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3화 (3/95)

# 3화

3.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서 우드 아카데미 안에서 그록은 혼자가 되었다. 원래도 아는 이가 적었지만 더욱더 줄어 그는 혼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록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 그록 씨!”

그록이 남 우드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하자 역시나 블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학년이 되니 더 연구할 것이 늘어 번번이 약속 시간에 늦어도 늘 블란은 그록을 기다렸다. 그 때문인지 오늘도 늦었음에도 걸어가는 그록의 발걸음은 느긋했다.

“오, 오랜만이에요.”

그록은 블란이 건네는 인사에 무뚝뚝하게 답했다.

“삼 일 만인데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 듯합니다.”

“하하, 그, 그런가요?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요.”

하긴 삼 일 전에는 짧게 보기는 했지.

서 우드를 졸업하기 위해선 3학년 졸업 논문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 많은 시간을 써야 했던 그록은 블란을 볼 틈이 없었다.

그록은 딱히 다른 말 없이 찻집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걸음을 블란은 익숙하게 따랐다.

“그, 연구는 잘 되시나요?”

“졸업 논문 말씀이십니까?”

“네.”

흐음.

그록은 알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녀의 말에 답했다.

“엉망입니다.”

“네?”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그록은 어떤 감정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연구다보니 이번에는 가설만 제시할 것 같아서 과연 논문이 통과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 그런가요?”

그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트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현재 그록은 약초 쉴단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위에 좋다는 것만 밝혀졌을 뿐 진정한 그 사용방법이나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 그록 씨!”

그는 블란을 바라봤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우물쭈물했다. 그러다가 돌연 두 주먹을 살짝 쥐더니 그록에게 말했다.

“그록 씨라면 자, 잘 해낼 거예요! 그, 미래의 후원자로서 응원할게요!”

순간,

“하하.”

그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정말 못생겼네.

새삼 블란이 돈혐지인 것을, 그리고 그녀가 못생기고 뚱뚱하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큰 결심을 말하는 것마냥 볼살은 터질 것같이 올라와 있었고 부릅뜬 실눈에 나름 열심히 힘을 준 것인지 그 눈은 반짝반짝했고, 살에 파묻혀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가 어색하게 응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응원을 하기 위해 꼭 쥔 통통한 손까지.

정말이지. 못생겼네.

그렇다고 보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나름, 색다르고 귀엽긴 하네.

“블란 양.”

그록은 겨우 웃음을 가다듬으며 블란을 향해 말했다.

“응원 감사합니다.”

“아, 네, 네!”

안절부절못하던 블란이 다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 정말 못생겼네. 그록은 다시 한 번 더 그 생각을 하며 차를 마셨다. 하지만 찻잔에 댄 그 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블란은 그록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하늘을 닮은 파란 눈동자는 알 수 없는 빛을 띠며 그를 담았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록 씨.”

부름에 그록이 시선을 마주하자 그녀는 한참 동안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록은 그 기다림쯤은 익숙해져 있었다.

“저, 그, 조, 졸업하시면 그 어디로 가실지 예정이 있으시나요? 연구소라든지.”

찻잔을 들고 있던 그록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저런 말을 꺼내는 블란을 그는 처음 보았다.

여전히 우물쭈물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블란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다 알고 하는 소리일까?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서 우드 아카데미 안에서 그록은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록이라는 자신의 이름보다 다른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돈혐지 블란.

그리고 돈자팔 그록.

돈혐지의 남자친구인 그록.

돈 많고 혐오스러운 돼지 블란.

돈 때문에 자존심을 팔아버린 인간 그록.

약초학과 내에서 퍼지기 시작한 돈자팔 그록에 대한 소문은 서 우드 전체를 가로질렀고, 모두가 그록의 연구자로서의 그 긍지 없는 태도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을 건넸다.

어떻게 안 것인지 아주 세세하게 소문이 나 있었다. 그록 자신이 그런 속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약초학과 그록이 연구비를 마련하려고 돈혐지한테 붙어서 남자친구 행세를 한다. 이는 서 우드 아카데미 연구자로서 그 긍지와 명예를 버린 것과 다름없다. 돈에 자존심을 팔아버린, 돈자팔 그록!’

아마도 이 소문은 매튜가 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돈혐지라며 블란을 쳐다보던 그 시선으로 매튜는 그록을 바라보았고 가까이 오지 않았으니까.

소문은 점점 더 확산되었고 명예가 떨어진 그를 부를 연구소는 없었다. 후원자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긍지도 명예도 없는 학자이자 연구자라고.

하지만 그록은 그 말이 우스웠다.

그는 자신이 나쁜 사람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버지가 그 꺾이지 않는 자존심 때문에, 그 긍지와 명예 때문에 처자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그록은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블란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녀를 바라봤다. 여전히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쉴단에 파묻혀 산 자신에게서 더 고약한 냄새가 났을 것인데.

“없습니다.”

그록은 자신과 블란을 둘러싼 소문들과 그 소문들이 변하는 양상을 보면서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자신이 그런 나쁜 의도로 접근한 건 사실이지만, 어째서 순수하게 사귄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일까.

돈혐지 곁에는 돈자팔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그록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블란은 서 우드를 벗어나 동 우드 그리고 블란이 다니는 남 우드까지 소문이 퍼졌음에도 한 번도 이에 대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묵묵히 그록을 보러 나왔다.

그리고 그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록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는 블란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졸업 후에 어떠한 예정도, 계획도 없습니다. 아마 연구를 하겠죠.”

짧게 답한 그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알트 차 특유의 쓴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점심을 못 먹고 왔기 때문에 빈속에 마시는 차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점심도 굶으며 정신없이 연구를 하다가 블란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연구에서 벗어난 그였다.

“그, 그러면요.”

블란을 그록은 바라봤다.

블란 역시 그록을 바라봤다.

“혹시 저, 저희 가문에 가셔서 연구를 하실, 그, 하시려는 생각이 있으신지. 그러니까 그 제안을 하, 한번 해보면, 그 생각을 그록 씨가 해보시면 어떨까 하는, 그런.”

기다려왔던 순간이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그록에게로 찾아왔다.

평소처럼 찻집 한구석에 앉아 우물쭈물하며 말하는 블란.

아주 부유한 가문인 블란의 샤를 가문으로 가서 연구를 할 생각이 있냐는 말.

그 말을 듣기 위해, 그록은 블란에게 접근했었다.

묘한 심장의 두근거림이 그록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미칠 듯이 기쁘지는 않았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하게 여기다니, 자신이 생각보다 블란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정말이지 돈자팔, 그게 딱 맞는 별명이군.

그록은 평소처럼 블란을 바라봤다. 여전히 그녀는 우물쭈물 말했지만 평소보다 더 말을 못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하, 한번 생각을 해보시라는 의미에서.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 한번 말씀을 드려보는 건데. 아버지께는 허락을 받아서요, 아! 그 허락이 아니라, 투자를, 후원을 하신다고 해서요.”

“좋습니다.”

“그, 예. 예?”

“생각해보도록 하죠.”

“아, 네, 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블란을 보며 그록은 다시 차를 마셨다. 그는 힐끔 블란을 봤다. 신이 났는지 좋을 때 짓는 눈웃음이 블란의 눈꼬리에 걸렸다.

참. 이 여자도 웃기네.

그록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순간,

꼬르르르륵.

순간 블란이 움찔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그록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록은 여전히 담담했다.

블란은 이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록 씨, 식사하셨어요?”

“안 했습니다만.”

“그, 그러세요?”

꼬르륵. 그 소리의 주인은 그록이었다.

“네. 연구를 하다 보니 때를 놓쳤습니다.”

담담한 그의 답에 블란은 드물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표정은 또 처음 보네. 그록은 뚱뚱한 미간에 난 주름을 보며 속으로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블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계속 찌푸리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그록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입을 가리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주먹을 꼬옥 쥐고 있었다.

“그, 그러면 저,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 하는 건 어떨까요?”

그리 말하곤 입을 꾹 닫고선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답을 기다리는 그 모습에 그록은 바로 답했다.

“됐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아, 조, 조금 그렇죠?”

블란의 목소리가 어색함을 한껏 드러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록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블란 양은 어차피 편히 먹지도 못할 것 아닙니까?”

“네?”

블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록은 이를 더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워보트 병은 음식을 가려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틀렸습니까?”

“아, 그, 그게 맞긴 맞는데.”

어색하게 답하는 그녀를 보며 그록은 다시 알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차가 담긴 그녀의 찻잔을 가리키며 무심하게 말했다.

“알트 차의 경우야, 그 원재료가 되는 알트 찻잎이 소화에 도움이 되어 괜찮지만 음식들은 블란 양에게는 힘들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약초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잘 모르지만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약초 연구자로서 압니다.”

블란의 표정이 더욱더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새삼 늘 오던 찻집과 자신이 늘 시키는 알트 차와 그록이 늘 시키는 알트 차를 바라봤다.

우드 시에서 알트 차를 파는 곳은 이 찻집이 유일했다. 그녀의 얼굴이 웃는 듯 혹은 다른 표정인 듯 시시각각 변해갔다.

그런 그녀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록은 알트 차의 쓴 향을 맡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드 시에서 알트차를 파는 이 찻집이야 괜찮겠지만. 다른 곳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답이 없는 블란을 보며 그록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저를 부르는 연구소가 없다고 할지라도 지식은 어디 가서 빠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설마 쉴단을 연구하면서 워보트 병의 증상과 그 내용을 모를까.

이번에는 그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런 그를 블란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는 곧 블란에 의해 깨졌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헤어질까요? 그록 씨, 식사도 하셔야 하니까.”

그녀는 어딘가 홀가분하면서도 편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록은 그 질문에 미간의 주름을 지우며 무심하게 답했다.

“이왕 시킨 차는 다 마시고 가죠.”

그는 아직 남은 알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

“이 찻집의 알트 차는 꽤 많이 훌륭한 듯합니다.”

“맞아요.”

블란은 나직이 답했고 그녀 역시 알트 차를 마셨다.

둘은 평소처럼 별다른 대화 없이 알트 차를 마셨지만 그들의 시선은 평소보다 더 자주 서로를 향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록은 블란을 따라 그녀의 영지로 향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돈자팔이 돈혐지에게 팔려갔다고 말했지만 둘은 이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3년 후, 두 사람은 어느 순간 결혼을 해 부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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