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창진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정배를 돌아보았다.
“그걸 나한테 알려 주는 이유가 뭐야.”
“대단히 미친 년 좀 내 병원에서 끌어내려고.”
다른 이유가 있을까. 말이 친구지, 어차피 다 져 가는 심창진을 안아 줄 생각은 정배에게도 없었다.
“지금 병원에 기자들 와서 난리다. 사국현은 이미 최연정한테 손 뗐으니까 이거나 보고 정신 차려라, 창진아.”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자식. 저를 쥐어 팬 게 괘씸해서라도 찢어발길까 싶었지만, 정배는 사람이길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현관문 앞에서 주워 온 서류 봉투를 창진에게 던졌다.
국립 연구소 유전자 검사.
반듯한 글씨를 읽어 본 창진의 눈동자가 삭막해졌다.
“궁금해서 미리 뜯어 봤다. 채연이가 너랑 친자 검사했던데.”
“어차피 내 딸 아니야.”
얼씨구.
“정신 차려라. 최연정 장단에 놀아나지 말라고. 간다.”
여기 있다간 자신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쾅. 문이 닫히자 창진은 서류 봉투에서 시선을 떼고 술병을 손에 쥐었다. 아직 남아 있던 쓰디쓴 알코올이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잠깐만.
알코올로 속이 뜨끈해짐과 동시에 창진의 가슴도 뜨끔해졌다. 심채연이 사국현이 아닌 저와 유전자 검사를 했다고?
정배의 성격상, 심채연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었다면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을 터. 술병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은 창진은 황급히 봉투를 찢어 보았다.
여러 갈래로 흔들리는 눈동자는 천천히 글자를 되짚었다.
<의뢰인 심채연과 의뢰인 심창진의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다음 순간, 종이를 쥔 창진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99.9999% 일치하므로 생물학적인 관계가 맞습니다.>
* * *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며칠이 지났다. 중요한 지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제인의 발표에 이사진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를 떴었다.
반대하자니 발표는 흠잡을 곳이 없었고, 찬성하자니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제인은 일에 더욱 몰두했다.
아직 정식으로 상무 자리를 받은 게 아니니 에덴 건설의 전반적인 업무를 살펴보며 배워 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해 본 적 없는 일이라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그럴수록 제인은 일에 더 매달리면서 노력했다. 이미 자신의 등장으로 에덴의 주가는 격변했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지지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니까.
한 번도 들지 않은 뻐근한 고개 위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노크 없이 들어올 사람은 딱 한 명뿐이라 제인은 구태여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얼굴이 딱 봐도 골났네.”
“아무래도 난 사업 체질은 아닌가 봐.”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도운은 늘 불쑥 찾아와 함께 서류를 보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다 가기도 하고, 그러다 인내심이 동 나면 물고 빨며 놔주질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제인의 앓는 목소리 위로 국현의 음성도 얹혔다.
“어리광도 부릴 줄 아는구나.”
“아빠. 아니, 회장님.”
번뜩 고개를 들어 올린 제인은 황급히 호칭을 정정했다. 국현은 책상 앞으로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셋이 있는데 회장님은 무슨. 아빠라고 해. 남은 평생 동안 귀에 피 나도록 듣고 싶은 말이니까.”
“그럼 장인어른은요?”
“넌 조용히 해.”
국현은 빈틈을 절묘하게 파고드는 도운을 어이없다는 듯 응시하고는 다시 제인에게 시선을 맞췄다.
“일이 고될 거야. 망망대해를 걷는 것처럼 답이 없기도 할 거고.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있으니까.”
제인도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감사해요. 우선 오늘은 건설사들 만나는 미팅부터 잘해야 할 것 같아요.”
“몇 시지?”
“오후 3시요. 같이…….”
가실 거냐는 말은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 때문에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요즘 제인의 핸드폰은 폭주했다. 개인 번호는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인터뷰 요청이라며 기자들의 전화가 계속해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정에 뜬 은선의 이름에 제인은 기꺼이 전화를 받았다.
“네, 원장님.”
그 호칭에 국현의 허리가 빳빳해졌다.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도운과 제인은 살짝 눈을 마주쳤다.
-제인아, 잘 지내고 있니?
은선의 온후한 음성엔 온통 걱정뿐이었다. 제인은 도운을 보며 살포시 눈썹을 찌푸렸다.
나 정말 못된 애 같아.
“죄송해요. 제가 요즘 너무 바빠서 연락을 못 드렸어요.”
-알아. 회사로 들어갔다며? 진심으로 축하해, 제인아.
미안해하는 제인에게 도운은 또 찡긋 윙크했다. 은선을 대신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제인이 회사에 들어온 뒤로, 제인과의 사이를 티 낼 수 없는 도운은 이렇게 윙크로 제인에게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곤 했다.
“원장님,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늘 따뜻했던 은선의 목소리가 묘하게 처져 있다. 설마, 아빠 때문인가?
긴장한 것 같은 국현을 응시하며 제인은 은선에게 물었다.
-일이라고 하기엔 뭐한데…….
망설이던 은선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해. 보육원으로 계속 기자들이 찾아오고 있어.
“보육원에 기자가요?”
상황 파악이 된 국현은 그대로 손을 뻗어 제인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어진 국현의 행동을 모르고 있는 은선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응. 사실 기자가 찾아오는 건 둘러대면 되는 건데, 자꾸 너에 관해 물어봐서 모른다고 잡아떼고는 있어. 혹시 너한테도 피해가 갈까 봐.
“그걸 왜 참고 있습니까.”
침착하게 듣던 국현은 그녀의 말이 끝나고서야 입을 열었다. 수화기 너머는 순간 고요해졌다.
은선의 목소리를 듣자 국현은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지금 제가 가겠습니다.”
그럼 별수 있나. 가 봐야지.
전화를 끊은 국현은 제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미안하지만, 오늘 미팅에는 함께 참석 못 할 것 같구나.”
“제가 따라갈 테니 데이트 잘하고 오세요.”
급하긴 한 모양인지, 국현은 도운이 약을 올리는데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제인은 닫힌 집무실 문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운은 그녀의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나 아무래도 장모님까지 생길 것 같아.”
마주한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제인도 딱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 * *
“돌아가 주세요.”
“손제인 씨에 대해 한 말씀만 해 주시죠, 그럼!”
곧 국현 씨가 온다고 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은선은 막무가내인 기자들의 발언에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싶을 때였다.
“기자가 언제부터 거래를 논하는 직업이었습니까.”
“사국현 회장님!”
은선은 자신의 앞을 막아 주는 국현의 향기에 숨이 막혔다. 은선을 보호하듯 그녀에게 든든한 등을 보인 채 국현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저에게 물어보십시오. 왜 애꿎은 사람을 괴롭힙니까. 보육원 아이들의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두 분은 무슨 관계이시죠?”
기자는 참, 눈치도 빠르고 태세 전환도 빠르다. 한숨을 쉰 국현은 은선의 손을 잡았다. 어, 하며 앞으로 나온 은선은 국현을 돌아보았다. 그는 은선을 잠시 바라보고는 카메라를 똑똑히 응시했다.
“제 딸을 훌륭하게 키워 준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건 두 분이 연애하신다는 건가요? 최연정 씨를 두고?”
소중한 사람. 그 수식어에 설렌 것도 잠시,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최연정의 이름에 은선은 발끈했다.
“왜 자꾸 국현 씨 이름 끝에, 우리 제인이 이름 끝에, 최연정과 심창진의 이름이 붙는지 모르겠네요. 이쪽은 엄연한 피해자입니다. 가해자를 거론해 피해자를 난감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한참을 말하다가,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은선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내가 지금, 뭐라고…….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국현은 경식에게 기자들을 정리하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은선의 손을 잡은 채 원장실로 향했다.
계속 소란스러운 현장에 있어서 그런지, 둘만 있는 이 공간은 아주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한 시간도 잠깐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미안해요.”
국현과 은선의 말이 겹쳤다. 국현은 당황한 은선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은선 씨 사과에는 제가 공감 못 할 것 같으니 제 얘기만 들어 주세요. 전 은선 씨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고도 말을 못 한 건 다 제인이를 지켜 내려고 그런 거니까.”
“국현 씨…….”
“그러니까 앞으로 은선 씨는 제가 지킵니다.”
국현은 맹세하듯 은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뭉근하게 눌리는 순간, 이 여자 말대로 그 이름을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현은 은선의 눈을 마주하며 속삭였다.
“최연정, 확실히 끊고 오겠습니다.”
* * *
채연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는 다 들었다. 의식이 없는 척, 연기하고 있다고.
채연은 고요한 얼굴을 보며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미안해도 엄마한테는 미안하지 않아요.”
“…….”
“엄마 소원대로 곧 이곳에 아빠가 오고 사국현 회장이 오겠죠. 사랑해서 오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러기 전에 엄마도 순순히 인정하세요.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연정은 끝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의 모정을 한 번 더 확인한 채연은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우리는 이렇게나 개 같은 사이네요.”
엄마.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킨 채연은 곧장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연정은 손에 닿는 이불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에 연정은 얼른 몸에 힘을 풀었다. 이번엔 누구일까.
간호사?
“최연정.”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창진,”
“이게, 사실이야?”
그러나 그의 이름을 말하지는 못했다. 그가 들고 있는 종이에 적힌, 심채연과의 친자 검사 결과가 연정의 심장을 섬뜩하게 그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