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76화 (76/79)

76화.

실금이 간 도운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단정하게 맨 넥타이는 거친 손길에 힘없이 늘어졌다. 국현의 말은 너무도 아끼는 딸과 도운의 결혼을 반대하겠다는 고약한 심보가 아니었다.

“지금도 마른하늘에 친자식이 떨어졌다고 네 쪽으로 우호 세력이 몰리고 있어. 경영에 문외한인 제인이가 후계자 자리로 올라온다는 걸 막겠다는 거지. 이 바닥은 보수적이야. 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을, 제 눈에는 남자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밀어내려는 수작이고.”

“이유야 저도 잘 압니다. 그렇다고 21년을 생이별한 우리를…….”

그 꼬장꼬장한 이사회 늙은이들. 치솟는 감정을 쏟아 내려던 도운은 그를 제지하는 제인의 손길에 말을 멈추었다.

이거 봐. 손제인 손짓 하나에 멈추고, 기라면 길 수도 있는 나를. 도운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거칠게 들이켰다. 제인은 도운의 무릎을 툭툭 쳤다. 조금만 진정하고 더 들어 보라는 듯이.

국현은 두 아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 지고지순한 마음, 저도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라 타인의 소중한 마음에 그리 감성적이지 않다.

“지금도 말이 많은데 너를 보내 봐. 지금껏 내 후원을 받다가 결국 버려진 신세라는 말을 듣는 것밖에 더 돼? 너나 제인이, 그리고 나까지 욕먹고 에덴 건설의 이미지는 더욱 안 좋아져.”

알아서 잘 자라 준 두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부모 노릇을 할 줄은 몰랐다. 국현은 제인과 도운을 위해서라도 더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일갈했다.

“너는 너대로 한국에서 자리 더 보존하고 나아가. 제인이 너는 가서 네 자리 확실히 만들고. 그럼 된 거야. 결국, 이 바닥에서 원하는 건 너희의 사랑이 아닌 결과물일 테니.”

국현은 제인과 도운을 동등하게 사랑했다. 단 한 번도 도운을 피 안 섞인 남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친딸이라는 이유로 제인에게 더 힘을 실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열심히 노력해 온 도운은 당연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고, 당연한 호사를 누리지 못한 제인은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국현은 그 판을 깔아 주려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국현이 만든 안전한 지대에서 견고한 사랑을 나누도록.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언젠간 겪어야 하는 고비란 걸 알기에 국현은 더욱 강경했다.

“그럼 저는 언제 가면 될까요?”

그의 진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물었다. 국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당장 3일 뒤.”

국현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돌아가 있던 도운의 고개가 터무니없는 날짜에 제자리로 왔다.

“회장님.”

“지금 너희 관계 기사로 뜨고 난리다. 오래 끌어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어. 곧바로 떠나.”

이를 사리무는 도운의 턱 근육이 불거졌다. 제인은 착잡해져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두 손을 그러잡았다.

그래, 떨어지기 싫을 테지. 모르는 거 아니다. 사랑이라면 자신도 지독하게 해 봤으니까.

“나도 아쉽지 않은 거 아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 나서야 만난 내 딸이야. 도운이 너한테 이러고 싶지도 않고.”

국현은 시선을 골고루 던지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우리 모두 나중을 위한 발돋움이라고 생각하자. 지금만 바짝 고생하고, 더 평화롭게 지내 보자고. 내 말, 이해하겠지?”

이해는 한다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도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인을 바라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원래도 어려웠던 회사 일이 오늘따라 더 힘겨웠다. 안 그래도 풀리지 않는 문제에 유학 문제까지 더해지니 제인의 머릿속은 더 혼잡하게 꼬일 수밖에 없었다.

퇴근 시간엔 늘 도운과 함께 집으로 향했지만, 계속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국현의 말대로 두 사람의 관계를 담은 기사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했다. 뜨거운 감자가 된 두 사람은 사람들의 입방아와 손에서 요리조리 굴려졌다.

역시나 빼놓을 수 없는 승계권 문제뿐만 아니라 좋게는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라는 둥, 나쁘게는 맺어질 수 없는 관계 아니냐는 둥.

당사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이야기를 마구 제인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인은 도운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따로 퇴근하자. 나 먼저 집에 가 있을게.]

이 문자를 보면 도운이 꽤 열 받을 테지만 어쩌겠나. 조심해야 하는 게 맞지.

택시에 몸을 실은 그녀는 차 시트에 편히 몸을 기댔다. 경영의 경 자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용기를 내서 도전했는데, 요즘 따라 한계를 느끼고 있다.

“하아…….”

그러다 보니 국현의 말은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곱씹을수록 그의 결단과 판단은 신속했다.

“그래, 가자. 가야지.”

내가 가야 도운이와의 관계도. 아빠와의 관계도 지킬 수 있다.

게다가 저것 좀 보라지.

고급 아파트 단지를 지나치던 택시 기사는 제인이 말한 동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이구, 손님. 여기 사람이 많아서 더 못 들어가겠는데요? 여기에 뭐 연예인 산대요?”

이미 도운의 집 앞에는 기자가 깔렸다. 한숨을 쉰 제인은 다시 상냥하게 말했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시겠어요? 저도 여기서 내리기엔 무리네요.”

“알겠어요.”

여기에서 내리면 아마 난리가 날 것이다.

주자창을 통해 집으로 겨우 올라온 제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출국이 당장 3일 뒤라 짐도 부지런히 싸야 했다.

제인은 캐리어를 꺼내 도운의 집에 쌓인 자신의 소지품과 옷을 넣기 시작했다.

“서도운이 보면 난리 나겠네.”

한 마디 상의 없이 결정한 것에 대해 또 고삐 풀린 개처럼 길길이 날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어 록이 매섭게 눌리는 소리가 났다.

“손제인.”

긴 복도를 걸어오는 거친 발걸음은 짐을 싸는 제인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멈춘다. 도운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너 지금 뭐 해?”

“보면 몰라? 짐 싸잖아.”

“어디 가게.”

“캐나다.”

하. 짧은 실소를 뱉은 도운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다시 제인에게 꽂힌 눈은 사나웠다.

“나 화나게 할래?”

“화낼 일 아니야. 잘 생각해.”

제인은 접어 두던 옷을 캐리어 위에 올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운의 손을 슬그머니 잡아끌었다. 화난 와중에도 또 착하게 끌려와 고분고분 앉는 게 귀엽기도 했다.

제인은 웃음을 꾹 참고 도운을 차분히 어르고 달랬다.

“너나 나나 그때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되는 거였어. 잘못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내 앞에서 어른인 척하지 마. 넌 나한테 여자야.”

도운은 제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휘청하고 중심을 잃은 제인이 도운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았다. 자그마한 얼굴을 들어 올리는 도운의 손길은 더없이 단호했다.

“그리고 책임을 왜 네가 지는데.”

“누가 나 혼자 책임진대? 난 너한테도 책임 전가할 거야. 네가 그때 나한테 키스해서 이렇게 됐으니까 아빠 말대로 해.”

“뭐를.”

“다녀오면 나랑 결혼하자.”

제인은 몸을 틀어 도운을 마주 보고 앉았다. 작은 손이 두 뺨을 그러잡자 인상을 찌푸린 얼굴은 유하게 풀렸다.

“어렵지 않잖아. 나는 나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돌아올게. 너는 너대로 자리 지킨 후에 만나서 평생 같이 살자.”

무드 없는 뜬금 청혼이 가슴을 크게 울린다. 도운은 짙어진 시선으로 숨을 느리게 들이마셨다.

“지금 잠깐의 기다림과 너와 사는 평생을 두고 선택하라는 거지.”

“그렇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니까.”

“아, 손제인 진짜.”

날 너무 잘 다뤄. 날 너무 무기력한 남자로 만들어. 저 두 선택지 중에 선택하라니. 뻔한 거 아닌가.

도운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제인의 허리를 두 팔로 칭칭 감은 그는 그대로 뒤로 누웠다. 제인은 고목의 매미처럼 도운의 위로 엎드렸다.

“누나 너는 충격적인 통보를 너무 구미 당기게 해서 탈이야.”

“서도운 데리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잘 생각해 봐.”

도운의 가슴을 톡톡 두드린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던 건 마저 해야 하니까, 너는 생각할 시간 좀 가져. 그 뜻이 역력한 손길에 도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짜증 나게. 예뻐 가지고.”

도운은 그대로 작은 반항이라도 하듯이 제인의 옷을 들춰 보더니 캐리어를 쏟았다. 제인은 주먹을 쥐어 도운의 어깨를 콩, 때렸다.

“힘들게 쌌는데 왜 심술이야.”

“지금 캐나다는 겨울이세요, 이 아가씨야. 결혼하기도 전에 얼어 죽으려고.”

“아, 정말? 캐나다를 안 가 봐서 몰랐지.”

영영 몰랐다면 더 좋으련만. 도운은 한숨을 쉬며 옷장을 열었다.

“대신에.”

두꺼운 옷가지 몇 개를 챙긴 도운은 불시에 뒤를 돌았다. 제인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어디에 있는지 아니까 순순히 물러나는 거야. 돌아와서 딴소리 하기만 해. 그때는 그냥…….”

“알았어, 알았어.”

우리 도운이, 착하지.

제인은 달래 주듯 도운에게 입을 맞췄다. 어이없다는 도운의 헛웃음이 입술 위로 뜨겁게 스쳤다. 고집스레 입술을 열지 않으려고 했건만.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에 도운은 또 줏대 없이 넘어갔다.

별수 있겠나. 애초에 손제인을 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고작 3일. 사랑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도운은 넘어오는 제인의 숨결을 듬뿍 마셨다. 오늘 밤은 꽤 길 거라는 속내는 몰래 감춰 둔 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