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뒤엉키는 기자들과 그들의 질문과 플래시 속 사이에서, 제인은 얼핏 태웅을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경식과 교진이 이끄는 대로, 에덴 건설 정문 앞에 섰다.
어느 기자가 우렁차게 물었다.
“손제인 기자님! 정말 사국현 회장님의 친딸이 맞나요? 앞으로의 다짐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녀의 양옆에서는 국현과 도운이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었다. 그러니 못 할 것도 없었다. 제인은 늘 봐 왔던, 내로라하는 재계 사람들의 미소를 고스란히 따라 했다.
“맞습니다, 사 회장님 친딸. 평생을 손제인으로 살아 성을 바꾸지 않겠다는 제 결정을 우리 회장님께서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되짚었다.
“친자 검사 결과 또한 곧 언론을 통해 밝혀질 것이니, 앞으로의 제 역량도 거기서 확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군더더기 없는 대답에 기자들은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던 도운은 은밀하게 제인의 손을 쓸었다.
정말, 섹시하다니까. 손제인.
* * *
산 넘어 산이라고. 경식과 교진이 한발 빨리 대회의실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서는 에덴 건설 이사진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무리 친딸이어도 그렇습니다. 경영 실무가 없는 사람이 자리에 앉는다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그래도 덕분에 금도를 흡수하고, 에덴 주가가 치솟지 않았습니까. 경영이야 확실히 배워 앉히겠다는 회장님의 말씀도 있으셨고요.”
“이 자리가 바로 내 딸을 처음으로 시험에 들게 할 자리기도 합니다만.”
국현이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듣고 떠들어 대던 이들은 국현의 말에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에서 국현이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게 진짜일 줄이야.
“걱정돼?”
도운은 제인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걱정하지 마. 잘하면 다 누나 덕분이고, 못하면 다 내 몫으로 넘겨.”
그럼 네가 힘들지 않을까. 사소했던 말도 이곳에선 조심스러워진다. 제인이 아무 말 못 하고 도운을 바라보자 그는 제인에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넌 나한테 그래도 돼.”
그 말을 끝났을 때, 국현이 모두에게 말했다.
“회사는 장난이 아닙니다. 그걸 알아 나도 내 딸이지만, 그냥 자리에 앉힐 생각은 없고요. 제인아, 준비해라.”
“네.”
제인은 큰 숨을 내쉬며 단상으로 향했다. 좁은 시야 안으로 국현과 도운이 자리에 앉는 걸 얼핏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인은 쉬는 내내 도운이 부탁하고, 국현이 준비하라고 한 ‘에덴 더 헤븐’ 인테리어 발표를 준비했다.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히 계단을 밟자는 두 사람의 뜻이기도 했다.
단상에 올라선 그녀는 교진을 바라보았다. 신호를 받은 교진은 곧 회의실 불을 조용히 내렸다. 인사하기에 앞서 도운을 보았을 때, 그는 담담하고도 다정한 눈빛으로 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손제인입니다.”
그 시선의 빛을 받아 제인은 일말의 용기를 내 보았다. 짤막한 인사와 함께 고개를 들어 올린 제인은 특유의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회장님 말씀대로 제 자리를 논하는 회의가 아니라, 에덴 건설에 관한 안건을 이야기 나누는 자리입니다. 제 의견을 들어 보신 후, 저의 처신을 판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어라, 싶은 호기심으로 허리를 세웠고 누군가는 마뜩잖은 눈빛으로 크흠, 하고 성대를 긁어 댔다.
제인은 프레젠테이션에 띄워진 ‘에덴 더 헤븐’ 발표를 시작했다.
“발표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인테리어는 제가 떠올린 것이며 회장님이 저를 친딸로 알아채기 이전에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웅성거림에도 제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길게 뻗어 화면에 띄워진 인테리어를 천천히 설명했다.
“에덴 더 헤븐의 큰 특징은, 거실은 크되 방은 좁다는 것입니다. 방은 아늑한 보금자리지만, 가끔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듯한 배 한 조각이 되기도 합니다. 이사회 여러분들은 이 넓은 세상에 홀로 남겨지신 적이 있나요?”
불시에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아마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그럴 때 사람은 가끔 방이 주인의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바랍니다. 언제든 새로운 문을 열고 등장할 내 가족이 있다는 걸 인지해 줬으면 하고요.”
제인의 말에 맞춰 교진이 화면을 바꾸었다. 제인이 만든 방 안에 있는 또 다른 방. 사람이 걸어가듯 장면이 전환되며 또 다른 방문이 열렸다.
모두 홀린 듯 화면을 보면서 제인의 발표를 귀담아들었다.
“적어도 혼자 살아온 저는 그랬습니다. 외로움이란, 사람 본연에 내재된 깊은 감정이라 누군가에게도 그러리라 생각했고요.”
도운을 살짝 바라보니 그는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찡그리고 있었다. 국현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숨을 한번 들이쉰 제인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에덴 더 헤븐, 전 그 이름과 수식어에 맞게 따뜻한 집과 인테리어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상 손제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자 회의실 조명이 밝아졌다. 짙은 고요가 깔린 회의실 안에서 유난히 팔불출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바로 세우고 보니 역시나. 도운이었다.
“깔끔하고 멋있는 발표네요.”
도대체 누구 여자인지.
“최고였어요, 손제인 상무님.”
* * *
정말 속전속결. 일사천리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제인의 자리는 더는 교진의 옆이 아니었다.
아직 상무로 임명된 건 또 아니라서 임시방편으로 집무실 하나를 마련해 주었는데, 도운의 집무실만큼이나 잘 꾸며져 있어 당혹스럽기도 잠시.
폭신한 집무실 의자에 앉아 숨을 들이쉰 제인에게는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 같은 충족감이 올라왔다.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어 눈을 떴다.
“이럴 계획으로 그때 날 네 자리에 앉히고 일 시킨 거지.”
“당연하지. 내 생각과 모든 계획은 너로 돌아가는데.”
그새를 못 참고 쫓아온 도운은 제인의 데스크에 걸터앉았다. 다시 가볍게 내려온 그는 제인의 앞으로 와 의자를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넌 내 꿈이자 상상이야.”
진지해진 눈빛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런 내가, 지금 널 두고 무슨 상상을 하는 줄 알아?”
“말만 해.”
실천하지는 말고.
도운의 눈빛이 진해지는 신호를 제인은 알고 있다. 몸으로 배웠으니 모를 수가 없다.
“여기서 널 다 벗겨 먹는 상상.”
물론 말을 들을 도운이 아니었다.
“결재해 주시죠, 손제인 상무님.”
의자 팔걸이를 손으로 짚은 도운은 씩 웃고선 상체를 숙였다. 단번에 불쑥 들어오는 혀를 맞이하며 제인은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
서도운은 정말이지 말을 잘 듣는 충직한 강아지 같기도 하고, 본능에 충실한 한 마리의 늑대 같기도 했다.
* * *
“최연정 환자, 상태는 좀 어때?”
“말도 마요. 화장실에서 목매려고 한 게 딱 청소부 아주머니 시간이라 겨우 뜯어말리니 기절했어요. 뇌파 검사를 해도 수면 상태도 아니고, 뇌사 상태도 아니라는데…….”
혼자 쇼하는 거죠, 뭐.
작게 속삭이는 간호사들의 말에도 연정은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저들의 말대로 다 계획된 것이었다.
현재 금도는 망했고, 심창진은 망가졌다. 연정은 다시 지긋지긋한 가난에 빠질 자신을 상상하며 국현의 사랑을 붙잡아야만 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했는데 안 올 리가 없지. 심창진이든, 사국현이든. 분명 누구 하나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아유, 말조심하자. 나가요, 이만.”
쾅, 하고 닫힌 저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연정은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 * *
한남동은 여전히 난리였다. 떨어진 집값을 보상하라는 둥, 범죄자는 당장 이 땅을 뜨라는 둥, 오가는 경찰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둥. 모두 심창진에 관해 이야기하며 언성을 높였다.
검은 천에 시뻘건 글씨로 쓰인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 모습을 보던 정배는 창진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창진의 집 앞은 살충제라도 뿌렸는지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벨을 누를까 했지만, 쉽게 열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정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굳게 닫힌 문은 허무하게 열렸다.
“얼씨구?”
유쾌하게 비웃은 정배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안으로 발을 디뎠다. 거실은 이미 개판이었다. 뉴스에서 본 그대로 엉망진창이 된 상태에서 그 어떤 것도 치우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과 담배꽁초의 수만 더 늘어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미쳐 가는 심창진의 모습도 예상 가능한 그림이었다. 거실 안을 떠다니는 매캐한 공기에 정배는 코를 막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창진의 뺨을 손등으로 두어 번 쳤다.
“정신 좀 차리지?”
탁탁, 뺨에 닿는 강한 마찰에 창진은 눈을 떴다. 술 때문인지, 망가져 가는 정신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했지만 눈을 몇 번 깜빡이니 비로소 정배가 보였다.
그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렇게 벼르더니 내가 이 꼴 돼서 아주 통쾌하겠어. 우리 서울 병원 이사장님이 미천한 범죄자는 왜 찾아오셨나.”
“비꼬긴.”
혀를 찬 정배는 일어나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니코틴을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고는 말했다.
“너 네 부인 좀 데려가라.”
“나 싫다고 세상 등지려고 한 여자를 뭐 하러.”
“웃기고 있네.”
불쑥 짜증이 치솟은 정배는 볼이 홀쭉해지도록 담배를 빨아들였다.
“최연정이 쇼하는 거야. 그 미친 여자, 목 안 매달았어.”
뭐?
그렇게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죽어 있던 창진의 초점에 이채가 서렸다. 정배는 담뱃재를 거실 바닥에 툭툭 털었다.
“청소 도우미 아줌마가 신고해서 우린 정말 다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보니까, 애초에 다 자기 발견하라고 사람 들어올 때 일부러 그 짓 한 거더라. 그러기 전에 뜬금없이 간호사한테 청소부 아줌마는 언제 오느냐고 물어봤고, 아줌마가 발견해서 놀라니까 그때 기절한 척 꽥.”
정배는 날렵하게 세운 손바닥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병원이 쑥대밭 되는 바람에 열 받아서 끌어내려고 하는데도 죽어도 안 일어나요. 정말 뒈졌나 뇌 검사까지 다 해 봤는데 지극히 정상이야.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창진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하늘은 참 맑았다. 야속하게도.
“너하고 사국현 불러들이려는 거야. 다시 예전처럼.”
창진은 침을 삼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치솟는 원망과 미움, 미련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난 그동안 너만 미친놈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제야 네가 미친놈 된 이유를 알겠더라. 그 미친년이, 너하고 사국현 둘 다 조종한 거라고.”
정배는 한 마디씩 강조하며 끊어 말했다. 굳이 아는 사실을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