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왜.”
“왜겠어요, 장인어른.”
“이런, 씨.”
몸을 일으켜 세운 도운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감동은 울컥함으로 불끈 변신해 버렸다. 도운은 험악하게 변하는 국현의 표정을 보고도 끝까지 약 올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장인어른. 미래의 아내를 데리러 가야 해서요.”
“그놈의 장인어른 소리는 안 할 수 없냐? 제인이는 또 어디 있는데.”
“어디 있긴요. 보육원에 장모님이랑 있지.”
“장모?”
너한테 장모가 어디 있어, 하고 외치려던 국현은 보육원이라는 말을 듣고 자연적으로 한 얼굴을 떠올렸다.
이놈이 설마? 하는 표정이 국현의 얼굴에 드리우자 도운은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날름 말했다.
“우리 장인어른은 장모님이랑 언제 결혼하시나?”
“야!”
벼락같은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국현의 손에서 쿠션이 날아왔다. 도운은 이미 쏜살같이 문을 닫은 뒤였다.
* * *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말이긴 한데, 제인아.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조금 늦은 은선의 축하가 따뜻하게 흘러 들어왔다. 그녀가 타 준 시원한 체리 에이드를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제인은 웃으며 원장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제가 더 감사하죠. 절 지금까지 키워 주시고.”
밖에서는 아직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이들이 정답게 뛰어놀고 있다. 제인은 저 나이 때 자신이 어땠는지 생생했다.
잔혹한 세상을 누구보다 빨리 깨우쳐 마음껏 웃지 못했었지. 그런 주제에 마음은 불안해 심채연을 평생의 친구로 임명하고, 도운이에게 은근히 의지를 하고.
회상하는 걸 보니 이제 21년 전의 일은 먼 과거로 느껴지나 보다. 그 노고를 제인은 은선에게 바치고 싶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원장님.”
제인의 고즈넉한 표현 위로 아이들의 웃음이 얹혔다. 지금처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세상을 알고 너희들의 처지를 알게 돼도 너희들은 늘 지금처럼 행복하기를.
그리고 원장님도 이제 마음 놓고 사랑하기를.
“제인아…….”
제인은 금세 코끝이 시큰해지는 은선에게 말했다.
“아빠는 지금 무척 바쁘세요. 회사 일로 처리해야 할 게 많으신가 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제인의 따뜻한 위로가 은선을 웃게 했다. 이미 들켜 버린 국현에 대한 마음이 은선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국현 씨를 많이 좋아한 모양이야.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하더라고.”
기다리라는 말을 한 이후, 국현은 종일 연락이 없었다. 수긍할 수 있는 국현의 반응이 은선은 괜히 마음 아팠다.
그렇지만 또 이상하게도, 연락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하겠지.
“채연이는 기자 회견 이후로 보육원에 오지 않았어. 조용히 살기로 결심했을 거야.”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심채연이 없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다. 그게 두렵다거나 놀랍거나 화가 나지는 않다.
그냥 우리는 반만 섞인 피처럼 그저 그런 얄팍한 인연의 끈이었던 거다.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나오지 마세요.”
“그래, 제인아. 조심히 가고. 앞으로는 언론에서 자주 보겠네.”
제인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일어나면서 문득, 신발 끈이 풀린 걸 보았다. 그래도 제인은 꿋꿋하게 걸었다.
걷는 이 길 끝에 언제든 신발 끈을 묶어 준다는 남자가 서 있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제인은 정면을 바로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보육원 운동장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도운과 시선이 마주쳤다. 조수석 문에 기대어 손을 들고 있던 도운은 불현듯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여섯 살 어린애가 아닌 도운은 남자다운 향을 품고 제인의 앞에 겸허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넘어지려면 어쩌려고.”
도운은 숱이 풍성한 정수리를 보여 주며 신발 끈을 묶어 주었다. 일어나지 않고 고개만 드는 도운에게 제인은 말했다.
“네가 묶어 준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나오기 전에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그럼 언제든지 달려가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어 줬을 것이다. 도운은 시선을 내려 다시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한 번 풀려 버렸던 인연이, 다시는 풀리지 않도록.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제인은 불현듯 무릎을 굽혀 앉았다. 눈높이가 같아지고, 눈이 마주치고. 일련의 행동처럼 두 사람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제인은 도운의 두 뺨을 감싸 고개를 깊게 틀었다.
다시 만난 그들처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처럼.
제인은 턱을 뒤로 당기며 입술을 떼어 냈다.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랑해.”
웃는 제인과 달리 그녀의 손바닥에 닿는 도운의 뺨은 불끈 치솟았다.
“앞으로는 절대 헤어지지 말자.”
어른이 된 손제인이, 어른이 된 도운에게 말한다. 그리고 도운은 당연히 그럴 자신이 있었다.
“당연하지.”
도운은 제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만약 네가 먼저 죽어도 난 누나 따라가서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평생 함께하겠다는 말을, 참 격하게도 한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면서 눈물이 고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육원에서 어긋났던 시계태엽이 이제야 제자리를 되찾는 기분이다. 따사로운 5월의 햇살. 제인은 두 사람을 드리우는 계절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 * *
월요일 아침, 제인은 오랜만에 출근 준비를 했다.
보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황당했던 건 가장 고요했던 최연정의 자살 소동이었다.
기사를 접하고 도운과 함께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혹여나 제인은 국현이 돌발 행동을 할까 봐 최연정에게 절대 가지 말라고 했다.
그건 국현을 불러들이려는 최연정의 쇼임이 분명하니까. 그녀가 그럴수록 국현과 도운은 제인의 자리를 더 견고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오늘, 제인은 흘러나오는 뉴스를 바라보며 도운의 말을 들었다.
“장인어른께서 은근히 뉴스를 흘리셨어. 이미 회사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야.”
<에덴 건설 사국현 회장의 친딸, 손제인 기자의 첫 출근.>
뉴스에 뜨는 자신의 사진과 이름보다도, 제인은 도운의 호칭이 더 낯설게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토스트를 구워 온 도운이 그녀의 뺨을 콕 찔렀다.
“왜, 여보. 우리 지금 사실혼 관계나 마찬가지잖아.”
도운은 일정한 패턴이 그려진 접시 위에 토스트를 가져왔다. 제인은 살구 잼이 듬뿍 발린 바삭한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었다.
“청혼 제대로 할 때까지는 어림도 없어.”
제인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초코를 쓰다듬어 주고는 방으로 향했다.
여보라니. 사실혼 관계라니. 토스트를 먹을 때마다 씹히는 살구 과육 때문일까. 온몸이 달콤하고, 간지러운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침대에서 자고, 같이 눈을 뜨고 감고, 밥을 먹고, 주말에는 떨어지지 않는 도운의 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니까.
“나랑 결혼할 생각은 있나 보네?”
뒤따라온 도운이 말했다. 제인은 도운이 준비한 다크 네이비색 슈트를 옷걸이에서 꺼냈다.
“조용히 해.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지.”
“부끄러워하긴.”
다분히 약 올리는 말투에 제인은 도운을 홱 돌아보았다. 이미 블랙 슈트를 갖춰 입은 도운은 침대에 걸터앉아 웃고 있었다.
“얄미워 죽겠어.”
제인은 오기로 입고 있던 잠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도운은 그녀의 벗은 몸을 짙은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절경이네.”
도운은 이불을 손아귀로 쥐다가 제인이 옷을 다 입고 나서야 벌떡 일어났다. 이 입술엔 꿀과 자석이 있는 건지.
도운은 고개를 기울여 제인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짧지만 강렬하게 치열을 훑고 혀를 휘감아 올렸다.
“더 하고 싶은데, 밖에서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제인의 입술을 쓱 닦아 준 도운은 한쪽 팔을 넓게 벌렸다.
“가시죠, 여왕의 자리로.”
그녀는 도운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팔짱을 끼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려고 하는 화창한 월요일이었다.
* * *
에덴 건설 앞에는 정말로 많은 기자가 진을 치고 있었다. 카메라 세팅과 인터뷰 준비를 하는 기자들은 도운의 차량이 들어서자 개미 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살짝 긴장한 제인의 눈앞에 그런 기자들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국현이 보였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제인이 있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찰칵, 찰칵, 찰칵. 문이 열리자마자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국현은 재빨리 뒤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등을 보이며 제인에게 빛 한 줌 닿지 않게 철저히 막아섰다.
그걸 본 제인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다른 세상이네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저 무리 안에 있었는데. 한낱 기자가 어느덧 찍히는 사람이 되었다.
기자 특성상 편한 옷만 추구하던 그녀는 값비싼 명품 옷을 입었고, 벨크로 운동화는 넣어 두고, 힐을 난생처음으로 신어 봤다.
잘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에 제인은 국현을 바라보았다. 국현은 따스하게 웃으며 제인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너처럼 예쁜 아이를 한낱 작은 화면이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그건 아빠의 시선이잖아요.”
“남편의 시선은 왜 빼.”
어느덧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도운이 국현의 옆에 섰다. 도운의 발언으로 국현의 표정은 험악해졌지만, 기자들이 있으니 내색하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괜찮으니까, 나와.”
나하고 회장님이 있잖아. 그렇게 말하듯 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현은 제인에게 손을 뻗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제인은 다정한 손을 잡고, 한 발씩 밖으로 내디뎠다.
동시에 강한 섬광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줄행랑도 못 친다고 판단한 제인은 오히려 고개를 더 빳빳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