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진짜 장난 없네.
액정을 내려다보던 도운은 말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눈을 다시 떠도 사진 속 제인은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신이었다. 아니, 마녀인가? 날 이렇게까지 홀렸으니까.
지루한 회의는 벌써 세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분기별 매출 이익과 하반기 에덴 건설과 에덴 호텔의 영업적 공략 등, 별 쓸데없는 것들로 말이다.
안 그래도 한계가 왔는데, 이 사진을 보니 더 이상 평온을 유지할 수 없다. 도운은 보고서를 펜으로 쿡쿡쿡 찌르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곧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상으로 회의는 여기까지,”
국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운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교진이 그의 뒤를 황급히 쫓아왔다.
“왜 그래, 또.”
“제인이한테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뭐? 전무님. 아니, 잠시만요, 전무님!”
삑. 차 문을 연 도운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교진이 다급하게 창문을 두드렸지만, 이후에 업무가 없는 걸 다 안다. 허튼짓 못 하게 잘 감시하라는 회장님의 말 때문에 저러겠지.
짙게 선팅돼 보이지 않겠지만, 도운은 교진에게 손까지 흔들어 줬다.
나도 자중하라길래 억지로 참고 있었다고.
“근데 오라잖아, 내 주인이.”
씩 웃은 도운은 쭉 후진한 뒤 핸들을 돌렸다. 바닥에 마찰되는 타이어 소리가 그의 다급함을 고스란히 들려줬다.
* * *
벌써 네 벌의 드레스를 입어 본 제인은 진이 빠져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많이 힘드시죠?”
실장은 지칠 대로 지친 제인에게 따뜻한 유자차를 주었다. 제인은 소서 밑을 잡으며 달콤한 유자 향을 맡았다.
“저는 그냥 옷만 갈아입고 벗는 줄 알았어요.”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드레스에 맞는 액세서리도 같이 피팅하거든요. 또 드레스마다 입고, 다루는 법도 다 달라 시간이 그만큼 소요되기도 해요.”
사람 한 명 옷 입히는 데 왜 세 명이나 붙나 했더니. 실장의 어깨 너머엔 아직 입어 보지 못한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눈앞이 아득해진다는 게 이런 걸까.
“죄송하지만, 30분만 쉴게요.”
“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편하실 때 불러 주세요.”
실장은 끝까지 친절함을 잃지 않은 채 피팅 룸 여닫이문을 밀며 나갔다. 탁. 조용히 문이 닫히자 제인은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린 것 같다.
잠시 후, 눈을 번쩍 뜬 제인은 두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정신 차려야지. 그녀는 일어나 행어에 걸린 드레스 하나를 들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옷 정도는 미리 벗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커튼을 치고 얇은 슬립만 입었다.
“실장님, 밖에 계세요?”
몇 초 정도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묵직한 발소리가 났다. 당연히 실장이라고 생각한 제인은 말했다.
“제가 아무 드레스나 우선 가지고…….”
왔는데.
촤악. 커튼을 젖힌 사람을 본 제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네가 여길 왜 와? 하고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었다. 성큼 다가온 도운이 곧장 제인의 두 뺨을 감싸 입술을 포갰기 때문이다.
빠져나오려고 바르작거릴수록 도운은 더 깊이 입술을 빨아들였다. 겨우 벗어난 제인은 도운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밖에 사람들 있어. 뭐 하는 거야.”
“없어.”
뜨거운 숨결이 손바닥에 스쳤다.
“내가 다 물렸거든.”
도운은 제인의 손바닥을 혀로 핥아 올렸다. 흣. 간지러운 느낌에 제인이 어깨를 떨자 도운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끝내주게 예쁘네.”
슬립만 입은 제인을 그는 짙은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곧 손을 뻗어 제인이 가져온 드레스마저 가져갔다.
“그런데 이런 거 입을 필요 있어? 어차피 벗을 건데.”
“아, 진짜.”
다른 건 다 익숙해져도 저런 말을 하는 서도운은 여전히 몸을 배배 꼬이게 한다. 도운은 웃으며 제인에게 밀려들었다.
장소가 어디건 도운의 키스는 늘 삼킬 듯이 퍼부어졌다. 자연적으로 도운의 목에 팔을 건 제인은 살포시 눈을 떴다.
도운의 어깨 너머는 사방이 거울이었다. 그녀를 구석으로 몰며 입을 맞추는 도운도, 슬립 안으로 파고드는 손도 전부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게 은근한 충동을 불러일으킨 탓일까. 제인은 치아를 세워 도운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슬립 안으로 파고든 손이 제인의 가슴을 강하게 쥐었다.
그 신호를 받은 제인은 생각했다. 30분만 쉬는 건 역시 무리였다고.
조금 더 쉬자고 생각하며 제인은 밀려오는 도운의 몸을 받아들였다.
도운에게서 벗어난 건 그로부터 만족스러운 한 번이 끝났을 때였다. 장소 불문하고 다시 몸을 들이미는 도운이 보이길래 제인은 구두를 신은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밟아 버린다.’
어디를 밟는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오라를 풍겨 대는 제인은 틀림없이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도운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자마자 국현에게 전화가 왔다.
* * *
“부르셨어요?”
당장에라도 가서 쉬고 싶은데.
제인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도착한 곳은 ‘꿈으로 보육원’이었다. 은선은 제인과 도운을 따스하게 맞아 주었다.
“왔니? 오늘 드레스 맞췄다고 들었어.”
“안 그래도 사진 찍었어요. 보세요.”
살갑게 이야기한 제인은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은선에게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드레스는 결국 처음 입어 본 새하얀 드레스로 결정했다.
은선도 마음에 드는지 처음 보는 제인의 모습에 예쁘다고 연신 감탄했다. 은선과 나란히 앉은 국현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웃다가도 서도운 저 자식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회의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가서 설마 했더니만.”
“원래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죠.”
도운은 유쾌하게 웃었다. 사람이 저리 뻔뻔하기도 쉽지 않은데. 한 마디도 안 지는 성격은 예전에야 사업을 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 이제는 아니다.
자신이 교육을 잘못했나, 하고 생각한 국현은 날카롭게 물었다.
“숍에서 또 이상한 짓 한 건 아니겠지.”
그 말에 흠칫 놀란 건 제인이었다.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가 물으니 정곡을 찔리는 기분이 컸다.
잠깐의 침묵을 채운 건 은선이었다.
“애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요.”
여기 애가 있긴 어디 있어. 웬 늑대 한 마리가 있는데. 반박하고 싶었지만, 은선이 하는 말이라 국현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단번에 국현을 제지한 은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인을 보았다.
“제인아, 그런데 어디 안 좋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드레스 입어 보는 것도 일이더라구요.”
이번엔 거짓말을 해야 해서 찔린달까. 최대한 태연하게 둘러대는데 옆에 앉은 서도운은 그녀의 손등을 몰래 만지고 있었다. 그거 맞아? 하는 얄미운 표정으로.
제인은 간지럽게 돌아다니는 검지를 콱 잡았다. 소리 없이 웃은 도운은 상체를 세웠다.
“그래서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못마땅해 보이던 국현의 표정은 금방 근엄해졌다.
“다름이 아니라, 제인이 널 이젠 내 호적에 올리려고 하는데.”
“……네?”
뜻밖의 소식에 제인은 허리를 세웠다. 국현은 제인과 지그시 시선을 마주했다.
“놀랄 것도 없이 당연한 거다. 넌 내 딸이야. 상무 자리에 오르려면 나와 같은 성을 쓰는 게 맞고, 네 이름도 되찾아야지.”
“오늘 회의에서 이사진들이 또 한바탕 난리를 쳤어. 이것도 의견이 분분해. 친자 검사를 통해 이미 핏줄임을 밝혔는데 뭐가 문제냐는 이사진과 호적에 올라야 한다는 이사진. 선택은 네 몫이야.”
도운은 진중하게 말했다. 전자라면 있는 그대로를 믿는 사람들일 테고, 후자라면 그야말로 혈통을 중시하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이라고 꼬투리를 안 잡을까? 잠시 고민한 제인은 결단을 내렸다.
“전 그냥 손제인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제인아.”
국현이 무어라 더 말할 새도 없이 제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이름이요. 저는 진짜 싫었어요. 이런 저를 붙잡아 준 건 원장님이 성을 주고, 저를 키워 주신 덕분이에요.”
“제인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자신을 매몰차게 버린 친모는 여전히 사랑에 허덕이고 있는데. 은선은 마음으로 낳은 제인을 늘 걱정하고, 사랑하고, 애달파하며 엄마를 자처했다.
“게다가 도운이가 제인이로 살 수 있게끔 이 이름에 영혼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제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좋았던 날. 이 이름으로 살아도 되겠다고 마음먹은 날. 그날부터 제인은 제인이 된 자신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모든 배경을 둘러보았다. 피를 나누고, 마음으로 평생 자신을 그리워한 아빠. 모든 아이의 부모이자 제인에게 유일했던 엄마. 그녀의 연인인 도운까지.
모든 게 완벽한데, 이름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나.
“사제인은 너무 순결해 보이잖아요.”
제인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 덕일까. 국현과 은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껏 분위기를 잡아 놓고 하는 말이 저런 거라니.
하긴.
“맞아. 그 순결 내가 다 갈취했는데.”
도운은 귓속말로 속삭였다. 웃음기가 완연한 것이 본인이 제인의 첫 남자라는 것에 심히 만족한 눈치였다.
은선은 포개어 잡은 국현의 손에 힘을 주었다.
“전 제인이 뜻대로 해 줬으면 좋겠어요.”
온화한 온기는 국현을 약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평생 이 두 여자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그래. 성은 그렇다 치지만, 이건 번복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뭐를 말씀이세요?”
제인의 물음에 국현은 도운을 바라보았다. 도운은 웃고는 있지만, 눈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다 저들을 위해서 하는 말인 것을.
“짧고 굵게 1년만 해외 다녀와라. 경영 수업 받으러.”
단호한 한마디에 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