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도운은 제인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심창진은 경찰과 검찰 조사, 최연정은 병원에 입원. 심채연은 행방불명.”
드문드문 ‘사국현의 아이는 누구인가. 에덴으로 옮겨 가는 금도 주주들’이라는 자막이 뜨기도 했다. 소란을 눈으로 곱씹은 제인은 도운을 돌아보았다.
“나 잠깐 핸드폰 좀.”
“왜?”
“그…… 아빠한테 전화하게.”
고개를 끄덕인 도운은 순순히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제인은 회장님, 이라고 저장된 번호를 꾹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지친 국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인이나 잘 데리고 있지, 왜 전화야.
“……아빠.”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일었다. 제인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아빠, 오늘 제 생일이에요.”
국현은 숨을 들이켰다.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울컥한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미안하구나. 나는 항상 늦어.
축하한다고 말해도 되겠니? 그런 조심스러운 질문이 떨어질 것 같아 제인은 선수 쳤다.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해요, 아빠.”
짙은 고요가 귓가로 끼쳐 왔다. 관자놀이에 내려앉는 도운의 입맞춤이 아니었다면 제인도 똑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저도 아빠의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뉴스에서는 또 한 번 화면이 바뀌었다.
<사국현의 아이, 신원 오리무중>
“다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더 이상 숨어 있고 싶지 않아요.”
귓가에 피식 웃는 도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뜻을 알아차린 국현도 강경해졌다.
-당연해. 넌 내 딸이니까.
그의 목소리엔 힘이 실렸다.
-곧 다가올 에덴 건설 발표에 너를 세울 거다.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아.
“네.”
-그리고…… 생일 축하한다. 못 해 준 시간만큼 아빠가 다 해 줄게.
빠른 말 뒤로 전화는 뚝 끊겼다. 제인이 핸드폰을 내리자 도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회장님, 이렇게 숫기가 없으셔서야.”
이제 침대로 갈까?
다시 제인의 옷깃을 파고드는 손길이 멎었다.
“잠깐만.”
그의 손을 잡은 제인이 텔레비전을 눈짓했다. 뉴스를 바라본 도운은 허리를 바로 세웠다.
자막과 함께 심채연의 얼굴이 보였다.
* * *
<금도 그룹 외동딸 심채연 양의 긴급 기자 회견>
전화를 했더니 임원들은 또 급하게 현수막까지 공수했다. 아마 금도를 살릴 최후의 수단이 그녀라고 여겨 이렇게까지 했겠지만, 기대를 이루어 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개미 떼처럼 모인 기자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지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무어라 떠드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건 그런대로 두면서 채연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자신의 결단은 바뀌지 않을 테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금도 그룹 심창진 회장의 딸, 심채연입니다.”
음성이 닿은 마이크는 끼익, 하는 소리를 냈다. 채연은 거두절미하고 모두가 간지러워하는 부분을 명확히 긁었다.
“제가 이렇게 기자 회견을 한 첫 번째 이유는, 세간의 화제와 달리 전 변함없는 심창진 회장님의 딸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사국현의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진실로 판명 나자, 세간에는 심채연이 사국현의 아이가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다.
채연은 그 부분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들과 자신에게는 어떠한 접점도 없다는 것을.
“그럼 사국현 회장의 따님은 누구입니까.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그 부분은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가 그 애의 모든 걸 앗아 갔다는 점이죠.”
씁쓸한 미소는 금방 지워졌다. 채연은 고개를 들고 정면에 있는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서 전, 제가 가진 걸 다시 갈기갈기 찢을 예정입니다.”
이제 마지막이다.
“오늘부로 금도 그룹 마지막 주주였던 전, 모든 상속을 포기합니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이 정도로는 네가 받은 상처에 위로조차 안 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미안해, 제인아.
채연은 금도와 이어졌던 악연의 실타래를 완전히 끊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국현의 호출이 있었다. 제인과 끝내주는 휴가를 즐기고 있던 도운은 늦은 오후가 돼서야 몸을 움직였다.
집에서도 해야 할 일은 무척 많았다. 제인의 식사를 챙겨 주는 것, 수시로 제인에게 입 맞추는 것, 그러다 침대 위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않는 것, 지친 제인을 씻기는 것.
전부 제인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도운은 회장실로 향했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경식이 도운을 향해 밝은 미소로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전무님.”
“오랜만입니다, 배 실장님. 무척 피곤해 보이십니다.”
“저보다는 회장님이 더하실 겁니다. 들어가시죠.”
두 사람은 악수로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경식은 회장실 문을 가볍게 노크한 뒤 문을 열었다.
“회장님, 전무님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가 보라는 듯 경식이 몸을 틀었다.
“저 왔습니다.”
“늦어.”
도운은 접대용 소파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늘 정돈된 모습만 보여 주던 국현은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고개를 날카롭게 들었다.
“9시에 불렀는데 왜 이제 오는 거야?”
“회장님 따님이 가지 말라고 계속 붙잡아서요.”
“이놈이, 진짜.”
다리를 덜컹 내린 국현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모습에 도운은 그만 웃음이 터졌다.
“농담이에요.”
제인은 오히려 도운에게 일 좀 하러 가라고 떠밀었다. 지칠 줄 모르고 붙어 오는 혈기 왕성함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도운은 제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을 국현과 어쩌면 자신의 존재로 위태로워진 도운의 자리까지. 똑똑하고 예민한 그녀라면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도운은 상체를 숙이며 두 손을 깍지 끼었다. 비로소 경청의 자세를 보여 주는 저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혀를 찬 국현이 말했다.
“며칠 전에 심채연 기자 회견 봤겠지? 마지막 주주였던 심채연이 발을 뺀 결과, 금도는 완벽하게 무너졌어. 지분도 우리 쪽으로 다 넘어왔고. 급할 건 없으니 금도는 천천히 인수할 예정이다.”
“여자에 눈이 멀면 패가망신한다더니 심창진이 몸소 실천해 보이네요.”
도운은 심창진의 선택을 신랄하게 비웃었다. 어쩌면 집착, 어쩌면 사랑. 무엇이 됐든 심창진이 진심으로 최연정을 사랑했다면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도운이 심창진이었다면 사랑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금도를 지키려고 더 악착같이 노력했을 테니까.
자고로 원하는 걸 손에 넣으려면 지킬 수 있는 걸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겠나.
반면 심채연은 모든 걸 놓아 버렸다. 뒤늦게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후회한 선택이지만, 과연 그걸로 본인의 실책을 감면할 수 있을까.
도운은 뉴스를 봤던 제인의 표정을 잠시 떠올렸다. 놀란 듯 살짝 커진 눈동자는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사국현의 딸이 정말 손제인 기자가 맞냐는 질문과 심채연의 대답에 그녀는 퍽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그 아이의 인생을 자신이 망쳤다는 심채연의 말에 제인은 이렇게 말했다.
‘알긴 아네.’
참 그녀다운 대답이지 않나. 자신을 보내고, 자신이 보내 버린 것에 대해서는 깔끔한 반응을 보이는 것.
도운은 그중에서도 자신은 그녀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갈비뼈에서부터 뻐근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래서 나도 네가 패가망신 안 당하게 머리 좀 굴려 봤다.”
“불똥이 왜 또 저한테 튑니까?”
“너하고 제인이를 위해서야.”
딱히 웃을 상황은 아닌데도 실실 웃는 걸 보아하니 머릿속이 누구로 가득 찼는지 훤하다. 내 딸한테 눈이 멀어 정말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놈이니, 미리 선수 쳐서 나쁠 건 없다.
국현은 엄한 얼굴로 선포했다.
“제인이를 에덴 건설 상무로 임명하려고 한다. 물론 경영 지식이 없어 임시지만, 천천히 배우게 할 생각이야. 네 생각은 어떤지 묻고 싶은데.”
국현의 어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회사 직급상, 상무 다음은 전무였다. 경영 수업을 혹독하게 받은 도운과 달리 제인은 국현의 피라는 이유로 순조롭게 상무 자리까지 밟는 게 그에게는 불평등하다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이렇게 이행하고자 하는 이유는, 제인을 도운과 같은 선상에 두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나사 빠진 놈처럼 행동하는 저놈은 분명 나중에 제인이와 결혼을 한다고 할 것이다.
그때 자신의 핏줄인 제인에게 아무 자리도 없다면 훗날 도운에게도, 제인에게도 큰 꼬리표가 달릴 수 있었다.
그래서 과감한 선택을 한 거지만, 미안하기도 했다. 국현의 연설은 괜히 길어졌다.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내가 당부하고 싶은 건, 제인이가 나타났다고 너를 내치려는 게 아니라…….”
“아버지.”
그걸 도운이 덜컹 멈춰 세웠다. 도운을 키운 이래, 처음 들어 보는 호칭이다.
심장이 순간 어그러지는 기분을 받은 국현은 도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사람을 놀라게 한 도운은 도리어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21년 동안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배우게 했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전 제인이가 누리지 못한 걸 지금껏 대신 가져 보았고, 이제 아버지는 제인이한테 못 해 준 마음을 마음껏 푸셔야죠. 뭐 하러 제 걱정까지 하십니까.”
안 그래요? 도운이 되묻듯 눈썹을 들썩였다. 퍽 장난스럽고 진심인 출렁임이라 국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참…….”
효자라고 해야 하나. 굴러온 복덩이라고 해야 하나.
도운이 아니었다면 국현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영영 제인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멀쩡히 살아 있는 딸을 제 발치에 데려다 놓은 것도, 알아볼 수 있게끔 치밀한 작전을 짠 것도, 딸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것도 전부 다 도운의 손에서 태어난 기적이 아닌가.
고맙다고, 아버지라는 말을 들은 만큼 이 감동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