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깔끔히 시선을 돌린 제인 앞으로 국현이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많이 힘들지?”
“아니에요.”
제인은 톡 쏘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사실 무척이나 고됐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제인에게 찾아와 친한 척을 했고, 국현과의 친분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무시할 순 없어 적절하게 응답해 주며 웃어 주니 목도 아프고 얼굴 근육도 당겼다.
“그래도 잘하고 있어. 힘들면 잠시 올라가서 쉬어도 된다.”
“네, 염려하지 마세요.”
미소 지은 제인은 자연스럽게 도운을 찾았다. 멀리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건 심채연뿐만이 아니다.
여기서도 가장 빛나는 남자. 월등한 아우라를 풍기며 분위기를 좌우하는 남자.
도운은 또 다른 업무의 연장선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종일 붙어 있어 사람들의 의심을 사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몰려드는 재계인들로 그럴 틈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제인은 몰래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찌르르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바람을 쐴 생각이었다.
그마저도 방해가 된 건 뒤따라오는 인기척 때문이었다. 도운인가, 생각했지만,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어 나올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는 건…….
“제인아,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하태웅과 심채연. 그중 가장 덜 최악인 하태웅이었다. 목소리를 듣고도 뒤돌지 않은 제인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몸을 돌린 제인은 그대로 태웅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잠깐이면 돼.”
그조차도 태웅이 막아섰다. 제인은 손목을 붙잡는 태웅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앞뒤 분간 못 하고 들러붙는 태웅이 짜증 났다. 그러나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고, 언성을 높이고 싶지도 않았다.
제인은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빨리해. 괜한 구설에 오르기 싫으니까.”
태웅은 제인이 뿌리친 손끝을 문지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넌 정말 에덴의 사람이 됐나 보구나.”
“가족이 된 거지. 먼 길을 돌아서.”
“……미안하다. 내가 어리석었어. 진작 알았더라면 너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을 거야.”
잠시 숨을 들이켠 태웅은 제인에게 사죄했다. 내내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심채연이 위험을 무릅쓰고 제인이를 보려고 한 것처럼, 그는 무리해서라도 제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래서?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말해.”
“……우리, 친구로라도 지낼 수 없는 거니?”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혹여나 마지막 기회가 있다면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싶었다.
“응, 안 돼.”
하지만 단호한 한 마디에 억지로 쌓아 올린 기대의 탑이 와르르 무너진다. 회색빛 세상이 되어 가는 태웅의 눈동자를 제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자 사랑하고, 혼자 뛰어들고, 혼자 이별하고. 이처럼 폭력적인 마음을 왜 강요하는 건지.
제인이 도운을 사랑하는 이유는 평등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쏟아붓되, 누나를 찾고 싶다 했을 때도. 제인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에덴 호텔 출입증을 건넸을 때도.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으면서도 일언반구하지 않았을 때도.
도운은 제인을 아끼고, 헤아리며 그녀가 그를 더욱더 사랑할 수 있게끔 해 주는 존재였다. 그러니 혼자만의 감정은 스스로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제인은 태웅을 스쳐 지나갔다. 아마 지금쯤 도운이 그녀가 없다는 걸 눈치채고 찾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제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태웅은 줄곧 저의 감정을 그녀에게 강요하고 있으니 이건 얘기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뭐 하나 더 알려 줄까?”
태웅은 반 발자국 몸을 틀었다. 살짝 고개를 돌린 제인의 옆모습이 보였다.
“선배가 나랑 정말 화해하고 싶었다면, 나한테 사과를 하고 싶었다면. 여기엔 적어도 혼자 왔어야지.”
“너…….”
태웅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아까 잠깐 스친 것만으로 눈치챈 건가? 뭐가 됐든 태웅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
“앞으로는 제발 마주치지 말자.”
이 관계는 정말 끝이 났다는 걸. 그것을 비로소 인정하는 순간 제인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기를 무섭게, 두 사람이 서 있는 왼쪽 나무에서 채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멀어지는 제인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그래.”
안녕. 이제 진짜 안녕.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원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원우는 말없이 채연의 손을 그러쥐었다.
“가자, 채연아.”
“……응.”
채연은 원우를 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너와 떠나야 하는 나, 그리고 남겨진 하태웅까지.
전부 본인의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허해졌다. 더는 없을 안녕이었다.
* * *
열 받아. 진짜 열 받아.
속으로 읊조리던 제인은 샴페인을 마셨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하니 늘어나는 건 속마음뿐이었다. 이걸 도운이한테 말할 수도 없고.
치솟는 짜증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남자가 제인의 샴페인 잔에 본인의 와인 잔을 쨍, 하고 부딪쳤다.
이건 또 뭐야. 애써 태연하게 바라보니 남자는 번들거리는 웃음으로 말했다.
“같이 한잔하실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단호한 거절에도 남자는 제인의 옆으로 더욱 붙어 섰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기억을 더듬던 제인은 그제야 한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한제약 망나니 막내아들. 예전에 한번 약을 했다는 증거를 잡아 취재하려고 했을 때, 타 언론사에서 선수 쳐 기사를 빼앗긴 전적이 있다.
아마 그때 징역 몇 년은 살다 온 거로 기억하는데.
“남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남자 친구 있어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래요.”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네. 구시대적 멘트에 걸맞은 느끼한 눈빛에 제인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주변을 살짝 둘러보니 연회장 안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이쪽으로 쏠린 상태였다. 경식의 귓속말을 들은 국현도 인상을 쓰고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어떤 새끼가 감히 내 딸을. 딱 이런 표정을 짓고 다가오려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뭐지? 싶었던 의문은 곧 허리를 불쑥 감는 손으로 풀렸다.
“내 얘기 하고 있었어, 자기야?”
자기?
놀라 돌아보는 제인의 관자놀이에 도운은 입을 맞추었다. 유독 강조하고 크게 말한 탓인지 사람들은 자기? 자기? 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제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본 도운은 이내 정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버터 칠을 했나. 도운은 냉소를 머금은 미소로 말했다.
“남자 친구가 있는데 치근덕거리면 되겠습니까. 보통 애인도 아니고, 남편 될 사람이 여기 있는데.”
분명 참으려고 했다. 자신이 나설수록 난감해지는 건 제인이니까. 그런데 이 미친 새끼가 말하는 걸 들어 버렸다.
‘야, 손제인 졸라 예쁘지 않냐? 침대에서도 끝내줄 것 같은데, 오늘 내가 한번 눕혀 본다.’
나가는 제인의 뒤를 하태웅이 따라나서는 것도 거슬렸는데, 어디서 더러운 똥파리 새끼가 내 여자를 건드려.
제인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회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사고 한번 제대로 쳐 보려고 한다.
“내가 확실히 보여 줄게. 손제인이 누구 여자인지.”
남자에게 비틀린 웃음을 지은 도운은 곧장 제인의 뺨을 습관처럼 감쌌다. 사실 오늘 내내 이러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
연회장 정중앙. 샹들리에의 찬란한 조명이 쏟아지는 그 아래.
도운은 고개를 기울여 제인의 입술을 머금었다.
입술이 빨리며 숨이 뒤섞였다. 혀를 넣지 않아 도운의 입술은 더 끈적이며 움직였다.
기울어진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가고, 날렵한 두 콧대가 스치고, 몸은 더욱 밀착됐다.
“하아…….”
제인은 밭은 숨결을 흘려 보내며 도운의 팔을 콱 움켜잡았다. 입술을 물고 핥는 몽롱한 감촉이 들 때마다 제인은 구두 안에 숨겨진 발가락에 힘을 실었다.
웅성거리다 못해 떠들썩해진 사람들의 말소리, 연신 플래시를 터뜨려 대는 기사들의 셔터, 어디에선가 목덜미 잡고 계실 아빠의 언짢음.
뻥 뚫린 이 연회장에서 이런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놀랍게도 그렇다 보니 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 황홀한 입맞춤을 거부할 힘이 제인에겐 없었다.
제게 이런 취향이 있었나. 파도처럼 몰려오는 입술을 마시기 위해 턱을 더욱 치켜들 때였다.
제인의 아랫입술을 쯔읍, 소리 나도록 빨아들인 도운은 약간의 거리를 벌렸다. 서로의 열정으로 눅눅해진 입술에서는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얻어맞을 각오하고 키스한 건데.”
얼굴을 감싼 손가락이 제인의 얼굴을 고쳐 잡았다.
“안 그러네?”
내리뜬 눈동자는 짙고, 장난스러운데 눈 밑을 쓸고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다정하다. 그녀에게 항상 보여 주는 맹목적인 애욕에 제인은 피부가 간지러웠다.
“그럼 여기서 네가 난감해지잖아.”
제인은 도운에게 들릴 정도로만 속삭였다. 어차피 사람들의 말소리와 폭죽처럼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고.”
그래도 제인은 서도운을 위한, 서도운에게만 해당하는 고백을 들려주었다. 현재도, 미래에도 손제인의 남자는 서도운뿐이니까.
진심 어린 눈빛이 맞닿자 도운의 흉곽이 크게 차올랐다.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그녀는 이따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안겨 준다. 여러 감정이 섞인 목소리는 거칠었다.
“예뻐, 미치도록.”
허구한 날 약 빠는 동태 눈알 새끼한테도 예뻐 보이는데, 지극히 정상인 제 눈엔 얼마나 그 강도가 심할까.
그냥 당장 안아야겠다.
애타는 결론에 다다라서 도운은 제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도운의 발걸음은 목적지가 분명했다. 제인은 길게 연결된 손을 놓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여기서 도운을 뿌리친다면 수천 장의 사진을 찍는 기자들에게 이상한 추측만 안겨 줄 뿐이니까. 제인은 순백의 드레스를 이끌며 도운을 뒤따랐다.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녀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