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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65화 (65/79)

65화.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인은 욕조 안에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두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한 번, 씻겨 준다고 안아 들어서 욕실로 오더니, 이곳에서 또 한 번. 지쳐 의식을 잃으니 이제야 씻겨 줄 마음이 생겼나 보다.

“서도운.”

제인은 뻐근한 팔을 움직여 찰랑이는 물을 뒤로 홱 뿌렸다.

“나 애 아니거든?”

“그래? 아까는 펑펑 울길래 아기인 줄 알았지.”

아주 위아래로 골고루. 요망한 각각의 손이 다시 다리 사이와 가슴을 매만지려고 한다.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쳐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더 바짝 다가와 제인을 포박했다.

“알았어. 이제 안 할게.”

“안 믿어.”

“진짜.”

진짜? 제인은 되물어보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난감한 건지, 다시 불씨가 켜진 건지 도운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움직이지 마.”

그가 허리를 감던 손을 내려 골반을 딱 고정한다. 엉덩이 아래로 느껴지는 흉흉한 부피감에 제인은 다시 기함했다.

“도대체 너는 몇 번을…….”

“그냥 나가자.”

순순히 보내 주나 싶었는데. 욕조를 벗어나는 것도 굳이 제인을 안고 일어나면서 한다.

정말 걸음마도 못 하는 송아지가 된 기분에 수치스럽긴 했지만, 제인은 그냥 도운에게 몸을 맡겼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고, 피부에 들러붙는 도운의 체온은 너무 따뜻했기 때문이다. 도운은 제인을 잠시 욕조에 앉히고 몸 구석구석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나 배고파.”

“그래, 밥 먹자.”

쪽, 쪽, 쪽. 차례대로 이마, 코, 입술에 입을 맞춘 도운은 제인에게 가운을 입혔다. 서로 가운차림으로 거실에 나가는 게 뭔가 우스워 제인은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도운이 이끌고 온 다이닝룸에서 엄청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따끈따끈한 밥이 차려져 있었다. 그냥 밥이라고 하기엔 또 뭐했다.

“난 실컷 먹었으니까 이젠 누나 차례야.”

“이걸 언제 준비했어?”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흰 쌀밥과 성게 미역국, 짭조름한 양념의 버섯 소갈비 찜과 채소와 당면이 골고루 버무려진 잡채 그리고 망고 생크림 케이크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생일 축하해, 제인아.”

정말 뜻하지도 못한, 거대한 생일 선물이었다.

* * *

제인이 생일상을 받던 그 시각. 채연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보육원에서 따뜻한 밥상을 받았다.

그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은선이 식탁 위에 내오는 윤기 나는 쌀밥을. 된장이 잘 풀어진 시금칫국을. 시원하게 잘 익은 갓김치를.

“먹으렴, 채연아.”

은선의 다정한 말에도 채연은 눈으로 음식을 먹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왔다. 삼키고 삼켜도 목구멍 안에는 울컥함이 치밀어 올랐다.

옆에 앉은 원우가 손을 잡아 주고 나서야 채연은 그게 억지로 누르고 있던 눈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맞은편에 앉은 은선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어떠한 책망도, 미움도 없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그게 참 이상했다. 부모란 사람들은 각자의 사익과 욕망만 바라느라 평생을 자식에게 무관심했는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원우와 은선은 세상에서 제일 악독한 심채연을 다독여 준다.

자신을 버리고 더 완벽해질 제인이가 미워서, 그 이름도 빼앗은 그녀를. 아이들을 찾으러 왔다는 심창진과 최연정의 말에 부모의 사랑이란 걸 받아 보고 싶어 거짓말했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야.”

왜 나를 이렇게…….

“네 잘못이 없다고는 말 못 해. 그러나 전적으로 네 잘못인 것도 아니야.”

따뜻하게 안아 줘, 왜…….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화산처럼 폭발하는 눈물도 염치가 없어 고개가 절로 조아려졌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이 채연의 손을 잡은 원우의 손등으로 처참하게 떨어졌다.

“저는 정말, 흐윽…… 나중에 제인이에게 갚으면 된다고 생각, 흑, 했어요. 먼저 나를 버린 건 그 애니까, 제인이가 제게 오면 제가 가진 걸 천천히 줄 생각이었다구요.”

우리는 늘 함께라고 했던 너였으니까.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건데, 서도운이 나타난 후로 나를 뒷전으로 하는 네가 미웠다.

그런데 웃기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미움은 너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니면서도 동생의 도움을 받는 내가 때로는 한심했고, 하찮았고, 싫어서. 대단한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으면서도 네가 아끼는 서도운에게 그 질투가 뻗어 나갔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억지로 하겠다고 우겼다. 세상 누구보다 애틋한 너희 둘을 떼어 놓으려고. 사실은 너의 것을 빼앗아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면서.

내가 거짓말을 해 금도의 딸이 되지 않았다면 누구보다 똑똑하고 예쁜 네가 엄마, 아빠의 딸이 되었을 수 있으니까.

그게 싫어 더 악랄하게 굴었으면서. 동생을 원하고 사랑하는 언니의 마음이라 애써 포장했다.

“제 마음은, 흑…….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래, 너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래.”

그렇게 갔으면, 잘 살아야지. 잘 살아서 더 떳떳하게 살았어야지.

은선은 엉엉 우는 채연을 보며 생각했다. 제인이도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분명 같은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풍비박산이 난 관계는 되돌릴 수 없다. 일을 저질렀으면 합당한 대가도 치러야 한다.

“이제라도 알았다면 채연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채연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다른 사람은 못 해도 금도 그룹의 딸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채연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선이 차려 준 따뜻한 밥은, 먹지 못할 것 같다.

“다녀올게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걷자 원우가 뒤따라왔다. 채연은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다 정리하자, 원우야.”

낮게 말한 채연은 핸드폰을 들었다. 그동안 창진이 연락을 두절하자 임원들은 그녀에게도 숱하게 전화했었다.

그동안은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지금 전화를 하면 될 것이다. 채연은 그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연락이 늦어서 죄송해요. 저를 주축으로 기자 회견을 열었으면 합니다.”

* * *

도운이 차려 준 생일상의 음식들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비록 반찬을 집으려고 팔을 뻗을 때마다 근육이 아우성쳤지만, 힘을 잔뜩 소진하고 먹어서인지 마지막 밥 한 톨까지 싹싹 긁어 먹을 수 있었다.

제인이 숟가락을 내려놓자 도운이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잘 먹네.”

“이런 건 언제 준비했어?”

제인은 물을 꼴깍꼴깍 마시며 도운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빈 그릇을 겹겹이 쌓아 싱크대 안으로 넣었다.

“누나 정신없이 잘 때 아주머니 불렀지.”

설마, 여기까지 들인 거야? 그렇게 묻는 제인의 눈빛이 보였다. 마저 치우기 위해 식탁으로 몸을 튼 도운은 피식 웃었다.

“현관 앞에서 음식만 받았어.”

제인의 손에서 물컵을 빼 간 도운은 그녀의 볼을 톡 스쳤다. 부끄러울 뻔했는데 다행이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도운이 차리고, 도운이 치워 준 식탁 위에는 이제 새하얀 망고 케이크만 남았다.

“이제 촛불 불자.”

“애도 아니고 생일을 뭘 챙겨.”

“아기 맞던데. 내가 본 건 뭐지?”

알면서 짓궂게 되묻는다. 도운의 의미심장한 말에 제인의 머릿속엔 몇 번의 관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결코 아이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몸 아래 깔려 한동안 흔들리고, 뒤집히면서 결국엔 좋다고 엉엉 울었더랬지.

아직도 몸에 생경한 감각이라 부정하지는 않는다만 부끄럽긴 하다. 제인은 도운을 흘겨보고는 그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쳤다.

도운은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아랫입술만 가볍게 물었다 놓아주는 행위에도 질척함이 묻어 나왔다.

그대로 멀어질 것 같던 도운은 제인의 두 뺨을 감쌌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고 시선이 아주 가까이에서 엮였다.

“생일 축하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도운의 눈빛은 낮고, 뜨거웠다.

“……고마워.”

말하고 나니까 알겠다. 그녀는 이 순간이 낯설었다.

늘 혼자였던 생일이 서도운으로 가득 찬 게, 눈앞에 있는 서도운이 그녀를 알아봤다는 게, 그런 서도운 말고도 아빠가 생겼다는 게.

가슴이 간질간질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축하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제인은 팔을 뻗어 도운의 목 뒤에 걸었다. 그의 굳어지는 어깨를 잡아 이끌자 순순히 턱을 당겨 온다.

제인은 도운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자연적으로 벌어진 입술 새로 혀를 먼저 집어넣자 도운의 목 안에선 낮은 신음이 끓어올랐다.

도운은 시럽처럼 끈적하게 밀려 오는 제인의 입술을 피하며 볼에 참새 같은 입맞춤을 날렸다.

“정말 앓아누울까 봐 겨우 참고 있는 건데.”

꼭 이런 식으로 사람을 미치게 한다. 도운은 제인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앉아서 마주 보는 자세가 되자 제인의 눈높이가 조금 높아졌다.

“내가 이성을 잃기 전에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뭐를?”

“생일 선물. 원하는 거 다 말해.”

“뭘 말하든 다 들어줄 수 있어?”

“당연하지. 너는 나한테 손제인을 줬잖아.”

보석보다 더 값지고, 로또보다 더 당첨되기 어려울 확률.

“그 어떤 금은보화를 내밀어도 너랑은 안 바꿔. 근데 누나가 원하는 금은보화면 내가 땅굴을 파서라도 안겨 줄게.”

천천히 이야기하라는 듯이 도운은 제인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제인은 엄지손가락으로 도운의 뺨을 매만졌다.

서도운은 아마도 모르나 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은 바로 오늘이자 서도운 본인이라는 걸.

하지만 문득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제인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빠를 좀 도와줘.”

아직 낯선 단어에 잠시 머뭇거리다 나온 제인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도운이 눈썹을 올렸다. 차분히 기다려 주는 눈빛에 제인은 말을 이었다.

“아직 바깥 상황이 난장판이라는 거 알아. 내 존재가 밝혀지면 더 시끄러워질 것도 알고. 지금은 내가 힘이 없어서 도운이 네 힘이 필요해.”

“너무 소박해서 들어줄 수밖에 없네.”

읏챠, 하고 장난스러운 소리를 낸 도운은 그대로 제인을 안고 일어났다. 다시 소파에 털썩 앉은 도운은 제인의 몸을 반대로 돌렸다.

제인은 도운의 가슴에 등을 편안히 기대며 켜지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뉴스가 그녀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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