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1화 (1/95)

# 1화

0.

그록은 없는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것도 연구자 집안의.

마프렌 왕국에서 재력가나 높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후원을 받지 못한 연구자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천성이 그런 것일까. 연구자들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하는 연구를 놓을 수가 없었다. 마치 평생의 모든 것인 듯 자신의 그 학문 분야를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했다.

그록의 아버지는 후원을 받지 못한 연구자였기에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빌어먹을 똥고집과 자존심으로 아버지는 어느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며 아쉬운 소리를 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자식과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 사실이 그록은 미치도록 싫었고 증오스러웠다.

그런데, 더욱더 증오스러운 사실은.

자신은 그런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그 역시 공부와 연구에 미친 연구자였고 쓸데없는 자존심과 똥고집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신은 아버지와 같은 성격의 인간이지만 아버지처럼 되기는 싫었다.

호화롭지는 않더라도 편안하게 연구하고 싶었고 자신의 자식을 못 먹어 굶주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록에게 깊은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록은 친구와 함께 아카데미를 걸어가고 있었다. 서 우드 아카데미에서 약초학과 함께 1년을 보내고 두 번째로 맞이한 봄이었다. 그 때문에 그록의 고민은 더 깊어져갔다.

그런 그의 귓가로 친구 매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저 돼지 이야기 알아?”

“뭔 소리야?”

친구 매튜는 어리둥절해하는 그록에게 슬쩍 고갯짓을 했다. 그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돌린 그록은 혼자 길을 걸어가는, 여학교인 남 우드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보였다.

정말로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였다.

“저 사람보고 돼지라고?”

“사람으로 보이냐? 완전 돼지지. 엄청 유명하잖냐.”

킥킥 웃으며 말하는 매튜의 얼굴은 사뭇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사려 깊은 모습과 달리 꽤나 많은 비웃음을 달고 있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매튜마저 비웃을 정도면 저 여자는, 저 돼지는 누구일까.

“뭐 때문에 유명한데?”

얼핏 혐오감과 비슷한 것이 매튜의 얼굴 위에 나타났다. 그런 모습 또한 처음 보았다.

얼마나 혐오스러운 인간이기에.

“보면 모르냐? 저 몸매랑 얼굴 봐. 그리고 가까이 가면 냄새도 나. 듣기로는 무슨 위가 안 좋아서 입에서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데. 몸에서도 독한 냄새가 배어 있고. 진짜 더러워서, 원.”

신랄한 목소리로 매튜는 말했다.

마치 심심풀이 땅콩을 대하듯, 마음껏 욕할 수 있는 대상마냥 대했다.

“몸매도 봐봐. 나는 남 우드 아카데미 여학생 중에 저렇게 몸매 관리 안 해서 돼지인 애는 처음 봐. 아니지, 그냥 우드 시 거리로 나가봐. 저런 돼지가 있나. 사람이냐, 저 몸이? 위도 안 좋다면서 얼마나 처먹길래 저렇게 쪄?”

처먹는다라.

매튜의 그런 말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굴도 봐. 저건 살이 문제가 아냐. 태어나기를 못생기게 태어났어. 저게 여자 얼굴이냐? 진짜 차라리 진짜 돼지가 귀엽지. 그래서 쟤 별명이 그거잖아. 돈혐지.”

“돈혐지?”

“돈 많은 혐오스러운 돼지.”

순간, 그록은 한 단어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돈 많은.

이유는 모르겠다. 있는 집안 자식이라고 하면 비꼬고 싶고 싫어지는 감정은 매사 평소와 같았으나, 그때는 조금 더 다른 감정이 들었다.

매튜는 흘러가듯이 말했다.

“저딴 애는 남 우드 아카데미를 졸업해도 레이디라는 이름을 달아줘선 안 돼. 레이디의 수치야. 저런 돼지랑 누가 결혼을 해주겠어? 안 그래?”

그록은 매튜의 말이 귀에 와 박혔다.

저런 돼지랑 누가 결혼을 해주겠어?

돈 많은 혐오스러운 돼지.

그 순간, 어떤 어두운 감정이 스멀스멀 그록의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방금 전까지 시선이 닿아 있던 곳을 한 번 더 바라봤다.

혼자서 길을 걷고 있는 뚱뚱하고 못생긴 얼굴의 여자.

그리고 돈 많은 여자.

저 여자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블란은 알지 못하는 그록과 블란의 시작이었다.

1.

그록은 처음으로 자신의 연구 분야인 약초학이 아닌 다른 것에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머리를 쓰면 쓸수록 실험을 많이 해야 해서 돈만 많이 드는 약초학과는 다른 것이었다. 지금의 이 생각은.

블란 샤를.

샤를 가문의 직계는 아니지만 방계로서 넓은 땅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레온 샤를의 외동딸.

어머니는 없고 현재 아버지인 레온 샤를과 둘이 살고 있으며, 운 좋게 가지고 있던 땅에서 광산이 발견되어 돈이 많을 뿐 특별한 관직 욕심도, 돈 욕심도, 명예욕도 없는 가문의 딸.

정말로, 정말로.

연구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저런 돼지랑 누가 결혼해주겠어?

매튜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록의 생각이 점점 더 확장되어 갔다.

만약 저 돈혐지, 블란과 결혼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약초학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도서관 이용 시간이 끝났습니다. 10분 안으로 짐 챙겨서 나가세요.”

사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퍼뜩 정신을 차린 그록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에 책 위에 놓인 편지가 보였다. 그록의 인상이 한없이 찡그려졌다.

[그록. 이번 달 생활비는 반만 보내주어야겠구나. 미안하다. 너희 아버지가 이번에도 후원자를 못 만났구나. 정말 미안하다.]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였다.

빌어먹을 아버지라는 인간은 이번에도 그깟 후원자 비위 하나 못 맞춰서 후원금을 얻을 기회를 잃었고 분명히 빚이 더 늘었을 것이며 어머니는 더 힘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 힘든 미래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음이 틀림없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편지와 책들을 챙겨 넣는 그록의 손길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블란 샤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미인이 태어나기로 유명한 샤를 가문에서 태어난 최초의 추녀.

그냥 추녀도 아닌 엄청나게 못생긴 여자.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더 유명했다.

거기다가 남자, 여자 모두 체형이 날렵하고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는 샤를 가문에서 유일하게 뚱뚱한데다 재능이라곤 없는 여자.

그렇기에 더욱더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혐오에 시달리고 배척받아야 했던 그녀.

그록은 알 수 없는 어떤 충동이 자꾸만 들었다.

블란 샤를. 돈혐지.

그는 이를 끊임없이 되새겼다.

도서관을 나와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록은 조금 더 생각을 확장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약초학 분야에서는 나름 이름 높은 연구자 가문의 장남이었다. 물론 돈과 권력은 없지만 학식과 명예로는 빠지지 않는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버지 같은 뻣뻣하다 못해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에게도 가끔씩 후원하려는 이들이 찾아왔었다.

그리고 자신의 외양.

자기 입으로 말하기는 그랬지만, 친구인 매튜는 늘 말했었다.

‘그 얼굴로 공부만 하는 너도 미친놈이다.’

그록 자신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는,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어디 가서 남을 꿀리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흐음.”

기숙사 건물이 보였지만 그록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충동이 점점 더 강해졌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잘만 된다면 자신에게 많은 이득이 생기는 일이었다.

강한, 정말로 강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실행에 옮기고 싶은 그런 충동이었다.

“후우.”

하지만 그록은 깊은 심호흡을 하며 그 충동을 억눌렀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았다.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인간.

그리고 여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

감정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모르는 인간.

그게 그록 바서.

자신이었다.

***

그렇지만 그록 자신은 결국 그 충동을 참지 못했다.

빌릴 책이 있어 남 우드 아카데미 도서관으로 향하던 그는 아카데미 건물 앞에서 돈혐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주위로 누구도 다가가지 않았다. 마치 혼자만 외로이 떨어진 듯 적막한 공간이었다.

“저기.”

그록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무슨……?”

못생긴 눈매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를 향한 순간 그록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강한 욕망이 일어났다.

나는 편하게 연구를 하고 싶어!

약초학을 놓을 수가 없어!

그렇기에 그록은 너무나도 어색하고 서툴게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죠?”

그리고 이 순간이 블란이 기억하는 그록과 블란의 시작이었다.

너무나도 어색한 목소리로 그록이 블란의 이름을 물었고, 블란은 한껏 움츠러든 채 그를 바라봤다.

딱 보기에도 혼돈이 가득한 블란의 눈동자였지만 그록은 본인이 더 혼돈과 충동으로 가득 찬 상태였기에 이를 알지 못했다. 대신 그녀에게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녀는 더 움츠러들었다.

“저는 서 우드 약초학과 2학년 그록 바서입니다.”

너무나도 뜬금없이 건넨 그록의 인사에 블란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왜 그러시죠?”

그러게.

그록 자신도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을 블란의 파란, 하늘빛 눈동자를 보면서 툭 내뱉었다.

“궁금하네요.”

자신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블란은 가만히 그록을 바라보다가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브, 블란 샤를입니다.”

“……그록 바서입니다.”

둘은 서로의 이름을 이날 처음 서로에게 말했다.

너무나도 어색하게.

그 뒤로 모든 것은 그록의 생각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처음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나눈 후로 그록은 블란과 가까워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블란이라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혐오의 눈길을 받아 움츠러들어 있어 자신이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따로 눈치를 보거나 기분을 맞추려고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만남이라고 해봤자 별것 없었다.

자신이 남 우드 아카데미에 가면 언제나 그녀가 나와 있었고 조금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지는 정도.

“오늘은 쉴단이란 약초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흔히 쓰이는 약초는 아닌데, 위에 좋은 약초입니다.”

“그, 들어봤어요.”

그록은 안다는 블란의 말에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언제나 그러하듯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위가 안 좋다보니까 약을 먹는데 그 중에서 들었던 기억이 나요.”

돈혐지. 그녀는 소문대로 입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이라기엔 독한 냄새들 중 몇몇을 그록은 알고 있었다.

독한 약초의 향이었다.

위에 좋지만 냄새가 독한 약초들.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록은 무뚝뚝한 얼굴로 블란을 보며 말했다.

“블란 양에게서 그 향이 나길래 말해봤습니다. 항시 복용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네.”

블란은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지만 늘 그 미소는 뚱뚱한 손바닥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신 흔들리는 눈동자만이 그록의 눈에 담겼다.

“그, 내, 냄새 심하죠?”

조심스럽게 건네는 블란의 물음에 그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긴 심한 냄새였다. 그러고는 그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당연합니다. 쉴단은 원래 냄새가 독한데 약용으로 재가공하면 그 향이 더 진해지니까요. 좋은 약을 쓰나 보군요. 쉴단은 좋을수록 향이 강하지요.”

그리고 실험하기에는 비싼 약초이기도 하고.

그록은 덧붙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한 번 더 상상했다. 만약 돈이 많으면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은 쉴단에 대해서 연구해 모두 다 밝혀낼 텐데.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블란이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느끼고 그녀를 바라봤다. 맑은 하늘빛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할 말이 있습니까?”

“아, 아뇨!”

블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색하게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록도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에 파묻힌 그 작은 눈도 살짝 눈꼬리를 접으며 웃음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록은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배려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거침없는 발걸음을 블란은 열심히 뒤따라갔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그록을 향했다.

뒤따라가는 블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그녀는 곧 그록의 옆에 서서 함께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