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언제부터 알았어?”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제인은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가운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다리를 애무하듯 바라본 도운은 그녀의 발밑에 앉았다.
“오늘 회의할 때.”
국현이 왜 굳이 제인을 보내 놓고, 회의에 참석하라고 했는지도 알게 됐다. 꼬장꼬장한 이사진들은 여자가 사업을 이끌어 나간다는 것에 노파심을 냈다.
급기야는 호적을 논했고, 나중에는 경영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최후의 수단을 내놓았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호적 문제야 친자 검사로 증명했지만, 회사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애들 소꿉장난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열이 받았다.
누나랑 겨우 만났는데 뭘 또 헤어지게 해. 잠시 묻어 둔 감정이 생각난 도운은 의식적으로 웃었다.
그 모습이 제인은 의아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태연하네.”
자신이 아는 서도운이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됐다. 수긍하는 건가, 싶었던 제인의 생각을 도운은 고개를 저으며 일축했다.
“마음 같아서는 길길이 날뛰고 싶었지. 네 앞길 막는 이사진들 싹 다 물갈이해 버리고.”
“그런데?”
“그럼 네가 난처해질 거 아니야.”
이사진들을 떠올리며 날카로워졌던 눈매는 다시 유순하게 내려왔다. 아직 공식적으로 도운과 제인의 사이를 아는 사람은 없다.
거기서 도운이 섣불리 나서 봐야 또 서 라인, 손 라인이라며 시답지 않은 편 가르기가 시작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승계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고. 때로는 얌전히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도운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세운 무릎 위로는 제인이 도도하게 꼬아 놓은 발을 잡아 올렸다.
곧 그녀의 발등 위로 충성을 맹세하는 입맞춤이 떨어졌다. 제인은 순간 발가락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제인아, 네 선택이 내 선택이야.”
밑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도운의 눈빛은 누구보다 원색적이었지만, 진심을 담고 있었다.
“내 선택은 네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왜?”
“그야 네가 내 하늘이니까.”
때로는 그가 손제인의 지붕이 되어 줄 것이다. 허물어지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단단해지라고 하면 언제든 철갑을 두를 수 있는.
“별이 달이고, 달이 별이라고 해도 네가 하는 말이라면 나는 다 따라.”
그대로 발등부터 정강이, 허벅지까지 입술을 올린 도운은 상체를 세워 제인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 * *
파티의 날이 밝았다. 말이 파티지 결국 공식 석상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제인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의식적으로 웃었다. 이미 에덴 건설 앞에는 수많은 기자가 진을 치고 있었다.
“손제인 씨, 이번 공식 석상을 통해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자세한 말은 이따 정식으로 인사드리며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얼핏 태웅이 보인 것 같긴 했지만, 제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곧장 몸을 돌리니 가까운 곳에선 도운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도운은 오늘 쓰리 버튼 블랙 슈트를 입었다. 제인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별이 달이고, 달이 별이라고 해도 네가 하는 말이라면 나는 다 따라.’
그 밤, 도운이 한 숭고한 약속은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제인은 당연히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경영 수업을 받으러 가지 않는다면 국현의 처지가 난처해질 것이다. 훗날 도운과의 관계를 밝히는 날이 와도 서로에게 이득이 없을 것이고.
반면 가게 된다면 제인은 에덴 건설에 더 보탬이 될 수 있고, 도운을 만나지 못해 힘들지언정 나중엔 편안해질 수 있다. 너무 균형이 안 맞는 선택지가 아닌가.
그때 도운이 제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인에게 눈짓하며 그녀를 안내했다.
“가시죠.”
국현의 당부였다. 제발 공식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서로의 관계를 티 내지 말고, 그저 호의적인 관계라는 것만 보여 달라고.
“생각은 해 봤어?”
그래서인지 도운은 작게 속삭였다. 제인은 기자로서 들어왔던 연회장 안을 밟으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그럼 경건하게 들어 볼게.”
이윽고 연회장의 불이 꺼졌다. 도운이 취임사를 했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었지만, 주인공은 이제 제인이었다.
그녀는 국현을 필두로 도운과 걸음을 나란히 하며 단상 위에 올라갔다. 로비 앞에서 본 기자들보다 더 많은 기자가 그녀를 찍었다.
국현의 부드러운 안내에 따라 제인은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모두 침묵한 채 제인의 말을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손제인입니다.”
고개를 숙이자 플래시 소리가 책장을 빠르게 넘기는 것처럼 들렸다. 어차피 그들이 궁금한 것은 국현이 뿌려 놓은 경영 수업에 관련한 것일 테다.
말을 하기에 앞서 제인은 살짝 고개를 돌려 도운을 찾았다. 그는 제인의 뒤편에 서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알았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래, 당장은 힘들겠지만.
제인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기 계신 사국현 회장님의 뜻을 이어받아 해외로 경영 수업을 받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도 에덴 건설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지만,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말이다. 별빛처럼 쏟아지는 플래시를 받으며 제인은 고개를 숙였다.
어깨에 닿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 보니 국현이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잘했다.”
도운도 천천히 다가와 손뼉을 쳤다.
“잘 들었어.”
번쩍이는 카메라에 묻혀 윙크하는 도운은 참 변함없었다. 그렇게 21년간을 변함없이 그리워하고, 찾아낸 우리니까.
그깟 1년쯤이야. 단단히 마음먹은 제인은 도운 그리고 국현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 *
넌 정말 멀리 날아갔구나. 에덴의 일원으로, 서도운의 여자로.
연회장 안, 무수한 인파 사이에서 태웅은 제인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남몰래 애정을 표시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태웅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이미 에덴 호텔 밖에서 제인은 태웅을 보았다. 시선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던 태웅과 달리 그녀는 냉소적으로 그를 외면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다 이해한다. 애초에 제인의 사정과 마음을 온전히 헤아려 주지 못한 그는, 자신의 감정만 챙기기 급급했으므로.
하태웅은 이제 동료로도, 남자로도 제인의 곁에 설 명분이 없었다.
잘못된 이기심으로 모든 걸 잃은 이 여자처럼.
태웅은 곁에 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도 당신도 제인이를 만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카메라를 들고, 모자를 눌러쓴 채 태웅과 함께 건국 일보 소속 기자로 잠입한 사람.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러나 목소리는 익숙했다.
-안녕하세요, 하태웅 기자님. 저 심채연이에요. 부탁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기자 회견을 통해 모든 걸 포기하고, 종적을 감춘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인이. 제인이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어서요. 염치없는 거 알지만, 제인이 공식 석상에 저와 동행해 주실 수 있나요?
이제 와 우리가 뭘 어쩌겠어요.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건 지나친 후회와 미련 때문이었다. 태웅은 채연과 결이 다른 후회로 그녀의 감정을 백번 이해했다.
그래서 또 제인이 싫어하는 짓을 해 버리고 말았다. 인턴 기자의 현장 체험이라며 그녀를 위장 잠입시켜 데리고 와 버렸다. 명함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태웅의 신분은 확실하니까.
근 몇 달 사이 수척해진 채연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제인을 고즈넉하게 응시했다.
“……그러게요.”
수긍하는 음성엔 수분기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딱 한 번만 네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다신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낮이면 떠오르는 미안함과 밤이 되면 짙어지는 죄책감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이 또한 나의 이기적인 마음일 수 있겠지. 역사처럼 쓰여 지워지지 않는 잘못을 잊고자 하는.
그래서 제인아. 나는 아직도 너한테 너무나 미안해.
미안해, 제인아. 정말 미안해.
할 수 없는 말임을 알아 그 감정이 전해진 걸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제인이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란 채연은 얼른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곁에 선 태웅마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가 채연은 홀로 실소를 뱉었다.
도둑처럼 몰래 들어와 도둑 꼴을 하고 있다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손제인에게 도둑이나 다름없었다.
* * *
제인은 인파 속에서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표정 관리를 했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 언제 어디서 사진이 찍힐지 몰랐다.
그 부담스러운 이목 사이에서도 유독 피부를 콕콕 찌르는 거슬림이 있다 싶었는데. 하아. 제인은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아까 호텔 로비에서 태웅을 본 건 착각이 아니었다. 하기야, 수많은 언론사 중 건국 일보만 배척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건국 일보는 제인이 몸을 담고 있던 곳이니 그쪽에서는 특종에 또 특종인 셈이라 더더욱 그녀와 친했던 태웅을 보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전부 예상했던 일인데…….
쟤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를 온 거지.
생각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건 답 없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무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