절대로 수업 중에 한눈을 파는 일이 없었다. 교수는 그를 계속 주시했으나 이를 못 알아챈 것인지 그록은 자꾸만 딴짓을 했고, 매튜는 그것이 이상했다.

의문이 가득한 매튜의 눈동자를 향해 그록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모르지.”

“허!”

매튜는 기가 차다는 듯이 탄식을 하며 말을 이었다.

“참나. 지 일인데 모른다고 그러면 누가 아냐?”

“글쎄.”

매튜의 말에 그록은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록의 답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매튜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가방을 메었다. 그는 멍하니 앉아 있는 그록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안 가?”

“어?”

“가자고. 오늘 남 우드 도서관 가야 하잖아. 네가 가자며.”

순간 그록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는 느꼈다. 아니, 깨달았다.

오늘이구나.

그록은 멍하게 되물었다.

“……어?”

남 우드 아카데미에 있는 남 우드 도서관.

여학교인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출입증을 받아야 했다.

“왜, 왜 이래? 진짜 이상하네.”

매튜는 당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겨우겨우, 네 성적 팔아서 도서관 출입증 받았잖아. 네가 써먹어야 한다며? 너 남 우드 도서관에서 볼 책 많다고. 왜? 머리가 멍해서 기억도 안 나냐?”

당연히.

기억나지 않았다. 빌릴 책이 무엇인지. 하지만 그록은 묵묵히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그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났다.

오늘이다.

“어. 있어. 얼른 가자.”

그록은 기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매튜를 향해 한 번 더 말했다.

“가자고.”

“아? 어, 어.”

매튜는 걸어가는 그록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조금 많이 달랐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그록의 뒤를 따랐다.

옅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록은 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는 오직 남 우드 아카데미만을 담고 있었다.

서서히, 조금씩 남 우드 아카데미가 가까워져 갔다.

그녀는 늘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구를 하다가 늦게 와도. 그 기다림의 의미를 그록은 이전엔 알지 못했다.

또 다시 들려왔다.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기다림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록은 남 우드 아카데미 안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순간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아.”

보였다.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살아 있다.

커다란 덩치에 움츠러든 어깨. 그리고 땅을 보는 듯 숙인 고개. 연신 주위를 살피는 것 같지만 보지 않는 듯 행동하는 시선.

살아 있었다.

그록은 자신의 눈에 담기는 블란의 뒷모습에 처음으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환희.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심장은 뛰었지만 세상은 정지해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록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 알게 된 환희와는 또 다른 감정이 그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전의 그의 숨을 막았던 것과는 달랐다. 숨이 막혀 왔지만 하나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 숨 막힘조차 곧 환희가 되었다.

그록은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쉴단만을 연구한 자신은 할 줄 아는 것도 그것밖에 없는지, 다른 것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힐끗.

블란이 그록이 서 있는 곳을 힐끗 돌아보았다. 눈치를 보듯 순식간에 그 시선이 닿았다가 사라졌다.

아.

그록은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올렸다.

그녀에게 가야 한다.

처음 그녀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때의 충동과는 다른 조심스러우면서도 멈추지 못할 충동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야. 너도 알아?”

매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돼지 이야기 말이야.”

그록이 고개가 천천히 매튜에게로 향했다.

‘야, 저 돼지 이야기 알아?’

처음 블란을 알았을 때 그때 매튜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록은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답했다.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뭔 소리야?’

자신이 과거에 했던 말이 그록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매튜의 답은 그때와 달랐지만 같았다.

“딱 보면 모르냐? 너도 놀라서 쳐다본 것 같은데.”

매튜는 빤히 쳐다보는 그록이 궁금해 한다고 여겨 돈혐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록은 블란을 바라보는 매튜의 그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경멸과 혐오로 가득한 그 눈동자를.

“저 몸매랑 얼굴 봐봐. 다가가면 냄새도 심하다고 하더라고. 무슨 병이 있어서 그렇다는데. 진짜 몸에 독한 냄새가 배어 있고. 진짜 더러워서, 원.”

그때 느꼈던 것과 같이.

마치 놀려도 된다는 듯, 욕을 해도 된다는 듯. 지나가는 심심풀이 땅콩을 대하듯이 너무나도 쉽게 매튜는 경멸의 말을 내뱉었다.

그록의 눈동자가 매튜를 향해 있었다.

“몸매도 봐봐. 저게 돼지지. 저런 돼지는 처음 본다니까. 그리고 얼굴도. 태어나기를 얼마나 못생기게 태어난 건지. 저건 살이 문제가 아니야. 저게 여자 얼굴이야? 진짜 그냥 돼지가 귀엽지. 돈혐지는 진짜. 어휴.”

“……돈혐지?”

그록은 조용하게 되물었다.

그 목소리에 매튜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럽다는 듯 손을 팔랑이며 말했다.

“아, 뜻 몰라? 돈 많은 혐오스러운 돼지.”

돈 많은 혐오스러운 돼지.

저 말에 자신이 가졌던 감정이 그록은 문득 떠올랐다.

“어때? 딱 어울리지 않냐? 저런 돼지를 남 우드 아카데미에 다니게 해서는,”

“매튜.”

말을 이어가던 매튜는 자신의 말을 끊는 그록을 바라봤다. 그리고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무심한 얼굴 위로 어떤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 위로 그런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매튜는 무심한 그 얼굴이 너무나도 뜨겁고 시리게 느껴졌다.

천천히 그록의 입이 열렸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매튜의 눈동자를 올곧이 보면서 말했다.

“사람한테.”

“……어?”

당황한 듯 묻는 매튜를 향해 그록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다.”

매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록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시 블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문득 자신의 머릿속에 든 생각에 의문이 들었다.

분명 큰데.

나는 왜 작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블란의 뒷모습이 작아 보였다. 순간 그록은 찌릿 하는 느낌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찻잔을 쥐지 않는 손. 그 손바닥이 따끔했다.

가시라도 박힌 것일까. 아닌 것 같은데.

그록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발을 내딛었다.

한 걸음.

따끔한 느낌이 사라졌다.

또, 한 걸음.

그록은 길을 걷는 블란을 뒤따라 걸었다. 그리고 조금 더 보폭을 크게, 그리고 조금 더 빠르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록은 블란의 옆에 섰다. 비록 스쳐지나가는 사람처럼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옆이었다.

그 순간 작은 실눈 사이로 하늘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눈을 뜬 후로 맡을 수 없었던 쉴단의 향기가, 삶의 반을 같이 해오던 그 향이 다시 그록의 코언저리에 맴돌았다.

그록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아팠다.

묘한 충동에 그록은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블란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흠칫하며 블란이 자신의 눈치를 봤다. 그록은 이를 모른 체하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블란을 닮은 맑은 하늘이었다.

그록은 블란을 다시 바라봤다. 눈치를 보고 있지만 그녀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지 않았다.

줄어든 한걸음이 그대로였다.

“……좋군.”

그록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함께 걷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날씨였다.

비록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4월 봄 바람을 그는 처음 무엇인지 인지했다.

[첫 번째. 같이 손잡고 걷기.]

그록은 다짐했다.

다시 한 번 더 그녀에게 다가가야겠다고.

품 안에 든 서른 가지의 블란이 해보고 싶었던 일.

해볼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리며 그록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것이 블란은 미처 알지 못한 그록과 블란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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