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3일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년간 못 한다는 걸 인지한 도운이 제인을 사정없이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소파에서도, 밥을 먹던 식탁에서도, 옷을 갈아입던 드레스 룸 안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도운 덕분에 제인의 밤은 길고, 낮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떠나는 당일 아침. 그녀는 가족들과 정다운 식사를 했다. 은선은 마지막까지 제인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었고, 국현은 그런 두 여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도운은 아무 말 없이 제인의 얼굴을 헤아리기만 했는데, 그녀가 웃을 때마다 따라 웃고는 했다. 이별이 이렇게 평화롭고, 따뜻할 수도 있구나. 제인은 그걸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해는 서서히 저물어 어느덧 비행 시간인 저녁 6시가 가까워졌다. 인천 공항 앞에는 기자들로 가득했다. 국현과 따로 이동한 도운은 잡고 있던 제인의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리자.”
먼저 운전석에서 내린 도운은 몰려드는 기자를 뚫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후우. 짧은 숨을 내쉰 제인은 차에서 내렸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와 기자들의 질문 속에서 도운과 국현은 제인의 보디가드를 자처해 주었다. 공항에 오니 비로소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그녀는 출국 게이트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국현을 돌아보았다. 웃지만 착잡함이 가득하기도 한 표정을 지은 국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잘 다녀와. 이번엔 아빠가 어디 안 가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빠는 원래도 어디 가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힘들면 새벽에라도 전화할 거예요.”
“그래, 자라나는 동안 못 부린 투정 다 받아 줄 테니 얼마든지 연락해.”
딸의 전화라면 자다가도 허허 웃으며 받을 자신이 있다. 국현은 제인을 품 안에 가득 안았다. 이미 다 커 버린 아이를 안으면 여전히 가슴이 울컥한다. 사랑하는 딸의 성장 과정을 보지 못했다는 게. 이렇게 크기까지 홀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아서.
“내 딸.”
“여기서 울면 안 돼요.”
사진 찍혀서 대문짝만하게 기사 뜰걸요? 제인은 쿡쿡거리며 속삭였다. 그녀라고 코끝이 찡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마지막을 눈물로 장식할 필요는 없지 않나.
국현에게서 멀어진 제인은 그를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고개를 끄덕여 준 그가 도운에게 다음을 양보했다. 제인은 다가온 도운을 말없이 응시했다. 도운도 마찬가지였다.
이 넓은 공항. 두 사람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한동안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녀올게.”
“아니, 오지 마.”
도운은 제인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내가 갈 거니까.”
정말 못 말려. 제인은 한숨처럼 웃었다. 예상처럼 입술 새로 뜨거운 숨결이 밀려 들어왔다. 진득하지만, 얕은. 짧은 입맞춤이었다.
제인은 멀어지는 도운의 어깨를 살짝 때렸다.
“넌 진짜 마지막까지.”
“뭐 어때. 결혼할 사이에.”
청혼도 안 했으면서 말은 참 잘한다. 피식 웃은 제인은 기내용 캐리어를 고쳐 잡았다. 이제는 정말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다녀올게.”
“제인아.”
“응?”
돌아서려는 제인을 도운이 불러 세웠다. 뒤를 돌자 도운이 코끝을 찡그렸다.
“겨울이 오면 갈게.”
오긴 뭘 와. 넌 여기 남아서 일해야지. 농담도 참 말이 되게끔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인은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돋움이었다.
* * *
장장 열 시간이 되는 비행이 끝났다. 단정한 미소를 짓는 승무원에게 인사를 하며 비행기 밖으로 나오자 서울보다 추운 10월의 토론토 날씨가 몸을 감싸 왔다.
“캐리어는 미리 찾았다고 했는데…….”
인천 공항만큼 토론토 국제 공항엔 사람이 많았다. 제인은 두리번거리며 국현이 말해 준 에덴 호텔 토론토 지사 임원인 제임스를 찾았다.
「제인 양?」
제임스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글서글한 중년 남성이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제인은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네, 제가 제인이에요. 제임스 맞나요?」
「보스가 가장 예쁜 동양인이 본인 딸이라더니,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전 앞으로 제인 양을 도와 에덴 건설에서 일할 제임스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빠가 그런 주책을 떨었다니. 제인은 민망함에 웃으며 제임스와 악수를 했다. 제임스는 친히 그녀의 캐리어를 끌어 주며 주차된 차로 안내했다.
「한국 이름도 제인이니 외국 이름은 따로 바꿀 필요가 없어 편하겠어요.」
「네, 그럼 셈이죠.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먼저 제인의 집으로 갈 겁니다. 집이 마음에 들 거예요. 제가 제 딸을 유학 보낸 심정으로 열심히 골랐거든요.」
「제임스 씨도 딸이 있으세요?」
「그럼요. 무려 세 명이나 있답니다. 사진 좀 보시겠어요?」
그녀가 잘 적응하도록 제임스는 끊임없이 제인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사진 속에서는 금발의 어여쁜 미녀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단란한 가족의 형태를 보며 제인은 덩달아 미소를 짓게 됐다.
「저도 한국에 들어가면 제 가족들이랑 사진 한 장 남겨 두어야겠어요.」
아빠랑 원장님. 그리고 도운이와 단란하게. 제인은 차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토론토의 맑은 하늘과 낯선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머나먼 타국이 낯설지만 무섭지 않은 이유. 언제든 자신에겐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제인은 환한 미소를 띨 수 있었다.
* * *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한국의 겨울. 서울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시린 배경을 등진 도운은 피곤함이 가득한 눈으로 서류를 검토했다.
저 독한 놈.
노크 없이 살짝 문을 연 교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딱 필요할 만큼의 일을 했던 친구 녀석이 일을 끌어모아 하기 시작한 건, 제인이 캐나다로 떠나기 전부터였다.
“시키신 일 전부 가져왔습니다.”
금방 학을 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자신은 친구의 성정을 아직 잘 알지 못하나 보다.
잠을 아끼고 시간을 쪼개서 쓰는 도운은 교진이 한 움큼 가져온 서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게 끝?”
“진짜 최최최종이야.”
“확실해, 최최최종?”
“어. 최최최종에 최최최종을 거듭한 최종이올시다.”
도운은 교진이 가져온 서류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씨고. 그도 사람인지라 힘들긴 했다.
도운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 내내 곧추세웠던 허리에 휴식을 주었다. 고개를 젖히니 뻐근한 목이 아우성쳤고, 감은 눈 안으로는 시큰거림이 고여 있었다. 교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운의 데스크를 똑똑 쳤다.
“야. 제인 씨한테 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해. 캐나다 가기 전에 네가 골로 가겠어.”
“겨울이 오면 가기로 약속했어.”
물론 혼자만의 약속이다. 공항에서 그 말을 했을 때 제인은 또 뭔 헛소리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제인은 매번 표정으로 말하고는 했는데, 특히나 눈을 흘기며 미간을 찌푸릴 때 볼록 튀어나온 살은 깨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아, 상상하자니 또 보고 싶다. 매일 보고 싶은데 일 년을 도대체 어떻게 참아. 도운이 내린 특단의 조치는 일이란 일은 전부 끌어 와 한 다음 캐나다로 향하는 것이었다.
충동적인 생각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전부 제인을 위한 일이었다. 국현의 친딸이 제인임이 밝혀진 후, 도운에게는 숱한 제안이 있었다. 손제인마저 외국으로 간 마당에 자신들과 손을 잡아 에덴을 잡아먹자는 검은 유혹이 말이다.
애틋한 사랑놀이보다야 짭짤한 수익을 노리자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운은 어이가 없었다. 나름대로 그의 능력을 높이 산다는 아부가 이어졌지만, 도운에게는 그 모든 말들이 결국 제인을 개처럼 무시하고 국현의 뒤통수를 치자는 뜻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방법은 하나다. 여전히 견고한 제인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 성장하는 제인과 많은 걸 쥐고 있는 도운이 하나가 돼 더 강한 세력을 만드는 것.
그럼 그 누구도 제인을 무시하지 못한다. 서도운이 가진 전부는 결국 손제인 것이 될 테니.
그리고 시린 겨울. 아팠던 기억밖에 없던 그곳에서 도운은 제인에게 꼭 해 줄 말이 있었다. 마침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시간이면 제인이 회의를 끝냈을 즈음이었다. 언제 피곤했냐는 듯 눈을 뜨는 도운을 보고 교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지독한 놈.
“여보세요?”
-나야. 뭐 하고 있어?
도운은 들고 있던 핸드폰에 힘을 더욱 주었다. 매번 옆에서 듣던 목소리가 이딴 고철을 통해 들린다고 생각하니 더 가까이 듣고 싶은 욕심이 치솟았다.
“나 누나 생각.”
-……너는 그런 말 하면 아무렇지도 않아?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누가 그랬나. 몸이 멀어지니 마음은 더욱 애끓었고, 도운은 단비처럼 내려오는 제인의 전화에 더욱 목을 맸다.
노골적인 고백은 기본이었고, 가끔 유리구슬처럼 맑은 목소리를 듣노라면 아래가 단단해져 야릇한 언사도 가감 없이 내뱉었다. 제인은 평생 적응하지 못할 그의 사랑법이었다.
“이게 내 진심인데 어떡해.”
환장하게 예쁘지나 말지. 평소 같았으면 이 말을 하고 당황하는 제인의 헛웃음을 들었겠지만, 이번만큼은 꾹 참았다.
-아무튼 나 오늘 회의 끝났어. 피곤해서 일찍 가서 자려고.
“알았어. 내일 연락하자.”
도운은 난생처음으로 제인의 전화를 미련 없이 끊었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위. 그 무엇을 상상하든 직접 만나서 해 줄 거니까.
교진이 가져와 살핀 서류도 이미 도운이 끝낸 일들이었다. 이 이상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겠나. 손바닥으로 책상을 친 도운은 경쾌하게 일어났다.
“가자.”
교진은 그 말을 이해하는 자신이 싫었다.
“지금……?”
“어, 지금. 당장 캐나다로.”
전용기 준비해 놔. 그렇게 말하는 도운의 표정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피곤함이 싹 가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