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헛손질로 차 문을 겨우 연 창진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때였다.
“아빠! 아빠!”
뛰어온 채연이 창문을 마구 두드렸다. 창진은 창문을 내리지 않고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친자 검사지, 집으로 갈 거예요! 그거 꼭 봐요!”
“누가 최연정 딸 아니랄까 봐.”
끝까지 잔인하기만 하다. 사국현과 엮인 그 결과지를 감히 나보고 보라고 하는 건가?
톡톡. 창진은 검지로 창문을 두드렸다. 펑펑 우는 채연의 눈물을 닦아 주듯 잠시 그러고 있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금도는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기둥인 자신이 이 모양이 됐으니. 아무리 그래도 돈보다는 최연정을 가져야겠다.
함께 무너지는 영원히 함께하는 거니까. 날 두고 이 진창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도 마.
창진은 불현듯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저녁의 퇴근길, 저 멀리에서 경찰들이 음주 단속을 하고 있다. 그는 그곳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경찰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음주 운전에 합의되지 않은 부부간의 성관계, 그 외 각종 비리는 터지고 있고.”
창진은 실성한 듯 웃으며 두 팔목을 경찰에게 내밀었다.
“거, 나 좀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가지. 경찰관 양반.”
* * *
한남동 심창진의 집에 건국 일보가 들이닥쳤다. 친히 집 비밀번호까지 알려 주고, 직접 생중계를 하라고 했던 장본인은 다름 아닌 심창진.
태웅은 창진의 연락을 받자마자 중계 팀과 함께 이곳에 들어왔다. 집 안 꼴은 아주 난장판이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네.”
카메라 세팅을 마친 감독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몇 분 전엔 긴급 연락이 왔다. 심창진이 도로 한복판에서 제 입으로 모든 자백을 했다고.
지금 기사는 물론이거니와 심창진이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이 뉴스로 생중계가 되고 있었다. 이제 이게 터지면 심창진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잠시만요, 피디님.”
그때, 양해를 구한 태웅은 침실로 향했다. 인기척이 들렸는데도 최연정은 침대에서 천장만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태웅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다 끝났어.”
“…….”
“모든 게 밝혀졌다고. 당신이 심창진과 사국현 사이에서 저울질한 것도 다 무너졌어.”
침묵이 몇 초간 일었다. 초점을 잃은 최연정이 눈물을 흘리며 웃기 시작했다.
“사는 의미가 없네, 그럼…….”
실컷 웃는 연정은 기괴했다.
“그래도 사국현은 나를 찾아 줄걸?”
그래야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중얼거리는 연정은 거의 반쯤은 미친 사람 같았다. 태웅은 말없이 다시 거실로 나갔다.
“시작하시죠.”
뭐가 됐든, 지금부터 스탠바이였다.
* * *
끝없는 고도를 내달리던 정사는 더는 못 하겠다는 제인의 흐느낌으로 끝이 났다. 힘은 제가 쓰는데, 왜 네가 더 우냐는 짓궂은 질문에도 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울 줄도 알고.”
도운은 품 안에 안긴 제인을 보고 피식 웃었다. 하도 물고 빨아 통통하게 부어 버린 입술을 톡 치니 콧잔등을 찡그린다.
며칠 내내 잠을 자지 못한 도운이지만, 그런 제인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오히려 생생했다. 지나친 예민함도 피로도 제인을 맛본 후로 전부 싹 가라앉았다.
그만큼 제인은 카페인보다 중독성 있고, 사탕보다 더 달콤했다. 게다가 섹스 후 맛보는 금도의 나락이라니.
“극락이 따로 없군.”
도운은 제인의 어깨를 잡아 품으로 깊숙이 끌어당겼다. 그녀의 얼굴 위로 불빛 한 줌 닿지 않게 만들며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소리가 꺼진 텔레비전은 가관이었다.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경찰에 연행되는 심창진. 줄을 지어도 끝나지 않는 각종 비리가 연속으로 자막에 뜨고, 화면이 바뀌면 또 처참한 한남동 본가 안의 모습과 최연정이 보인다.
도운이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원하는 대로 누나를 만났고, 제인이 곁에 있는데도 저들을 곱씹으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그는 가슴팍에 닿는 제인의 이마로 입술을 내렸다. 제인이 일어나면 이제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에덴 건설 사국현 회장의 딸로서, 새로운 인생도 살겠지.
에덴 호텔 서도운 전무의 안주인으로서도.
조용히 입꼬리를 올린 도운은 입술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녀를 다시 똑바로 눕히고는 이마에서 관자놀이, 뺨으로 내려가 목덜미에 촉촉 입술을 맞추고는 어깨 위에 나란히 있는 세 개의 점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깨우고 싶지 않은데, 깨우고 싶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침대 맡에 놓인 도운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가 국현이라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뉴스는 보고 있겠지?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운 도운은 여전히 제인의 몸에 입술을 붙이며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달콤하기 짝이 없네요.”
금도의 몰락을 안주 삼아 손제인을 맛본다. 상황이 주는 짜릿함에 단전이 다시 뻐근해졌다.
-채연이, 아니. 제인이는 어디 있어. 위험할 것 같아서 데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전화도 안 받고 집은 이미 네가 처리했다던데.
“저랑 같이 있어요.”
당당하기 그지없는 고백에 국현은 침묵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내 딸이야.
다 큰 성인 남녀가 한집에서 뭘 하겠나. 이미 예상한 국현은 간접적으로 경고했다. 내 소중한 딸,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하지만 도운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럼 호칭을 바꿔야겠네요, 장인어른.”
-야.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도운은 울컥한 국현이 웃겼다. 수화기 너머로는 국현의 진한 한숨이 몰려오기도 했다.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우리 회장님, 날 가만두지 않겠어.
도운은 씩 웃으며 제인의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꾹 눌렀다. 계속된 자극에 잠들어 있던 제인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쉿.
제인이 입을 열려고 하자 도운은 자신의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판은 제가 짰으니 나머지는 장인어른이 해결하세요. 당분간 전 휴가입니다.”
-야, 내가 왜 네 장인어른…….
울컥한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도운은 핸드폰을 침대에 멀리 던졌다. 그 행동이 꽤 성급해 보여 제인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더 못 해.”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잠 때문인지, 어젯밤의 여파 때문인지. 목소리는 처참하게 갈라져 있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항의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건 도운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녀의 두 뺨을 감쌌기 때문이다.
“우리가 뭘 했는데? 난 기억이 안 나.”
“야.”
부전여전 아니랄까 봐.
웃음을 흘린 도운은 고개를 기울였다. 자연스레 뺨을 감싼 한 손은 스르륵 내려와 제인의 턱을 지그시 눌렀다. 제인의 입술이 벌어지고, 본격적으로 입을 맞추기 전에 도운은 비스듬한 시선으로 속삭였다.
“머리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거든.”
어제 했던 걸 그대로 시현해 봐야 기억이 날 것 같기도.
다시 제인의 몸 위를 차지한 도운은 제인의 입속에 혀를 밀어 넣었다. 곤히 잠들어 묵혀 있던 타액은 유난히도 달콤했다. 아직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제인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너는 진짜…….”
제인은 마지막 항변처럼 도운의 어깨를 밀어냈다. 슬금슬금 자극하는 손이 다시금 잠든 감각을 찌릿찌릿 깨운다.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한다는 게 뭔지 보여 줄게.”
가슴으로 들어온 손이 은밀하게 움직인다. 눈을 한껏 치켜세우려고 했지만…….
“아, 아. 잠깐만…….”
제인은 결국 움트는 아찔한 자극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 * *
국현은 끊긴 전화에 황당했다. 20년 만에 만난 딸의 남자 친구가 하필이면 제가 키운 남자라니.
“아니, 짐승 새끼인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운이. 제인이를 데리고 있다더군.”
말을 하면서도 기가 차 국현은 하,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눈치 좀 보며 감추기라도 해야지. 이놈은 뭐, 도리어 당당하다.
“이제야 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하는지 알겠어.”
“전무님 정도면 은혜 갚는 건장한 호랑이인 거죠. 금도가 저렇게 하루아침에 망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국현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는 뉴스에서는 금도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경찰에 연행된 심창진은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제 입으로 비리를 자백했다. 드문드문 최연정의 소식도 속보로 나왔다. 분명 한때는 사랑하는 여자였지만, 지금은 일말의 동정도 없다는 것이 참 개운했다.
그 옆에서 경식은 태블릿으로 금도의 현 상황을 계속해서 살폈다.
“금도의 주가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반면, 금도 쪽 대주주들이 저희 쪽으로 들어오면서 금도의 흡수가 빠를 것 같습니다.”
“바라던 대로 됐군.”
심창진과 최연정의 몰락과 산산이 조각난 금도.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일정하게 친 국현은 경식에게 말했다.
“그럼 조만간 새로운 대주주들을 맞아 이사회를 한번 가져야겠군. 거기서 제인이의 존재를 밝힐 거야. 차질 없이 준비해.”
“하지만 이사회가 가만히 있을까요? 벼락같이 떨어진 친자여서 의심부터 앞설 겁니다.”
분명 그럴 테다. 하지만 국현은 제인을 믿었다.
“제인이는 나를 많이 닮았어. 잘해 낼 거야.”
못하면 잘하게끔 가꾸어 주면 된다. 그는 비로소 만난 딸에게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국현의 진심 어린 미소에 경식 또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손은선 씨는 어떻게 할까요?”
뜻밖에 이름에 국현의 멈칫했다.
“사람을 붙여 놓으라고 말씀하신 이후로 기타 지시가 없어 그대로 두긴 했지만, 심창진은 이미 보육원으로 향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 말은 내가 지금 은선 씨 걱정을 했단 말인가?”
“당연합니다. 손 원장님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친모가 함구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으셨죠. 그냥 잠시 기다리라는 말씀만 남기셨고요.”
경식이 맞는 말의 향연을 보여 주자 국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심채연이 보육원에 찾아온 날, 국현은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던 은선의 말에 아무 말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건 국현에게도 참 낯선 감정이었다. 심채연의 눈물은 역겨웠지만, 은선의 눈물은 가슴이 아팠으니.
“우선 일이 해결된 후에.”
국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때 내 마음도 수습하도록 하지.”
“그게 좋겠습니다.”
경식은 모른 척하며 기쁘게 웃었다. 누구보다 처절한 사랑을 해 봤으니 지금 느끼는 감정은 국현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경식은 제인에 이어 제2의 인생을 펼칠 국현을 누구보다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