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연정은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를 들며 국현을 올려다보았다. 국현은 그 눈물에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날 속인 건, 그래. 지난 내 감정에만 치우쳐 내 딸의 존재 여부도 몰랐던 나한테도 잘못이 있어. 그래서 그건 내가 제인이한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혹은 죽어서라도 용서를 빌 건데.”
국현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연정의 시선도 천천히 따라 내려왔다. 얼굴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 더러운 악어의 눈물.
살의가 치솟은 국현은 연정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감히 내 딸을 버려?”
훤히 드러난 연정의 목에는 역시. 목을 매단 사람치고는 작은 흉터 하나 없었다.
아아,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국현이 피식 웃었다. 싸늘한 숨소리가 목덜미에 닿자 연정은 화들짝 놀라며 목을 손으로 감추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내 말 좀 들어 줘!”
연정은 제 목을 두 손으로 그러쥐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국현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연극은 끝났어.”
“아, 안 돼…….”
“혼자 남은 무대에서 어디 한번 마음껏 놀아 봐.”
“안 된다고!”
“나도, 심창진도. 더는 네 개새끼가 아니니까.”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연정의 정신이 붕괴했다.
“아아아악!”
연정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사랑이 이렇게 쉽게 변하는 건가? 사랑이 어떻게 이래? 급격히 가난해진 마음은 한 방울의 물을 찾기 위해 마구 비명을 질렀다.
“놔! 이거 놔!”
시야가 드문드문 밝아지는 동안 연정은 자신의 손과 발이 묶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척에서 김정배가 혀를 차며 욕하는 게 들린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더니.”
제대로 미친 년.
“병동 옮겨!”
정배의 일갈로 누워 있는 침대가 움직였다. 천장에 붙은 조명 여러 개가 뿌연 시야에 스쳐 지나갔다. 연정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알고 있지만 무력해진 몸엔 힘이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최연정의 난동과 정신 병원 입원, 서울 병원 이사장 김정배의 입장 발표까지. 밀물처럼 터지던 최연정의 기사는 빠른 만큼 신속하게 묻혔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국현의 마무리 때문이었다. 그날 병원에서 돌아온 국현은 세상이 또 한 번 떠들썩해질 것을 대비해 도리어 에덴 더 헤븐의 보도 자료를 내면서 그 인테리어를 제인이 만들어 냈다는 언론 플레이를 시작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이목이 제인의 미래로 쏠렸다. 심창진은 여전히 여러 조사와 재판을 받고 있으며 최연정과 자신이 저지른 짓을 인정했다.
심창진 라인은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니 아마 징역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얼마나 열악한 끝인가.
“한동안은 계속 시끄러울 거다.”
국현은 보고 있던 태블릿을 제인에게 건네주었다. 제인은 시선을 내려 정리된 기사를 읽어 보았다.
<사라진 금도 그룹 장녀, 심채연. 자숙일까 도주일까?>
<에덴 건설 사국현 회장, 친딸은 전 건국 일보 기자 손제인>
<금도 그룹을 흡수한 에덴 건설, 주가 대폭 상승>
“그래도 네가 다치는 일은 없어. 이 아빠가, 꼭 지켜 주마.”
최연정에 대한 마음이 종말을 맞이했고, 심창진과의 지독한 악연도 끝이 났다. 그런데도 국현에게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감정이 있다.
제인이 아빠라는 호칭을 입에 담을 때마다 아직도 울컥울컥한다는 것. 제인이 지금처럼 차분히 웃으며 시선을 맞춰 줄 때면 더더욱 그랬다.
“저도 더 열심히 할게요. 금도 쪽은 이제 전혀 신경 안 쓰니까 저보다 아빠 건강에 더 신경 쓰시구요.”
“그래.”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아야죠.”
평생을 함께하는 가족이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두 사람에게는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예쁘게도 말하는 딸을 보니 뭉근한 감동이 몰려온다.
이래서 다들 딸이 최고라고 하는 건가.
“그럼 나는?”
그 틈새를 도운이 비집고 들어와 물었다.
“누나, 나는.”
“너는!”
대답한 건 제인이 아니라 국현이었다. 정확히는 짜증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사내놈 키워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특히나 제 딸 제인의 곁에 있는 서도운이라면 더더욱.
국현은 제인의 앞이라 꾹 참아 내며 한 마디씩 천천히 내뱉었다.
“너는 왜 일도 안 하고 여기까지 와서 방해야.”
“부부는 하나죠. 손제인이 가는 곳에 제가 있어야지, 회장님도 참.”
아시면서 왜 물어? 그렇게 말하는 듯한 뻔뻔한 표정에 국현은 복장이 터졌다.
“제인이뿐만 아니라 너도 처신 관리 잘해야 한다. 기사에 뜨진 않았지만, 그날 에덴 에리스에서 뭔 짓을 한 거야?”
“뭔 짓이라뇨. 그냥 연인들이 하는 평범한, 아.”
이러다 술술 다 말하겠네. 제인은 도운의 발을 꾹 밟았다.
“도운이가 오늘따라 농담이 심하네요.”
덧붙인 제인의 변명에 국현은 한숨을 쉬었다. 겨우 찾은 제 딸인데, 딸의 연애사로 이렇게 골치가 아파야 한다니. 그날 뭘 했는지는 안 봐도 훤하다.
두 사람이 하도 나오지 않아 다시 찾아간 관계자는, 그날 뜨겁게 입을 맞추고 있는 두 사람을 봤다고 했다. 입이 어찌나 싼지 말은 지라시처럼 퍼졌고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국현은 또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아직 공식 석상에 제인이를 내보이기 전이야. 행동 유의해.”
“어차피 금도 흡수로 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그때 제인이를 정식으로 소개하는 건 어떨까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제인아.”
“네, 아빠.”
“청담동 모이룸 가서 드레스 좀 보고 와라. 내 딸로서, 임시 상무로서, 널 보일 차례가 온 것 같다.”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은 하루가 다르게 많아졌다. 그녀는 여전히 일을 배우고 있었고, 회사는 금도를 흡수한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뒤따라오는 기업을 대접하며 에덴 건설의 위엄을 내보여야 했다.
“그럼 저도 따라…….”
“아니, 서도운 너는 오늘 회의에 참석해.”
“아, 우리 회장님 또 질투하시네.”
그중에서도, 이 두 사람.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강한데도 늘 티격태격하는데, 볼 때마다 어찌할 줄을 몰라 제인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졸지에 휴식을 얻게 된 제인은 오후에 곧장 숍으로 향했다. 경식이나 교진이 대동한다고 했지만, 아직은 혼자가 편한 제인은 홀로 움직였다.
도운은 그새를 못 참고 제인에게 문자를 했다.
[짜증 난다. 회사 확 때려치울까?]
[조금만 참으세요, 서 전무님.]
제인은 전송 버튼을 꾹 눌렀다. 인상을 퍽퍽 써 대며 회의에 참석할 도운을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어쩌겠어. 집과 회사는 엄연히 다르고, 퇴근하면 종일 붙어 있는데.
제인은 조수석에 둔 핸드백 안에 핸드폰을 넣었다. 그 뒤에 국현이 마련해 준 세단 시동을 끄고, 안전 벨트를 풀었다.
높고 위태롭기만 했던 힐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녀는 또각또각, 하는 구두 소리를 내며 숍 문을 열었다. 미리 대기해 있던 실장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손제인 상무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가워요.”
제인은 상냥한 웃음으로 제 직위를 보존했다. 임시지만, 이미 언론에서 예측한 것처럼 국현은 그녀를 상무로 어떻게든 올리려고 한다.
여기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여 주면 국현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되 제인은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았다.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시는지 몰라 저희 숍에서 제일 잘나가는 드레스 몇 벌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차례대로 입어 보도록 할게요.”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설원처럼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걷자 드넓은 피팅 룸이 보였다. 소파에 앉자 차례대로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드레스가 걸린 행거가 제인의 앞에 선을 보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제인은 새하얀 드레스를 먼저 입어 보겠다고 했다. 피팅 룸 안으로 들어가자 세 명이나 되는 인원이 그녀에게 붙어 드레스 입기를 도왔다.
제인은 낯설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완성되어 가는 자신을 거울로 보았다. 새하얀 드레스는 몸매를 전체적으로 드러내면서 팔 전체를 감싼 오프 숄더 형식이라 우아하면서도 청순한 분위기를 보여 주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실크 소재 위에 메시 소재를 더해 하늘하늘한 느낌까지 물씬 풍겼다. 시착을 끝낸 세 명의 직원은 쪼르르 서 손뼉을 쳤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우세요.”
“감사합니다.”
제인은 멋쩍게 웃었다. 정말 옷이 날개라더니. 살면서 이런 옷을 입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다. 이 모습을 도운이가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제인은 올려 둔 핸드폰을 직원에게 건넸다.
“죄송한데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반색한 직원은 제인의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두 손을 모아 어색하게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은 제인은 이내 도운에게 그 사진을 전송했다.
심술 나는 마음, 이 사진으로 조금 가라앉히라고. 서도운의 반응이 어쩐지 기대되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