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새로운 하루는 금방 돌아왔다. 수많은 언론사의 기자들은 새벽 내내 바쁘게 움직여 제인의 경영 수업과 해외 유학이라는 기사를 대거 터뜨렸다.
그에 뒤따라오는 도운과의 결혼설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이제 감추지 않았다. 애초에 대놓고 깊은 관계임을인정했으나 결혼은 시기상조의 문제이고, 현재로서는 경영 실무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당당하게 내놓았다.
그건 전부 국현의 빠른 판단과 실천력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도운과 제인의 관계에 대해 떠들던 불미스러운 싹은 잘렸고, 갈라섰던 두 사람의 임원진들 또한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다시 하나로 뭉쳤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이틀. 언론이 수습되었으니 제인은 가까운 사람들과 하나둘 이별을 해야 했다. 그는 국현이 내어 준 시원한 체리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은선 씨한테는 잘 다녀왔고?”
물어보는 어미는 다정했고, 특정한 이름은 더욱 부드럽게 느껴졌다. 제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사 접하시고 서운해하실 줄 알았는데 도리어 기뻐하셨어요.”
너무 급작스럽게 맞닥뜨린 상황이 많은 터라 은선에게 상의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못내 미안했는데, 은선은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제인의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서운할 게 뭐가 있어. 처음과 끝은 같은 시작점이래. 제인이 너는 더 큰 세상으로 가서 성장하는 거고, 영원한 이별이 아니잖아. 나는 그게 너무 뿌듯하고 기분 좋아.’
깊이 웃는 은선의 미소엔 거짓이 한 톨도 섞이지 않았다. 엄마의 마음이란 건 이런 걸까. 제인은 한동안 은선을 안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어느 누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에게 이럴 수 있겠어요. 원장님은 정말 제 삶의 은인이나 다름없어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국현은 자연스레 은선을 떠올렸다. 그녀로 인해 미소가 지어지는 건 이제 일상이 되었다.
“착하고, 좋은 여자야. 너를 대신 키워 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또 아빠한테는 사랑하는 여자이기도 하죠.”
“뭐야?”
놀라시긴. 제인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국현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다.
“아빠, 겁먹지 말고 원장님에게 솔직하게 다가가세요. 황혼에 애들처럼 눈치만 보고 그게 뭐야.”
바보같이. 제인이 살짝 눈을 흘기자 국현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서로 마음이 있는 것도 알고, 이제 거리낄 것도 없는데 국현은 자신의 위치와 지난 치정 싸움으로 인해 은선에게 피해가 갈까 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원장님 포기하실 것도 아니면서.”
이제 제대로 된 운명을 만났으니 덥석 잡으셔야지.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그럼 도운이 보러 갈게요.”
“아빠한테는 창피만 주고, 하여튼.”
국현이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제인은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그가 보였다.
이제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뿐이겠지. 제인은 자신에게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웃어 주며 도운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녀는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짧은 휴식을 얻었다.
그래서 틈틈이 도운의 얼굴도 볼 겸 교진에게도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는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웬 수많은 서류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뿐.
“많이 바쁜가.”
혹시 도운도 자리에 없는 걸까. 그녀는 똑똑, 노크했다. 기다려도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살짝 문을 열어 보았다.
“서도…….”
열린 문틈으로 잠든 도운이 보였다. 말을 급하게 삼킨 제인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책상에는 교진의 업무 서류보다 훨씬 더 많은 보고서들이 탑을 쌓고 있었다.
“뭐야. 바빴나?”
그녀가 해외 지사로 가도 업무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도운의 일은 괜찮다고 들었는데. 심지어 집에서도 티를 하나도 안 내 일이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서도운이 의자에 그냥 앉아 잘 정도면 정말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건데…….
제인은 도운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정말 깊은 잠을 자는 모양인지 넓은 가슴이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제인은 손을 뻗어 매끈한 피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왠지 피곤해 보이는 눈 밑을 쓸어 주며 굳게 닫힌 입술로 손을 내렸다. 그 순간 입술이 벌어지며 촉촉한 혀가 튀어나왔다.
“흣.”
뱀 같은 혀는 근처에 있는 제인의 손을 쓱 핥고 들어갔다. 놀란 제인이 어깨를 움츠렸을 때, 도운은 언제 잤냐는 듯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왕 만질 거 입술로 만져 주지?”
“너 안 잤어?”
“잤어.”
짤막하게 대답한 도운은 깊이 묻은 상체를 세웠다. 단단한 팔은 넓은 포물선을 그려 제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안전하게 도운의 허벅지 위에 앉은 제인은 그의 어깨에 두 손을 댔다.
“잘 거고.”
턱을 당긴 도운이 입술을 포갰다. 허리를 감싼 손이 뒤통수로 올라와 제인의 고개를 느슨히 기울였다. 하여튼 선수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인은 열띤 입맞춤에 리듬을 맞췄다.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다가 입안을 휘젓는 도운의 혀를 따뜻하게 휘감았다. 포박된 몸에 왈칵 힘이 실린다 싶더니 도운의 목 끝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키스를 더욱 강하게 퍼붓는 도운을 이겨 내느라 턱이 젖혀지고, 몸이 밀착되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버거워 고개를 돌렸겠지만, 이 키스도 이제 얼마 못 가면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제인은 엉덩이를 움켜쥐고 상의로 파고드는 성급한 손길을 달래듯 그의 혀에 혀를 밀착하며 비벼 댔다.
“그런데, 너.”
입술을 뗀 제인이 도운의 두 뺨을 그러쥐었다. 흥이 끊긴 도운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왜.”
빨리. 나 급해. 갈라진 음성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금방 또 달려들 것 같아 제인은 도운의 얼굴을 붙들어 매듯 손에 힘을 주었다.
“나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혓바닥을 함부로 놀려.”
이건 또 뭔 소리야. 눈썹을 구긴 도운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질투하는구나.”
자신이 없을 때도 이럴까 봐 한 질문이기는 하다. 제인이 묵묵부답으로 수긍하자 도운은 두 팔로 제인의 몸을 꽉 고정했다.
“제발 걱정할 걸 걱정해.”
그러고는 두 다리를 넓게 벌려 앉은 제인의 허리를 붙들고 허리를 잘게 쳐올렸다. 뜨거운 중압감이 제인의 은밀한 곳을 부딪쳐 왔다.
“얘는 손제인 아니면 안 서.”
“하, 지 마.”
“먼저 자극한 사람이 누군데.”
천 위로 흐르는 자극에 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하는 것도 아닌데 멈추지 않는 허리 짓에 아랫배에 물이 고여 드는 느낌이었다.
“여기 회사야.”
“알아. 근데 난 네 손만 닿으면 개새끼 발정 난 것처럼 달려드는 놈이잖아.”
“그, 아. 아…….”
입 좀 다물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정작 입을 다물게 된 건 제인이었다. 고양되는 자극에 자꾸만 천이 닿아 대니 더 야릇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제인은 하는 수 없이 도운의 목을 끌어안고 소리를 끙끙 참아야만 했다.
귓가에 거칠어지는 도운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도 한계가 온 듯싶다.
“금방 끝낼게.”
손을 내린 도운이 제 벨트를 철컥, 풀었다.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나야. 잠깐 들어간다.”
교진이었다. 놀란 제인은 저도 모르게 도운의 책상 밑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제인의 심장은 콩알만 해졌다.
어떡해.
“시킨 대로 호텔 업무 중에서 전반적인 건 다 끌어 왔다.”
“잘……했어. 나가 봐.”
미쳤지, 미쳤어. 제인은 숨소리라도 들릴까 봐 눈앞에 보이는 도운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말을 끊은 도운의 목엔 핏대가 불거졌다.
아, 손제인. 진짜.
서류를 데스크 위에 올려 둔 교진은 잠시 멈칫했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왜긴 왜야. 밑이 터질 것 같으니까 그렇지.
“그냥 컨디션이 별로네. 한숨 잘 거니까 내가 나올 때까지 들어오지 마.”
“그래, 아프면 얘기하고.”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제인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살았다…….”
“살긴 뭘 살아. 난 죽을 뻔했는데.”
그러기를 무섭게 도운이 손을 뻗었다. 제인의 겨드랑이를 번쩍 들어 올린 도운은 그녀를 안아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일전에 도운의 방이었던 곳이었다.
침대에 몸을 누인 제인은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 그만해. 밖에 다 들려.”
도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넥타이와 셔츠를 벗어 던졌다.
“놀랍게도 내 집무실 방음이 너무 좋아요.”
그래도 불안하다면야, 뭐. 한 꺼풀씩 탈피한 도운은 완벽한 나신으로 몸을 일으켰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는 방문을 철컥, 걸어 잠갔다.
“이중 보안까지.”
제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돌아선 도운의 분신은 아주 거대한 몸집으로 그녀를 향해 꿈틀거렸다. 달리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욕망으로 꽉 찬 도운의 눈이 가까워졌다. 다시 한번 덮쳐 오는 도운의 몸에 제인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소리를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폭죽이 연달아 제인의 몸을 터뜨렸다.
* * *
그날 저녁, 두 사람은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에덴 호텔 레스토랑은 보는 눈이 많으니 다른 호텔을 도운이 통째로 빌린 것이었다. 내내 시달린 제인이 잠을 자는 동안.
“아.”
미안한 건지 그냥 이러고 싶은 건지. 도운은 제인의 옆에 콕 붙어 앉아 그녀의 수발을 들었다. 제인은 도운이 준 주홍빛 훈제 연어를 오물오물 씹었다.
“맛있어?”
“아니, 피곤해.”
“그럼 방 잡고 올라갈까?”
턱 하고 움직임을 멈춘 제인은 도운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렇게 하고 또 하고 싶냐? 이 눈빛이길래 도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누굴 탓하겠나. 이건 다 제 연인 때문인데. 매일 하고 싶고, 할수록 갈증 나는 손제인의 몸은 요물 그 자체였다.
“웃지 마.”
또 도운의 음흉한 생각을 훤히 읽은 제인은 그의 입속에 방울토마토를 넣어 주었다.
“나 없어도 잘 먹고, 잘 자고. 일 착실히 하면서 쓸데없이 왈왈거리지 말고.”
“너는 나 없이 잠도 잘 못 자고 먹지도 말고, 일도 안 돼서 나만 보고 싶다고 징징거려.”
“그 정도면 저주 아니야?”
“날 위한 저주긴 하지.”
도운은 한동안 못 볼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리송한 말에 제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러면 어쩔 건데?”
“당장 달려가지.”
일이고 뭐고. 때려치우면 혼날 것 같으니 속전속결로 끝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미간마저 사랑스러워 도운은 제인에게 입술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