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63화 (63/79)

63화.

타악, 타악. 내달리는 걸음만큼 심장은 빠른데, 시간은 느려지는 것 같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밝아졌다, 다시 흐려졌다가 앞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컹!”

도운이 사는 에덴 에리스 동 앞에서 익숙한 덩치가 반갑게 뛰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초코!”

제인은 발돋움해 붕 떠오르는 초코를 품에 안았다. 보드라운 털에 눈물을 닦아 내며 고개를 들자 비로소 보였다.

“안녕, 누나.”

그 옛날과 다르게 커다래진 도운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제인은 잠시 초코를 내려놓았다. 딱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도운은 웃으며 말했다.

“누나는 이름이 뭐야?”

제인은 긴 숨을 들이마셨다. 긴 시간의 설움이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떨리는 입술이 겨우 벌어졌다.

“내 이름은…….”

“누나 이름은.”

“네가 안 가면 알려 줄 거야.”

이젠 2주가 아니라, 평생. 평생 떠나지 않아야 알려 줄 것이다. 그게 다 큰 제인 안에 남아 있는 어린 제인의 마지막 심술이었다.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것 같은 제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 내도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왔다.

도운은 서러운 그 눈물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낸 도운은 성큼성큼 다가와 제인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제인의 흥건한 눈가를 엄지로 쓸며 말했다.

“누나.”

“흐윽…….”

“보고 싶었어.”

도운은 입술을 내렸다. 지독하게 느껴지는 짠맛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래도 이게 누나의 아픔이라면, 도운은 기꺼이 마실 생각이 있었다.

“가자, 누나. 내가 집 사 준다고 했잖아. 앞으로는 내 집이 누나 집이야.”

딱 세 번, 부드럽지만 짙은 농도로 입을 맞춘 도운이 뒤로 물러났다. 손제인이 내 여자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데 지금은 아니다.

도운이 앞서 걷자 맞잡은 손이 길게 이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긴 복도를 걸었다. 어느새 제인의 눈물은 전부 말라 버리고, 색다른 설렘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빨리 문을 열라고 앞발로 현관을 박박 긁는 초코만큼 도어 록을 푸는 도운의 손길은 다급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먼저 안으로 뛰어가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초코를 도운은 가볍게 제압했다.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어.”

큰 보폭을 따라가기 버거워 제인이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그의 그림자를 밟는데, 도운이 갑작스럽게 몸을 돌렸다.

자신의 손을 잡았던 그의 손은 어느새 허리를 감쌌고, 나머지 손을 뒤로 뻗어 침실 문을 쾅, 닫는다. 커다란 손이 얼굴의 반을 덮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들여다보던 도운이 고개를 틀었다. 순간 떨리는 마음에 제인은 도운의 두 어깨를 잡아 밀었다.

“잠깐만.”

“시간 없어.”

“왜?”

“왜?”

도운은 도리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짙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21년을 기다렸어. 이 이상 내가 어떻게 참아. 누나를 찾았는데.”

이 애틋함은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 문과 도운 사이에 갇힌 제인은 두 팔을 뻗어 그의 목 뒤에 걸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인은 까치발을 들어 도운의 입술을 누르듯 입을 맞췄다.

“넌 징징대는 걸 너무 좋아해.”

“누나는 이런 나한테 약하고.”

피식 웃는 것도 잠시였다. 금방 웃음기를 지운 도운은 제인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고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겹쳐지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급변했다. 도운이 제인의 입술을 빨면 제인은 고개를 다른 각도로 기울였다.

신호탄처럼 몸의 방향이 반대쪽으로 홱 틀어졌다. 깊이 들어온 혀가 아랫배를 수축시킨다. 도운의 몸에 매달리다시피 한 제인은 단단한 몸이 미는 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밭은 숨을 내쉴 새도 없이 오금에 침대 끝이 닿았다. 흠칫 놀란 제인이 떨어지려고 했지만 도운은 그 틈도 주지 않았다.

절대 떨어지지 마.

그렇게 말하듯 도운이 제인의 뒤통수를 눌러 함께 침대 위로 무너졌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입술이 계속해서 그에게 빨리고, 물리고, 핥아졌다.

점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다. 제인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숨 막혀.”

정말이지 이러다 기절해 버릴지도 모른다. 서도운은 너무 능숙했다. 입안의 여린 점막을 자극하며 간질이고, 애타게 하는 그 감촉에 제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

“겨우 이 정도로?”

웃으며 말했지만, 도운은 사실 몸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회색빛 침대 시트와 달리 빨갛게 물든 제인의 몸. 게다가 숨을 할딱이며 오동통하게 붉은 입술을 움직이는데, 아주 그냥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제인의 뺨을 쓸어내린 도운은 곧장 그녀의 블라우스 안을 파고들었다.

“우리 누나, 예전엔 나보다 크더니 이젠 아기가 됐어.”

“무슨 소리를, 흣…….”

“싫어?”

슬금슬금 올라온 손이 브래지어를 밀어젖혔다. 그리고 연한 살을 마사지하듯 주무르더니, 예민하게 솟아오른 정점을 손끝으로 매만진다.

“말해 봐. 싫어?”

뭐가 싫냐고 물어보는 걸까. 제가 아기 취급당하는 게? 몸이 떨리는 이 생경한 감촉이?

제인은 두서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싫어, 아니. 좋아. 손에 압력을 싣자 끄덕였다 도리질하는 제인의 몸부림에 도운은 머리를 아래로 내렸다.

가슴에 뜨끈한 숨결이 닿았다.

“그럼 내가 평생 누나 애새끼 하지, 뭐.”

그게 어렵나. 도운은 손에 잡히는 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날카로운 신음을 흘린 제인은 도운의 머리칼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데, 도운은 찌릿하게 피어나는 감각에 더욱 사포질했다. 그는 제인의 갈비뼈부터 입을 맞추며 그녀의 허벅지를 옆으로 잡아 벌렸다.

놀란 제인이 고개를 당겼지만, 도운은 서슴없이 그곳으로 입술을 내렸다. 머리에 번쩍이는 섬광이 인 제인은 도운의 어깨에 발을 올렸다.

“아, 도운아. 도운아, 잠깐만…….”

“뭘 자꾸 기다리래. 기다리는 건 몸에 사리 나오도록 했어.”

“이상해. 이상해서 그러니까…….”

흑, 하고 정말 애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몸이 기이하게 뒤틀리고 허리가 자꾸 허공으로 붕 떴다.

그럴수록 도운은 제인의 곳곳을 집요하게 탐했다. 오히려 더 가파른 절벽으로 안내하듯 그녀를 사지로 몰아세웠다.

아랫배가 미친 듯이 떨리고 비명 같은 신음이 나오고 나서야 도운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녹진하게 녹은 몸 위로 도운이 단단한 몸을 겹쳐 왔다.

도운은 제인의 손을 깨물며 말했다.

“제인아.”

떠나지 않는 쾌감으로 눈앞이 어질한데도, 그 이름을 듣자 제인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사랑해.”

동시에 도운의 단단한 몸이 밀려 들어왔다. 다시 한번 이루어지는 질펀한 재회의 신호탄이었다.

* * *

텅 빈 제인의 집에서 넋을 놓고 있던 채연은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은 어느새 모든 사건의 시초로 되돌아갔다.

<꿈으로 보육원>

보육원 입구에 적힌 낡은 석판을 바라보던 채연은 원우에게 말했다.

“……가자.”

걸음을 내딛자 운동장 흙바닥이 짓눌리는 소리가 났다. 참 기묘했다. 처음에 동생의 이름을 빼앗고 엄마 아빠가 생겼다고 믿었을 땐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었는데.

결국, 다시 이곳이었다. 꼴사나운 심채연.

가느다란 웃음을 흘린 채연은 원장실 문을 열었다. 원장실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심채연…….”

“어째서 네가 내 딸의 이름을 가졌는지 설명이 필요해.”

한바탕 눈물을 쏟은 것 같은 은선과 서슬 퍼렇게 묻는 사국현. 결국, 그런 거였구나.

제인이는 정말…… 사국현의 아이였구나.

채연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원장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채연아.”

“큰원장님과 두 분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런 거였는데, 내가. 내가 그것도 모르고…….”

정말 병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 애의 이름도 빼앗고, 인생도 빼앗고,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와의 연까지 끊어 버렸어.

채연은 결국 바닥에 무너졌다. 아무리 두 손으로 얼굴을 막아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흑……. 정말 죄송해요…….”

“인제 와서? 인제 와서 내 딸과 나한테 미안하나?”

더는 화를 낼 기력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국현에게는 악어의 눈물일 수밖에 없는 저 흐느낌을 보자니 억눌렀던 부아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는 제인의 말을 듣고 곧장 보육원으로 왔다. 그리고 그동안의 일을 다 듣게 됐다.

심창진과 최연정의 만행뿐만 아니라 왜 제인이가 그동안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었는지, 그리고 은선의 친모 정옥과 관련된 이야기까지 전부 다.

은선의 눈물과 채연의 눈물은 국현에게는 극과 극이었다. 은선에게는 그동안 제 아이를 잘 키워 주어 고마운 마음에 따뜻하게 안아 주고 싶었지만, 심채연의 저 얼굴은 두 번 다신 보고 싶지 않았다.

국현은 성큼 걸어가 채연의 어깨를 잡았다.

“당장 일어나.”

제발 꺼져. 네 그 끔찍한 어미랑 아비랑.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여기 다들 모여 있었군.”

비틀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술에 취한 심창진이었다. 그는 풀린 눈동자를 굴리다 피식 웃었다.

“보기 좋은 부녀의 모습이야.”

“아빠…….”

채연이 젖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빠라는 호칭에 창진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는 시선을 애써 국현에게로 돌렸다.

“죽기 전에 유언 하나 남기려고 왔어.”

“무슨 말이지?”

“사국현. 네가 이겼어.”

연정이의 마음에서도, 이 지긋지긋한 열등감에서도.

“악당은 이만 꺼져 주지.”

창진은 항복의 제스처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니 심채연과 사국현의 모습이 더 선명히 느껴졌다.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저 아이가 제 딸이길 진심으로 바랐던 적이 있었다. 그랬더라면, 정말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병신같이.”

이제 와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애초에 자신의 아이였다면 최연정은 처음부터 이야기했겠지.

하지만 끝끝내 말하지 않다가 이제 와 심채연이 제 딸이라고 말하는 건 지독한 애증의 욕심으로밖에 안 보인다.

그러니까 최연정의 날개를 기어코 꺾어 버려야지. 나도 같이 몰락하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