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에덴 팰리스, 에덴 에리스, 에덴 빌리지. 그리고 새로 생길 에덴 더 헤븐까지.
에덴 건설에서 태어나는 최고급 아파트와 빌라는 전부 에덴 건설이 관리하지만, 다른 건설사의 협업도 필요하다.
건물 하나를 지으려면 무수히 많은 부자재가 필요한데, 그걸 한 회사가 홀로 감당하기엔 금액이 막대해서 서로서로 도우며 금액을 분배하고, 동맹이 되어 주는 것이다.
오늘 제인이 참석하는 미팅은 그런 건설사들을 설득하는 자리였다. 임시 상무로서, 그녀의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펼쳐 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그녀의 첫 번째 임무였다.
다행히 제인은 각 건설사 대표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었다.
제인은 에덴 더 헤븐과 최대한 비슷한 에덴 에리스로 향했다. 그리고 둘의 인테리어를 비교 대조하며 보고서를 펼쳤다.
“거실은 베란다를 튼 상태로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신에 테라스를 기본으로 마련하는 거예요. 그럼 에덴의 집값은 유지하되 조금 더 품격 있는 인테리어가 될 것 같고, 방 구조는 제가 말한 대로 하면 아늑한 집이 될 것 같네요.”
“상무님 말씀대로 알아 두겠습니다. 평당 가격과 전세 매입가는 더 구체적인 조감도가 나온 후 공사가 진행되면서 조율이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상무라는 호칭이 어색했지만, 제인은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관계자가 나간 뒤에 제인은 도운을 돌아보았다.
“잘하는데, 손 상무님?”
도운은 그저 웃고 있었다. 다이닝 룸 식탁에 기댄 채 제인의 활약을 유유자적하게 감상하며. 제인의 업무 일지를 적던 교진도 손뼉을 쳤다.
“맞아요. 너무 잘하셨어요. 건설사들 입맛 맞추기 힘든데 그것까지 바로 뚝딱.”
“아니에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교진이 엄지를 추켜세워 줘도 제인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교진은 도운을 슬쩍 바라보았다.
어떡해? 딱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교진은 팔꿈치로 도운의 옆구리를 쿡쿡 쳤다. 우선 가. 도운이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에 교진은 눈치껏 자리에서 빠져 주었다. 제인은 그제야 도운에게 다가왔다.
“도운아.”
“응?”
도운은 자연스럽게 제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팔 사이에 쏙 들어와 그를 올려다보는 제인의 눈이 하루가 다르게 사랑스러웠다.
“너 진짜 대단하다. 이 힘들고 어려운 걸 어떻게 해냈어?”
그리고 이렇게. 전무님이라는 호칭을 고수했던 제인이 어느샌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래서 손제인이 내 누나라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할 때. 철옹성 같은 손제인이 오직 나한테만 무너지고 약한 소리를 하는 지금이, 도운이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아등바등하는 거지.”
“아등바등…….”
참 적합한 단어라 제인은 그 말을 따라 하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 제인의 하루가 정말 그랬다. 경영의 ‘경’ 자도 모르니 뭐라도 아등바등 하려는 반면, 도운은 그런 제인의 옆을 든든히 받쳤다.
그녀의 의견이 묻히지 않게, 제인이 난감해할 상황엔 민첩하게 끼어들며 비서와도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그랬기에 오늘 건설사 미팅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제인은 도운의 입술이 갑자기 다가오자 눈을 살짝 감았다. 이마에 내려앉는 입술의 온도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래도 너는 아등바등하지 마. 전에도 말했잖아. 힘들고 하기 싫으면 그냥 하지 말라고.”
“말이 쉽지.”
제인은 자신의 등장으로 도운이 처한 상황을 안다. 이미 회사 내에서는 제인과 도운을 주축으로 지지자들이 나뉘었다. 도운에게 힘을 실어 주는 사람들은, 당연히 도운의 사업 방식과 그가 쌓아 온 커리어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그와 달리 제인의 지지자들은 그저 그녀가 국현의 친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줄을 잘 속셈이었다.
그게 바로 제인이 꿋꿋하게 일하는 이유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이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친딸이 아니라, 국현에게 도움이 되는 딸이 되고 싶었다. 하물며 먼 훗날, 도운과 미래를 꿈꾸게 된다면. 그때 이 말 저 말 나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다.
“누나 너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됐어. 하기 싫으면 그냥 하지 말고, 재미있으면 하고. 누가 건드리면 똑같이 물어. 애처럼 굴어도 되니까.”
그런 널, 내가 사랑하니까.
그런 널, 내가 책임질 거니까.
말하지 않아도 도운의 감정이 느껴진다. 어렸을 땐 그녀가 누나였는데. 몸도 커진 서도운은 마음도 커졌나 보다.
제인은 두 팔을 도운의 목에 걸었다. 하도 부둥부둥해 주니 정말 아이처럼 되묻고 싶다.
“근데 해야 할 이유가 있으면?”
도운은 제인이 그저 딸로서의 의무이기 때문에 이 일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 이 일을 맡아 하는지는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으니까.
“더 잘하게끔 만들어 줘야지. 잘 봐.”
도운은 뜬금없이 인테리어 구조가 그려진 보고서를 펼쳤다. 방 안의 또 다른 방. 도운은 그곳을 검지로 짚었다.
“여기에 예전의 내 집무실처럼 방 하나를 더 만든다고 했지?”
“응.”
“난 이걸 보고 내 미래를 꿈꿨어.”
“어떻게?”
제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언변이 뛰어난 도운이니 근사한 이유를 갖다 붙이며 제인의 사기를 북돋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여긴 우리 아이의 방이 될 거야.”
정말 예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라, 제인은 멍해졌다.
“손제인의 꿈처럼 아늑한 가족을 생각했단 말이야.”
도운은 제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니까 네 집의 첫 세입자는 나야. 절대 방 빼란 소리 하지 마.”
평생 눌러 살 거니까. 언행일치처럼 도운이 제인의 입술을 포개어 눌렀다. 입술을 몇 번 간지럽게 머금던 도운은 두툼한 혀를 미끄러뜨리며 침투했다.
다행이었다. 뭉근한 감동에 이렇다 할 할 말이 없었는데. 제인은 도운의 팔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핥아 올리고, 간지럽게 빨아들이는 혀의 감촉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녀에게 집은 품이었는데. 그 안온한 품을 도운에게서 느낀다고.
“이게 틈만 나면 청혼이네.”
“틈만 나면 같이 살고 싶은 걸 어떡해.”
살짝 입술을 떼고 말한 제인은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 * *
창진은 제가 알던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걸, 당신이 어떻게…….”
단 세 마디로 창진은 자신이 그동안 연정에게 속았다는 걸, 또한 그녀가 사정없이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는 친자 검사지의 결과에 나온 것처럼 채연이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하…….”
전혀 웃지 못하는 창진의 입에선 한탄스러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최연정을 소유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목줄이 잡힌 건 창진 자신이었다.
그리고 딸…….
제 딸 채연이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두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다.
진실을 인정하자 곧 새까만 분노가 타올랐다. 창진은 두 눈을 가린 손을 내리고 소리쳤다.
“말을 했어야지. 채연이가 내 딸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당신을 위해서 말하지 않은 거야! 당신은 채연이가 사국현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들을 생각도 안 했잖아!”
“그러니까 더 말을 했어야지! 말을 했더라면 내가, 내가…….”
채연이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거야.
언제부터였나. 시기를 생각해 보니 채연이 태어난 건 최연정이 떠난 후였다.
그럼 정황상, 그를 떠났을 때 임신을 했다는 건데. 창진이 연정을 다시 찾았을 때도 그녀는 창진이 채연을 사국현의 아이로 보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 딸을 내가, 내 손으로 버렸잖아!”
새빨개진 눈에는 피눈물 같은 것이 흘렀다. 이마와 목에 핏줄이 불거진 채 창진은 울분을 토해 냈다. 문득 제가 당신의 딸이라고 외치는 채연이 떠올랐다.
그런 아이를, 아빠라는 새끼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또 한 번 외면했다.
서도운의 말대로 정말 자신은 무엇을 가지고 있었을까. 모든 걸 다 가졌어도, 모든 걸 다 잃고 난 지금도, 창진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이 번진 눈동자는 공허했다.
“넌 날 곁에 있는 것도 지키지 못하는 병신으로 만들었어.”
“아니야!”
“아니? 최연정, 네가 날 버린 거야. 네가 직접, 그 알량한 이기심으로 나와 채연이를 버린 거야.”
참담한 결과를 마주한 뒤 깨달은 진실은 잔혹했다. 이제야 인정한다.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는 건 없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주인 지키는 개새끼처럼 사국현만 보면 물어뜯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 다 네가 의도했다는 것도 모르고.”
창진은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것이 연정의 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손에 있는 친자 검사지를 사정없이 구겼다.
이처럼 채연과 창진의 관계는 복구될 수 없었다.
진실의 송곳이 가슴을 후벼 팠다. 당장이라도 피를 질질 흘리며 쓰러져도 될 것 같은데. 이럴 땐 꼭 걸음이 굳건해진다.
“……심창진.”
그리고 언제 왔는지 문을 열고 들어온 사국현이 보였다. 신발을 질질 끌며 나아간 창진은 국현을 스치며 이야기했다.
“미안하다…….”
텅 빈 사과가 병실을 휘감았다. 창진은 그대로 국현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감정을 삼킨 국현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국현 씨. 국현 씨!”
눈물만 줄줄 흘리던 연정은 곧바로 구겨져 있던 친자 검사지를 패대기쳤다. 그녀에게는 국현이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린 채, 그녀는 국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를 껴안았다.
“당신은 날 안 떠날 거지? 응? 날 사랑하잖아!”
눈물을 흘린 채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흉측하다. 국현은 불순물을 치워 내듯 다리를 힘 있게 뒤로 뺐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앞으로 철퍼덕 넘어진 연정은 두 손으로 병원 바닥을 짚었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