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도운의 직감은 곧 경식의 직감이기도 했다. 제인을 일컫는 아가씨란 호칭에 도운은 다급히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뒤를 교진이 쫓아오며 물었다.
“왜 그러는 건데.”
“이제야 모든 서사가 맞아. 이름이 바뀐 거였어.”
“이름?”
“심채연이 장난질을 한 거라고. 진짜 채연이는 제인이었어.”
그래서 그동안 심채연의 이름에 그렇게 예민하게 군 것이다.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며.
도운은 긴 다리로 옥상 계단 서너 개를 한 번에 뛰어 올랐다. 결승선이 코앞인 사람처럼 손을 먼저 뻗어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다.
“제인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갈 때였다. 훅 불어오는 따뜻한 5월의 봄바람이 재회의 숨결을 흘려 보내 주었다. 도운은 멀지 않은 곳에서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빠가…….”
“…….”
“아빠가 얼마나 미웠니…….”
꽤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음에도 두 사람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서로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걸음이 멎어 버린 도운의 뒤에서 교진도, 경식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로소 맞물린 시계태엽.
그래, 조급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안타깝게 흐르는 제인의 눈물을 한동안 바라보던 도운은 뒤를 돌았다.
“우린 잠깐 빠져 주죠.”
사랑보다 더 진한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을, 도운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 *
“내가 얼마나 원망스럽고, 밉고…….”
한심했겠어…….
치솟는 감정이 목을 콱 틀어막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전부 미안한 것들뿐이라 그마저도 국현은 염치가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길.
신에게 간곡히 빈 국현은 제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경련하는 손끝이 제인의 뺨에 닿았다.
“아빠.”
그 마음을 아는 제인은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더 깊숙이 묻어 보았다.
“저 여기 있어요.”
지금처럼 잘 자랐다고 말해 주는 것 같은 생생한 촉감. 안면 근육이 사정없이 이완되며 눈 밑이 마구 떨려 왔다.
그것을 제 의지로 막아낼 수 없는 국현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그것이 눈물의 시작이라는 걸 자신의 흐느낌으로 알아차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늘 상상으로나마 그려 보던 얼굴이었다. 보육원 봉사를 할 때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을 보며 제 딸의 이목구비는 어땠을까, 하고 그리워하던 지난 20년이었다.
그런 딸이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으니, 국현은 자신을 닮은 눈을 바라보는 것도 죄스러웠다.
처절하게 우는 것만이 속죄인 것처럼 국현은 눈물을 쏟았다. 국현을 다독인 건 손에 닿는 따스한 감촉이었다.
“아빠.”
다정한 호칭에 국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제인은 눈물을 닦아 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아봐 주길 기다렸어요.”
“…….”
“너무 오래 기다려서, 외로웠구요.”
울지 않으려고 찡그린 채 휘어진 눈에 원망은 없었다. 도리어 미워하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다는 다정한 딸의 한마디에 국현은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내 딸.”
국현은 제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마른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갓난아기 시절, 한 번도 받쳐 주지 못한 머리를 어루만졌다.
“채연아. 우리 채연이.”
울컥, 터져 나온 이름에 제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국현을 잠시 밀어냈다.
“아빠한테 선물 받은 이름은 도둑질당한 지 오래예요. 전 제인이로 살고 싶어요.”
서도운이 불러 주어 비로소 그녀의 것이 된 손제인이란 이름. 다시 태어난 오늘, 국현에게도 꼭 그 이름으로 불리며 평생을 살아가고 싶다.
국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의 뺨을 매만지는 투박한 손이 흐트러지는 이성을 다잡았다.
“그래, 어떻게 된 거야. 왜 네 이름이 제인으로 되어 있는 거야.”
“그건 당사자한테 묻는 게 빠를 것 같아요.”
제인은 국현의 손을 꼭 잡아 이끌었다.
“심채연하고 원장님이 전부 설명해 주실 거예요.”
* * *
채연이 이 실장과 만난 곳은 친자 검사 기관 앞이었다. 이 실장은 며칠 사이에 빼빼 마른 채연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창진의 칫솔을 조용히 건네는 것뿐이었다.
“안 가져다주실 줄 알았는데.”
건조한 음성은 그녀의 아픈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실장의 눈빛엔 연민이 절로 묻어 나왔다.
“전 아가씨가 회장님 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회장님께서 하루빨리 정신을 바로잡으시길 바라고 있고요.”
“……엄마랑 아빠는요?”
입을 일자로 다문 이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채연은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를 거칠게 끌고 가던 아빠. 옷이 찢어지던 소리. 집착에 눈이 멀어 마음보다 몸을 가지려던 폭력적인 행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논란에도 대응조차 없는 금도.
“이 실장님.”
“말씀하십시오.”
“남의 인생을 망치려면 내 인생을 망칠 각오까지 해야 했어요.”
그걸 이제 알아 버렸다.
“엄마랑 아빠. 그리고 저는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았어요. 그게 사랑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인 줄 알았고요.”
아빠는 엄마에게서 사국현과 두 아이를, 엄마는 사국현에게서 아이를, 그리고 저는 제인이에게서 이름과 서도운을 빼앗았다.
준 것도 없이 탐하기만 한 사람들의 결말에는 이토록 황량한 진실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아가씨께선 사국현 회장이 아닌 심 회장님을 택하셨죠.”
그러니 사국현이 아닌 심창진과 친자 검사를 한다는 건 모든 걸 바로잡고자 하는 채연의 마지막 깨달음이었다.
채연은 지퍼 백에 담긴 칫솔을 내려다보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아빠랑 저랑 너무 닮았잖아요. 원하는 게 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게.”
“아가씨…….”
“그러니까 이 실장님도 얼른 발 빼세요. 이제 다 끝났으니까.”
채연은 그대로 검사 기관으로 들어갔다. 안내에 따라 자신의 머리카락과 창진의 칫솔을 제출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2주가 걸린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들었다.
모든 걸 확신한 그녀는 결과를 받을 주소를 한남동으로 적었다. 이걸 보고 부디 아빠가 심채연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한 번만 인정해 주기를.
* * *
그 뒤에 멍하니 돌아온 곳은 다시 제인의 집이었다. 하지만 아침과 달리 물건이 빼곡했던 제인의 집은 새집처럼 말끔하고 텅텅 비어 있었다.
“채연아…….”
멍하니 서 있는 채연을 원우가 한가득 안아 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인이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어.”
부모도, 집도, 돈도. 이를 앗아 간 채연이 제인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것들에는 그 어떤 무게조차 없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원우 너라도 있는데.”
그 시절의 제인이는 어떻게 버텼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찔해진 채연은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
다시 한남동으로 향한 이 실장은 창진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친자 검사를 하셨습니다.”
회장님과요.
뒷말은 부디 부모로서, 아비로서,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믿었다. 이 실장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담배만 뻑뻑 피워 대는 창진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여 마지막 인사를 했다.
“채연이도 결국 당신을 버렸네요.”
다이닝 룸에서 위스키병을 손에 든 연정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이 실장마저 떠난 자리. 유독 고요하고, 막장이 되어 버린 집 안을 훑어보던 창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어지러웠고, 두 다리엔 자꾸만 힘이 빠지려고 한다. 그래도 악착같이 힘을 낸 창진은 화장실로 당도했다.
눈길은 곧장 가지런히 꽂힌 칫솔로 향했다. 머릿속은 암전이 되어 버렸다. 이 실장이 끼워 둔 새 칫솔이 창진의 눈빛을 죽게 했다.
세면대를 짚어 억지로 버티고 있던 두 다리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 다 같이 죽자, 연정아.”
네 말대로 정말 다 끝났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생, 억지로 데리고 온 너라도 내 곁에 박제해야겠다.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금도고 뭐고. 이제 다 필요 없어졌다.
때마침 핸드폰이 웅웅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창진은 사건이 터진 후 처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심 회장님, 접니다. 하태웅.
“마침 전화 잘했군.”
사포처럼 갈라진 목소리를 듣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하태웅 기자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말이야.”
끝은 어떻게든 다가올 것이니, 앞당기는 것쯤이야.
창진은 고개를 젖혔다. 문득 화장실 안에 널브러진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다고 느꼈다.
* * *
그 후에도 국현은 제인을 하염없이 안아 보고 시선으로 헤아렸다. 당장 보육원으로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제인은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그러고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도 원장님을 원망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도 했다. 제인은 곧장 옥상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문득,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걸어도 갈 곳이 생겼다는 유대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늦은 저녁, 제인은 심채연이 있을 집 대신 에덴 에리스로 향했다. 조금은 서툴게. 조금은 빠르게. 서서히 걷던 걸음은 어느새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