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4화 (4/95)

# 4화

4.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록의 일상이 변하지는 않았다. 블란과 그록은 늘 그 자리였다.

“미안해요, 그록.”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서로에게 말을 편하게 하게 되었다. 그뿐.

그록은 알트 차를 마시며 블란의 말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올해도 역시나 그록은 블란 샤를의 아버지 레온 샤를의 생일에 초대받지 못했다. 레온은 그록을 너무나도 싫어했다. 아니, 혐오했다.

‘너, 정말로! 저런! 너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놈이랑 결혼을 한다는 거냐? 내가 소문을 못 들었을 줄 아느냐? 돈자팔이라니! 세상에, 그런 명예도 모르는 놈이랑!’

그록은 벌써 오 년 전이었음에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 너머에서 문을 열려고 하며 레온 샤를이 외쳤던 말들을.

또한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레온 샤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 앞에 서 있던 블란이 마지막에 외쳤던 말을.

‘제 선택이에요, 아버지. 제발 저도 제가 선택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그 말을 그록은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 이후 레온 샤를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고 거친 숨을 몰아쉰 후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그 이후 그록은 블란과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의 가족은 오직 레온만이 있었고 신랑인 그록 자신의 가족은 어느 누구도 오지 않았다.

이미,

[못난 놈! 너에 대한 추한 소문을 들었다. 넌 더 이상 우리 바서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

고고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에게 내쳐진 그록이었으니까.

그렇게 결혼을 한 그록은 블란을 위해 레온이 준비했다던 저택에서 함께 부부 생활을 시작했다.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이었다.

몸이 좋지 못한 블란은 아이를 갖지 못했고 또한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몸매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록과의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 하나는 좋아하지.

그록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손을 뻗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러 올 때면 블란은 항상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원래 레이디의 예절로는 손을 테이블 아래에 두어야 맞았으나 블란은 항상 그랬다.

그록은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무심코 올려진 손을 빤히 보았을 때.

블란의 귓가가 붉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록이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았을 때 그록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때 그 손을 왜 잡았을까?

생각해보았으나 별달리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냥 잡고 싶었으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 뒤로도 항상 블란은 테이블 위에 입을 가리지 않는 한 손을 올려두었고 그록은 그 손을 잡았다.

아카데미 시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차를 마실 때 이 손을 잡는 행위일 것이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록은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가.

그는 잡았던 손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겠소.”

블란 역시 시계를 보고는 작게 답했다.

“네.”

그록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밖에 서 있는 집사와 의원이 보였다. 그록은 집사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는 의원을 향해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연구하러 가십니까?”

블란이 어릴 적부터 그녀를 치료해온 의원이었다.

유일하게 이 샤를 가문에서 그록에게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그록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록은 의원 카만의 물음에 무뚝뚝하게 답했다.

“네. 전 약초 연구자니까요.”

그 답에 카만은 한참 동안 물끄러미 그록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록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쯤, 연구를 하러 가야 하는데 붙잡힌 것에 대해서 조금씩 신경질이 날 때쯤. 카만은 담담하게 물었다.

“쉴단 연구 말이지요?”

순간 그록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몇 년이나 붙잡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쉴단에 대한 모든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록은 원하는 바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록은 카만의 눈을 바라봤다.

왜? 성과도 없는 연구를 붙잡고 있다고 그걸 비꼬려고 하는 말인가?

연구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록은 조금씩 조급해졌고 화가 쌓여갔다.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이 늘 초조해져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깨달을수록 그록은 연구에 더 매달렸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만의 늙었지만 깨끗한 눈동자를 향해 말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말해봤자 자신의 화만 쌓일 터. 그럴 바에는 연구를 하러 가는 것이 나았다. 카만에게서 등을 돌린 채 발걸음을 옮기는 그록의 귀에 카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그록 씨. 당신이라면 해낼 겁니다. 누구보다도.”

잔잔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간절하니까요.”

그록은 등 돌린 채 답했다.

“당연합니다. 전 연구자니까요.”

연구자라면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간절한 것은 당연할 터. 그록은 묵묵히 연구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귓가로 카만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그록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그쳤을 때쯤, 멀어져서 잘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목소리가 그록의 귓가에 닿았다.

“그렇지요. 당신은 진정한 연구자입니다.”

하지만 이를 흘려들으며 그록은 연구실로 향했다.

“후우.”

연구실 문을 열자마자 코에 닿는 쉴단의 짙은 향에 그록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아주 비싼 약초인 쉴단. 그 쉴단을 이렇게 쌓아놓고 연구할 수 있는 연구자는 오직 자신뿐일 것이다.

불치병인 워보트 병의 진전을 막는 데 주효한 역할을 하며 위에 좋다는 것은 알려졌으나 그것이 진정한 효능의 끝인지 알려지지 않은 약초. 대부분이 비밀에 싸인 약초였다.

그록은 분명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정한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알아내는 데 매진했다.

그는 쉴단을 손에 쥐었다.

“아.”

장갑을 안 꼈군.

그는 쉴단을 내려놓고 연구용 장갑을 끼기 위해 손을 폈다. 그러다가 문득 손 안에 가득한 쉴단의 향에 그록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아주 짧게 쉴단을 쥐어서 난 향인지.

혹은 블란의 손을 잡아서 나는 향인지.

그록은 그것이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다시 시계를 본 그는 그 궁금증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빠르게 실험을 준비했다.

블란은 갈수록 의원 카만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침대에 누워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차를 마실 때와 식사 시간뿐이었고 그록은 그 시간만큼은 꼭 지켰다.

비록 사랑이 없더라도 그록 자신이 남편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들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치이이익-

실험 용액이 끓는 소리와 함께 그록은 쉴단의 정확한 위 관련 효능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

그록은 저도 모르게 창문으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블란과 시선이 마주쳤다.

“저, 혹 추우세요?”

그록은 블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고기를 썰며 무심하게 답했다.

“별로. 춥진 않소.”

그록의 답에 블란은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은 한 번도 같은 테이블 위에서 식사를 한 적이 없었다. 블란이 이를 너무나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록은 처음으로 블란이 집사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았었다.

‘제가 따로 차려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제 말이 우습게 들렸나요?’

‘아, 아닙니다, 아가씨. 전 다만 두 분이서 조금 더 오붓하게 식사를 하시라고.’

‘괜찮으니 따로 준비해주세요.’

그록은 그때를 떠올리며 힐끗 블란의 식탁 위를 바라봤다.

늘 그렇듯이 소화가 잘 되는 음식들이었고.

늘 그렇듯 점점 식탁 위에 올려지는 음식들의 양이 줄어들고 간소해져갔다.

그는 블란을 힐끗 바라봤다.

전보다 살이 많이 빠졌지만 여전히 뚱뚱했다. 아니, 많이 부어 있었다.

불치병이라 불리는 워보트 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록은 다시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힐끗 창문을 바라봤다.

블란은 늘 식사를 할 때면 창문을 열어두었다. 그리고 서로의 말소리만 들릴 정도로 멀찍이 테이블을 둔 채 따로 식사를 했다.

결혼을 한 이후로, 늘.

다시 창문에서 시선을 돌린 그록은 블란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블란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록에게 말했다.

“많이 추우신 것 같은데.”

“아니. 별로.”

바로 답했지만 블란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이 그록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록은 물었다.

“당신은 춥지 않소?”

“네?”

그는 블란의 어깨 위에 걸쳐진 숄을 가리켰다.

“분명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한 장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두 겹이고 그 재질도 두꺼워졌는데. 담요도 올해는 무릎에 두 장이나 덮은 것 같고.”

“아.”

그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식탁 위와 창문, 그리고 숄들을 잠시 동안 바라봤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블란을 바라봤다.

블란의 눈동자가 이전보다 더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고 그록은 이를 보다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 소리에 블란의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으나 그록은 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그는 다시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내 쉴단 냄새가 심하다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니, 그렇겠군.”

“……네?”

블란이 의아하다는 듯이 그록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그록은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연구실에서 냄새를 빼고 와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소. 그 때문에 환기를 하는 것은 아나, 겨울 동안은 닫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는 블란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난 쉴단 때문에 냄새가 아주 많이 나오. 그래서 싫겠지만.”

“전혀요! 전혀 싫지 않아요!”

블란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빠르게 답했다.

“하나도 안 싫어요!”

“나도 그렇소.”

순간 빠르게 말하던 블란의 입이 닫혔다. 그록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블란을 향해 덧붙였다.

“연구자로서 후각에 예민해야 맞지만, 크흠, 어찌 되었든 난 개인적으로 쉴단의 이 냄새와 다양한 약초들의 냄새를 좋아하오. 연구자로서 말이오.”

“아, 저, 그게. 저는 그 쉴단 냄새 때문이 아니라. 그, 저한테서, 그, 그러니까.”

블란 다시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그록은 이를 모른 체하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창문을 닫았으면 하오.”

그녀는 잠시 동안 묘한 눈빛으로 그록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록은 이를 수락의 의미로 보았고.

“그럼 닫겠소.”

그는 창문을 모두 닫았다.

그제야 차가운 겨울바람이 아닌 훈훈한 방 안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훨씬 낫군.”

그록은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그록은 고개를 들었고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블란을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식사 안 하오?”

한참 동안 입을 달싹이던 블란은 작게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지금 먹으려구요.”

둘은 각자의 테이블에서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렸고 그 해부터 겨울은 내내 창문이 닫혀 있었다.

그리고 겨울 내내 그록은 그 날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음에도 옷에 밴 쉴단의 향을 지우지 않은 채 식탁 앞에 앉았고 그럴 때마다 그는 블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오. 연구하다가 급하게 오느라 자꾸 까먹는군.”

“괜찮아요.”

하지만 블란은 늘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록의 연구실과 그록과 블란이 함께 하는 공간에는 점점 독한 약초 향이 배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3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평소와 다름없이 그록은 알트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 전처럼 테이블 의자에 앉아 그록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오늘은 좀 괜찮소?”

항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블란이 이제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는 것이 달라져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