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79화 (완결) (79/79)

79화.

전화를 끊은 제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한데.”

근 3개월간 했던 통화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도운이 이렇게 쉽게 전화를 끊는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 도운은 의미 없는 전화를 걸어 잠이 안 온다고 칭얼거리기도 했고, 그러다가 잠이 깨면 보고 싶다는 둥, 사랑한다는 둥, 더 나아가서는 야릇한 말까지 서슴없이 쏟아 내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애가 깔끔하게 물러나니 서운하다기보다 의외로 잘 참고 있는 것 같아 기특했다. 국현에게 듣기로 도운은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제인은 핸드폰을 들어 도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 좀 자. 목소리가 지친 것 같았어.]

액정을 끄고 기다릴 것도 없었다. 반짝 빛을 내는 핸드폰의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사랑해.]

“참, 나…….”

제인은 비눗방울이 터지듯 풉, 하고 웃었다. 이제야 서도운 같네.

장거리 연애를 하니 연락의 빈도수는 무척이나 높아졌다. 하루가 쉴 틈 없이 바빠 통화를 못 할 때, 제인은 문자를 한 통 달랑 남겨 두고는 종일 핸드폰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럼 도운은 폭풍처럼 문자를 보내 놓았다. 보고 싶어 내지는 사랑해. 그도 아니면 하고 싶어.

지금도 보시라.

[이따 보자.]

어차피 보지도 못하는 거. 이따 영상 통화를 걸려나 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제인은 핸드폰 모서리를 데스크에 콕콕 두드렸다.

도운의 헛소리도 부끄럽지 않은 걸 보니 이제 이 캐나다 생활도 익숙해졌나 보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인은 집무실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겨울의 캐나다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설원이 덧대지는 세상이 제인은 낯설지 않다. 어릴 때, 그녀가 살아왔던 세상이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이 겨울이 춥지 않은 이유. 이제는 이 겨울 속에 혼자가 아닌 이유는…….

‘겨울이 되면 찾아갈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켜 줄 사람이 있다는 것. 이제 손제인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것 때문이었다.

제인은 핸드폰을 들어 도운에게 마저 답장했다.

[정말 봤으면 좋겠네요, 이 아저씨야.]

투명한 유리창에 비친 제인의 얼굴엔 맑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 * *

캐나다에 있는 에덴 건설은 제인이 실무를 배우기에 매우 적합했다. 아무래도 타국이어서 그런지 한국 본사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와 경영 업무가 더 체계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한 달은 물론 많이 버벅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언론 고시 준비를 하며 배웠던 영어가 빨리 늘었고, 제임스가 있기에 전혀 외롭지 않은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어제부로 도운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제인은 개의치 않았다. 강한 믿음이 있기에 일이 바쁜가 보다, 하고 그녀도 열심히 캐나다 에덴 건설의 회의에 참석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제인, 갈수록 실무 능력이 늘어나는 것 같아. 유학생을 위한 집 렌트 발표는 너무 좋았어. 월세 가격도 그만하면 돈 없는 유학생들에게 적합할 것 같고.」

「아무래도 캐나다로 많이들 오니까 생각해 봤어요. 이민 오는 사람들을 위한 시도도 에덴에서 먼저 해 봤으면 해요.」

「예를 들면 어떤?」

「음. 요즘 집값이 너무 비싸니까 청약처럼 에덴 건설에서도 제도 하나를 만들어서 한 1년간은 적절한 가격에서 사람들이 지낼 수 있게 하는 거예요. 그 후에 집값을 조금 올려서 살고 말고는 그들이 결정할 수 있게.」

「이를테면 아이스크림 가게의 맛보기 스푼처럼?」

「정확한 비유네요.」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제임스는 정말 좋은 파트너였다. 지금도 그녀가 한 말을 태블릿에 곧장 적으며 다음 회의에 의견을 제시해 보자고 했다.

지금 시간은 어느새 저녁 8시. 에덴 건설 로비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캐나다에 산 지 오래됐지만, 이 눈은 좋았던 적이 없어.」

「많이 오긴 하네요.」

며칠 전부터 내리던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쌓이는 중이었다. 제인은 손바닥을 들어 떨어지는 눈을 느껴 보았다.

「제인은 겨울을 좋아하나 봐.」

「왜요?」

「웃고 있잖아.」

옆에 선 제임스는 자신의 입꼬리를 검지로 찍어 위로 쓱 올렸다.

「아.」

작게 탄식한 제인은 다시 웃음이 났다. 자신이 웃고 있는지도 몰라 더 웃겼던 탓이었다.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설마, 도운?」

딸의 연애사를 듣는 것처럼 제임스의 표정이 은근해졌다. 이 캐나다 에덴 건설에서 도운과 그녀의 사이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한국 에덴 건설과 캐나다 에덴 건설은 주기적으로 소통을 했고 당연지사 입 빠른 직원들이 그것을 이곳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는 걸 제인은 알게 되었다.

정말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나 보다. 제인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애만 생각하면 제 겨울은 따뜻해져요.」

서도운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캐나다에서 저녁 8시면 한국은 오전 10시쯤 됐을 텐데. 제인이 내리는 눈을 보며 웃자 제임스는 사랑에 빠진 그녀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사실 그에게는 회의 도중 한 통의 연락이 왔었다.

[안녕하세요, 제임스. 저 서도운 전무의 비서 배교진입니다. 혹시 제인 씨 스케줄을 알 수 있을까요?]

도운의 비서가 왜? 혹여나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곧장 답장했지만, 대답은 심플했다.

[전무님이 캐나다에 도착하셨거든요.]

아, 오케이. 제임스는 그 즉시 제인의 스케줄을 보고했다. 아마 눈을 보며 남자를 그리워하는 제인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세상 모든 서프라이즈는 아름답지. 갑작스럽게 내리는 이 눈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비밀을 지킨 제임스는 은근히 제인을 재촉했다.

「제인, 혼자 이 근처 좀 둘러보는 게 어때? 그동안은 너무 일만 했잖아.」

「음, 그럴까요? 같이 가서 식사라도 해요.」

「절대 아니야. 나도 오늘은 가족들이랑 오붓하게 식사나 하려고. 내가 괜찮은 집 하나 소개시켜 줄게.」

그러니 제인도 도운과 오붓한 재회를 하라구. 괜히 소싯적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한 제임스는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제인에게 어서 가라며 손짓했다.

그녀가 멀어지고 나서야 제임스는 다시 한번 교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인은 뉴몬 레스토랑으로 갔습니다.]

* * *

타고난 미식가인 제임스의 선택은 옳았다. 뉴몬 레스토랑은 산속의 산장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음식 맛도 아주 훌륭했다. 매번 미팅이며 출장이며 돌아다니면서 자주 스테이크를 썰었던 제인은 간단한 연어 샐러드와 미트볼을 시켜 식사를 끝마쳤다.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식사는 잘하셨나요?」

「네, 너무 맛있었어요. 다음엔 지인과 함께 올게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받아 들었다. 잠시 레스토랑 안을 보니 전부 다 연인들이었다. 추워지는 날씨만큼 그들은 서로의 곁에 꼭 붙어 입을 맞추기도 했고, 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자연스레 도운이 생각난 제인은 언젠간 그와도 이곳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산을 마치고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9시가 넘은 시각.

도운은 여전히 연락이 없다.

“많이 바쁜가…….”

입을 열자 뽀얀 입김이 훅 퍼졌다. 그녀는 전화를 하는 대신 문자를 남기기로 했다. 레스토랑을 나오면 곧장 커다란 광장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자 광장 가운데에는 커다란 트리가 자리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제인도 그 트리를 찰칵, 찍어 도운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다짐이 무색하게 충동적으로 도운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이 이어졌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잠시 트리를 올려다보다 뒤를 돌 때였다. 무심코 스쳐 지나간 시선에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긴 신호음이 무색할 만큼 순간 가깝게 들렸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남자의 벨소리였다.

“너…….”

이윽고 신호음이 끊겼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겨울이 오면 찾아온다고 했잖아.”

그토록 그리웠던 서도운의 목소리가.

짓궂게 웃고 있는 도운은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 내리는 눈이 문득 느려지기 시작했다. 제인에겐 오로지 도운의 말과 얼굴만 생생했다.

“같이 살자.”

가까이에서 밀려오는 숨결. 그리고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달큼한 음성에 두 번이나 고백을 받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 옛날까지 합해서 총 세 번. 제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같이 살자.”

제인은 손을 뻗어 도운의 목을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도운은 작은 품을 한가득 안았다. 낮은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나도.”

나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말하기도 전에 도운이 거리를 벌렸다. 마주한 눈은 깊었고, 차가운 뺨을 감싸 쥐는 손은 따스했다.

“얼마만큼?”

“많이.”

제인은 망설임 없이 까치발을 들었다. 숨결이 성급하게 뒤엉켰다. 트리 아래에서 나누는 뜨거운 키스를 본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제인의 혀를 빨며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은 도운은 이마를 맞붙이고 말했다.

“사랑해.”

나지막한 고백에 제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나도…… 사랑해.”

심장이 간지러웠다. 이 겨울은 이제 두 사람에게 그런 계절이 되었다. 함께이기에 춥지 않고, 함께이기에 만날 수 있었던.

네가 있기에 나는 비로소 봄이 될 수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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