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7화 (7/95)

# 7화

7.

약속한 날.

결혼기념일 10주년이 되었을 때.

그록은 관 위로 덮이는 흙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나.

워보트 병에 걸린 이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나을 수 없다는 그 진실이 사실임을 그록은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검은 관 위로 흙들이 부서져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연구자로서 자신의 유일한 후원자에게 했던 단 하나의 약속을 영영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은 이제 진정한 명예도, 긍지도 모두 다 잃은 연구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는 확신했다.

툭. 툭.

그록은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블란의 아버지인 레온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실핏줄이 터지다 못해 벌겋게 물든 눈과 말라붙은 눈물로 가득한 얼굴.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와 엉망이 된 옷차림.

그런 몰골의 레온을 보며 그록은 요 며칠간 마치 숨이 끊어질 듯이 절규하며 눈물을 쏟던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툭. 툭.

“괜찮네. 좋은 곳에 갔을 걸세.”

계속해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 말을 건네는 것일까.

위로가 필요한 이는 본인 같은데. 아니 자신을 위한 위로를 나에게 하는 것일까.

레온과 그록. 그리고 몇몇의 사람만이 자리한 블란의 마지막 길은 아주 조용했다. 날씨는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그록은 그녀의 눈동자처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레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란을 닮은 하늘이구만. 아마, 아마.”

그록은 다시 목이 잠겨 말하지 않은 레온을 무심히 바라봤다.

그러나 그런 그록의 눈동자를 보는 레온의 눈동자는 다시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그는 겨우 손에 힘을 주어 다시 그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 아마. 아니, 분명.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분명.”

툭. 투욱.

어깨를 두드리던 그 손으로 레온은 그록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소리 없는 절규를, 울음을 토해내었다.

그록은 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친 카만이 애달프게 웃어 보였다. 어째서 자신에게 저런 미소를 짓는 것일까.

그록은 블란이 죽은 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이 죽음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러니. 괜찮네. 괜찮아.”

레온은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일까.

그록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자 다시 들려왔다.

‘기다릴게요.’

블란의 목소리가 다시 그록의 안에서 들려왔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또 들려왔다.

‘기다릴게요.’

그록은 다시 목구멍이, 숨구멍이 턱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 목에 걸린 무언가를 꾹 삼켰다.

블란의 장례식이 모두 끝이 났다.

“난 저택에 잠시 갔다 오겠네. 그때 같이 정리하도록 합세.”

레온은 다시 한 번 그록의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록은 그에 묵묵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그래.”

희미한 미소가 레온의 입가에 나타났지만 이내 지우며 그는 잠시 동안 블란의 저택을 떠났다. 그록은 떠나는 레온의 모습을 보며 다시 자신의 집으로 들어섰다.

블란의 장례식은 끝났지만 그녀의 물건들은 며칠 뒤 레온이 돌아오면 같이 정리할 예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록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

연구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러 그는 연구실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자 여전한 쉴단의 향기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록은 묵묵히 다가가 쉴단을 손에 집어 들었다. 익숙한 향이 코에 맺혀 떠나지를 않았다. 그록은 이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좋은 쉴단이군.”

최상품으로 엄청난 가격의 쉴단이었다.

그록은 이를 무심히 집어 들어 천천히 손질을 시작했다.

“아.”

그는 문득 든 생각에 시선을 돌렸다. 연구실 구석에 있는 시계가 보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건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달칵.

연구실을 나선 그는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달칵.

또 다른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서서 익숙한 향을 따라 묵묵히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록은 찻잔을 들어 알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쓰면서도 어딘가 깊은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는 가만히 알트 차를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알트 차의 향은 여전히 깊으면서도 좋았고. 열린 창문에서는 바람이 들어왔다.

굳이 달라진 것을 찾자면, 비어 있는 맞은편 의자와 비어 있는 침대가 있었고 블란이 없었으며 이 방 안을 채우던 그녀의 독한 냄새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록은 테이블 위에 손을 하나 올려둔 채 다른 한 손으로 찻잔을 잡고선 알트 차의 향기를 음미했다.

그는 한 모금을 마실 때마다 이상하게 목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지만 또 다른 한 모금으로 이를 삼켜냈다.

목구멍에 걸린 이것을 토해내고 싶었지만 토해지지 않아 그록은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

어느새 찻잔은 비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마신 것이지. 그록은 다시 사람을 불러 한 잔 더 채울까 하다가 이내 단념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문을 닫았다.

그러자 바람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고 그 덕인지 조금씩 늘 맡아오던 그 독한 냄새가 코언저리에서 머무는 것 같았다.

그록은 창문에서 시선을 떼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침실을 느리게 거닐었다.

근 십 년간 보아온 풍경이라 다른 것은 없었다. 문득 블란의 손이 걸쳐져 있던 침대 끝이 눈에 담겼고 그리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블란의 책장이 보였다. 순간 학자적 호기심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과연 블란은 어떤 책을, 어떤 학문을 좋아했을까.

그는 천천히 책장에 다가갔다.

그러자, 많은 책들이 보였다.

[기초 약초 입문학]

[위에 좋은 약초 해설서]

그녀는 약초에 관심이 많아서 나를 후원한 것일까.

그록은 그 책장들을 보며 블란에 대한 작은 호기심을 가졌다. 그 순간,

또 다시 무언가가 목을 턱 막아왔지만 그록은 다시 삼켜냈다. 그는 이 삼켜내는 것도 점점 힘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그록은 책장에 꼽힌 책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책장의 중간 쯤. 아무런 제목이 적히지 않은 작은 책이 보였고 그록은 저도 모르게 이를 뽑아들었다.

그는 제목이 없는 책을 한참 동안 손에 든 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를 펼쳐들었다.

사락. 사락.

종이가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어갔다.

그록은 가만히 서서 꿈쩍도 않은 채 이를 읽어 내려갔다.

[다른 이들도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었다. 내가 이를 모를 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 사람만큼 표 나게 다가온 이도 없었고, 접근하면서도 나에게 못생겼다고 말한 이도 그가 처음이었다.]

블란의 일기장이었다.

언제부터 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띄엄띄엄 그녀의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그록은 다시 점점 무언가가 목을 턱 막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못생겼다는 말에서 환희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고 거울을 볼 줄 알았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이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그리고 나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던 그 남자들의 눈동자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록은 일기장에서 시선을 떼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울이 보였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하.”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과도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 얼굴이 내 얼굴이었나?

과거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었던 얼굴은 사라졌다.

‘자네나 블란 아가씨나 몰골이 닮았구만. 부부라고 어째 똑같이…….’

언젠가 카만 의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록은 지난 일 년 동안 보았던 블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맞는 말이군.”

자신과 블란은 닮아져 있었다. 그록은 잠시 동안 거울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다시 일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몰랐겠지만, 아니 알면서도 스스로 모른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늘 무심하고 나와 많은 것들을 함께하지 않았지만.]

천천히 일기장이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사락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 사람은 내가 싫어한다고 말한 것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고 내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다정히 답해주지는 않아도.]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그 속에 혐오감이 없었다. 그냥 담담하고 무심하게 바라보았을 뿐.]

그록은 순간 장을 넘기지 못한 채 가만히 일기장을 바라봤다.

[그걸 보는 순간 느꼈다. 아, 나를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 눈동자만이라도 보면서 평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록은 목을 막던 것이 조금 더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삼켜낼 수 없을 만큼 목을 꽉 채운 것이 숨을 막아왔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그냥, 내가 그에게 첫눈에 반해서, 그래서 만든, 합리적이고픈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록은 다시 한 장을 천천히 넘겼다.

툭.

무언가가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일기장에 적힌 것을 읽었다.

[나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그래서 함께했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함께하지 않은 것 같아 너무나도 슬프다.]

그리고 마지막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작은 기대를 그 사람과 함께 할 때면 난 늘 가지게 된다.]

‘기다릴게요.’

그록은 숨이, 숨이 막혀왔다. 그는 순간 몸 저 안 깊숙한 어딘가에서 목을 타고 차오르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커헉!”

그는 허리를 굽힌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목을 막고 있던 것들이 그의 손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털어졌다. 그록은 붉게 물들어가는 카펫을 보며 삼켰던 것들을 토해내었다.

뚝.

뚝.

뚝.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록은 토하고 또 토해내었다. 그가 토해낸 것들이 그의 손 틈새로 흘러내려,

뚝뚝뚜욱.

붉게, 검붉게 바닥을 물들였다.

“크흑. 커헉.”

그록은 쉬지 않고 토해내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였다.

블란과 닮아진 삐쩍 마른 얼굴과 누렇게 뜨다 못해 검게 변한 얼굴.

하지만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른, 맑은 하늘을 닮지 못한,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동자.

“커헉, 컥!”

그록은 계속해서 토해내었다.

어깨가 몇 번이나 들썩였고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속에 있던 어떤 불길이 타고 올라오며 그의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태워 없애버리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스럽지 않았다.

뚜욱, 뚜욱, 뚜욱.

이제는 천천히 떨어지는 붉은 물방울을 보며 그록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아까 일기장에서 떨어진 그 종이였다.

그록은 종이를 펼쳐드는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하아. 하아.

그는 숨을 몰아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

‘기다릴게요.’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록은 떠지지 않으려는 눈을 겨우 떴다. 아직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연구자로서, 그래, 연구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쳐들었다.

아주 낡은 종이였다.

“하하하.”

그록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감기는 눈을 다시 뜨며 제일 위에 적힌 글자를 다시 읽었다.

[해보고 싶었던 일.]

그는 마음속으로 밑에 적힌 것들을 읽었다.

첫 번째. 같이 손잡고 걷기.

두 번째. 맛집 다 둘러보기.

세 번째.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기.

네 번째. 우드 축제 함께 보내기.

다섯 번째. 같이 여행가기.

그록은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며 읽어 내려갔다.

열 번째. 선물 주고받기.

.

.

스무 번째. 편지 받기.

.

.

.

마지막 서른 번째가 그록의 눈에 담겼다. 그의 입에서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른 번째. 내가 나아서 같이 오래 살기.]

그록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작은 기대를 그 사람과 함께 할 때면 난 늘 가지게 된다.]

그리고 다시 들려왔다.

‘기다릴게요.’

그록은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블란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아.

정말.

정말로.

그록은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사막을 헤매는 것처럼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 정말.

정말로.

그록은 토해내었다.

자신의 숨통을 막고 있던 것을.

나는, 정말로 멍청했구나.

그록은 붉게 물든 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내리찍듯이 박았다.

고칠 수 없는 병.

워보트.

그 병에 걸린 환자들이 그나마 오래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데에 가장 큰 힘을 차지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은 쉴단.

그 약초 때문이었다.

그록은 그 쉴단에 대해서 연구했다.

왜 자신이 그 약초에 대해서 연구했을까.

그 이유를 자신은 왜 몰랐을까!

쿵. 쿵. 쿵!

그록은 계속해서 자신의 머리를 붉게 물든 바닥에 내리찍었다.

이 멍청한 놈!

자신은 연구자가 아니었다.

자신은 정말로 멍청하다 못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놈이었다.

쿵. 쿵. 쿵!

그록은 계속해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고.

목을 막던 것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어떠한 소리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똑똑똑!

“주인님! 주인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록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록에게는 오직 들려왔다.

‘그, 그록 씨! 그록 씨라면 자, 잘 해낼 거예요! 그, 미래의 후원자로서 응원할게요!’

‘혹시 저, 저희 가문에 가셔서 연구를 하실, 그, 하시려는 생각이 있으신지. 그러니까 그 제안을 하, 한번 해보면, 그 생각을 그록 씨가 해보시면 어떨까 하는, 그런.’

‘기다릴 수 있어요.’

블란이 해주었던 말들이.

아, 나는. 나는, 정말이지!

그록은 끊임없이, 소리 없이 토해내었다.

[나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그래서 함께했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함께하지 않은 것 같아 너무나도 슬프다.]

[하지만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작은 기대를 그 사람과 함께 할 때면 난 늘 가지게 된다.]

기다리지 말라고.

나는 함께했다고 생각했다고.

그렇게 말이라도 해줄걸.

쿵, 쿵, 쿵.

똑똑똑!

“주인님,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가겠습니다!”

이 병신 같은 놈!

아.

정말.

나는, 정말!

그록은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손에 쥐고 있던 쪽지와 일기장을 품에 안았다.

정말.

정말.

그록은 깨달았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이 쉴단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했던 일이 쉴단 연구뿐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서른 번째까지.

그록은 다시 눈이 감기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힘을 주었지만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뺐다. 서서히 시야가 닫혀갔다.

벌컥!

“주인님!”

“그록!”

그는 닫히는 시야 틈새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카만의 다급한 얼굴과 하얗게 질린 집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귀에 들려왔다.

그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맑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

그리고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록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의 손에 원래 들려 있던 것.

[해보고 싶었던 일.]

그 종이 쪽지였다.

그록은 이 종이 한 장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왔다.

아직 그가 처음으로 블란을 보기 그 전으로.

눈을 뜬 그록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펼쳐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서른 번째.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씩 다시 읽어 내려갔다. 서서히 그의 눈에 어떤 기이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달력을 바라봤다.

마프렌 왕국력 721년.

“……과건데.”

블란은 알지 못하는 그록과 블란의 시작. 그 전으로 그록은 돌아왔다.

17살의 봄.

그록은 그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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