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손제인. 그 익숙하고도 영악했던 년이 사국현의 또 다른 아이였다니.
“아니지, 배신은 사국현과 최연정으로부터 시작된 거지.”
“회장님, 움직이셔야 합니다. 지금 이러실 때가…….”
“됐어요, 이 실장.”
그때였다. 이 실장의 등 뒤에서 연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튼 이 실장의 눈은 그대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망했으니까. 나도, 저 사람도.”
“사, 사모님.”
침실 문가에 기대어서 얇은 슬립만 입고 있는 연정의 피부에는 손자국과 키스 마크가 가득했다. 가히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법한 모습에 이 실장은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 그의 어깨가 우악스럽게 돌아갔다.
“이 실장, 눈은 고정하라고 있는 게 아니야. 제대로 뜨라고 있는 거지.”
어느새 다가온 창진이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연정은 그런 창진을 비웃었다.
“그러게, 감당하지도 못할 거 날 왜 이렇게 만들어 놔요?”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그래서 어제 다 이야기했죠. 손제인이 사국현의 딸이고 채연이가 당신 딸이라고.”
“웃기지 마! 나하고 사국현 사이를 저울질하려는 네 속셈인 거 모를 줄 알고!”
창진의 연락 두절 이유를 알아 버린 이 실장은 지금 이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미쳤다. 저 둘은 그냥 돌아 버렸어.
심창진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최연정과 그런 최연정을 침실로 끌고 가는 심창진. 침실 문이 닫히고, 듣고 싶지 않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혼란스러워하는 이 실장을 구출한 건 짧은 진동이었다. 그는 다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이 실장님, 부탁이 있어요. 지금 당장 아빠 몰래 아빠 칫솔 좀 가져다주세요.]
심채연이었다.
* * *
국현은 금도의 이사진들과 조찬 모임을 했다. 심창진의 각종 비리를 공표한 국현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이 이상은 말 안 해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금도에서 그만 발을 빼고 자신에게 붙으라는 뜻이다. 이사진들은 서로 시선을 어지러이 마주치며 헛기침을 했다.
국현이 말하는 달콤한 배신도 끌리지만, 만에 하나 심창진이 재기하는 순간 그들의 목숨도 끝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하얀 이사진 한 명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랑싸움이라고 하기엔 너무 방대해. 이러다 금도가 치고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러나?”
다들 공감한다는 눈빛으로 국현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국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럴 수는 없겠죠. 그런데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 봅니다. 소문으로만 돌고 있던 최연정과 제 아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뭐,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방금 막 서울 병원 김정배 이사장이 병원 진료 유출 건에 대해 인정하고 인터뷰를 했을 겁니다.”
그 이사진들은 뒤에 있던 제 비서들에게 손짓하기 시작했다. 비서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이미 기사엔 서울 병원 김정배 이사장의 인터뷰가 빼곡했다. 내용은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원 종사자 한 명이 산부인과 기록을 유출. 유출된 사람은 하필 금도 그룹의 최연정이며 그녀의 진료 기록 중 두 아이의 출생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심창진과 사국현 각각의 아이라는 것.
“이게 무슨.”
“이게 정말 사실이오?”
모두 웅성거리자 국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내 아이가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심창진과 최연정이 그렇게 꾸며 냈으니까요. 그런데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고, 그 아이를 찾았습니다.”
“그 아이는 누군가.”
“내 곁에 아주 가까이에 있었죠.”
내가 지어 준 이름처럼 체리를 좋아하던 아이. 그 아이, 손제인.
“……배 실장.”
“예.”
“여기 있는 체리 셔벗 좀 포장하지.”
하필 조찬 모임을 가진 이곳, 고급 한식당에서는 후식으로 새빨간 체리 셔벗이 나왔다. 얼른 그 아이에게 달려가라고 하는 것처럼.
국현은 이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검은 양복을 입은 이사진들에게 선포했다.
“난 여러분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내 목적은 다수의 무너짐이 아닌 소수의 파국이니까.”
그러니까, 심창진과 최연정 두 사람의 파국.
“지금 당장, 금도에 있는 주식과 지분 모조리 빼서 공중분해시키세요. 도망갈 기회, 줄 때 잡으시라고.”
너희는 이제 끝이야.
* * *
키스가 끝난 후에도 도운은 제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입술이 맞붙지 않으니 손을 잡고 일했고, 드문드문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쓸기도 했다.
움찔해서 집중력이 흐려진 사람은 제인뿐이었다. 도운은 그게 정말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처럼 서류에만 시선을 꽂고 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제인은 도운의 치열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회장님 현재 이사진들과 조찬 모임 끝나셨습니다.]
[금도 주가 빠르게 하락하는 중이야. 이젠 너하고 회장님 손에 달렸어.]
차례대로 오는 배 실장님과 교진 씨의 문자. 그리고 서류를 읽는 듯싶다가도 펜을 빙그르르 굴리며 써 내려가는 서도운의 단정한 글씨까지.
서, 사, 서, 사. 손제인, 심채연.
이름의 상관관계를 맞추듯 도운은 자신이 쓴 글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제인이 슬쩍 손을 빼도 모를 정도였다.
그걸 본 제인도 이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따라오려는 초코에게 쉿, 하고 주의를 준 뒤 몰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누가 들으면 안 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옥상을 택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제인은 곧장 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의 끝은 침묵으로 다가왔다.
“선배 도움이 필요해. 소식 들었다시피 지금 당장 심창진하고 가장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선배거든.”
태웅과 다시는 말도 섞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그들이 더 확실히 짓밟히기 위해선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 태웅은 무거운 음성을 쌓아 올렸다.
-네 말이 맞았어. 난 감당 못 해.
“…….”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
제인이 네 부탁대로. 뒷말을 삼킨 용건은 간단하게 끝났다. 핸드폰을 스르륵 내린 제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원장님은 곧 아빠가 그녀를 알아볼 거라고 했다. 서도운도 그러기 위해서 노력 중이고.
점점 파헤쳐지는 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주먹을 쥔 제인은 뒤를 돌았다. 그러나 들어 올린 시선은 금방 흠칫 굳어 버렸다.
“다급히 올라가길래 따라와 봤는데.”
“…….”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나?”
사국현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었다.
* * *
끊임없이 생각했다. 서, 사, 서, 사. 딱 이름 한 끗 차이.
도운이 국현의 호적에 올라가면 성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처럼 회장님이 지어 준 체리 연정이라는 채연의 이름이 왜 심채연에게 갔냐고 추측한다면.
누나의 이름을 몰랐던 나. 손제인인 척 이름을 말했던 심채연. 거짓된 출생.
한마디로.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심채연.”
전부 심채연의 세 치 혀에서 놀아났다는 것. 그러니까, 자신이 알고 싶었던 진짜 누나의 이름은.
“제인아.”
도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인은 옆에 없었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채연아.”
누나의 이름을 물어보러 갈 차례다.
* * *
“먹어 봐.”
이야기하자던 국현은 뜬금없이 보냉 봉투에 포장된 체리 셔벗을 건넸다. 심장이 자꾸 술렁이려는 제인은 국현이 준 체리 셔벗을 마다하지 않고 푹푹 떠먹었다.
“늘 체리나 체리 에이드만 먹었지, 아이스크림은 처음이에요.”
“입에는 맞나?”
“네, 맛있어요.”
그 후에는 무거운 침묵이 일었다. 분명 옥상에 감도는 날씨는 5월의 포근한 봄 날씨인데, 두 사람의 공기는 여름보다 무거웠고 눈가는 겨울처럼 시큰했다.
그래도 다가온 이 계절, 국현은 늘 고대했던 이 계절을 빌려 입을 열었다.
“최연정은 내 아이를 임신했을 때 체리를 잘 먹었어. 그래서 내 아이도 틀림없이 체리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니까, 그걸 왜 이제 알았을까. 체리를 좋아해 눈에 띄는 게 아니라, 제 본능이 알려 주는 거였는데.
체리를 좋아하고, 왼손잡이인 5월생의 내 아이.
“채연아.”
“…….”
제인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손을 우뚝 멈춰 세웠다. 셔벗이 너무 차가웠던 탓일까. 겨울의 시큰함을 몰아낸 뜨거운 열기가 눈가에 자꾸만 몰렸다. 제인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내 마음속에 있다던 너를…… 이제야 보는구나.”
제인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순간, 시야가 밝게 갰다.
“……아빠.”
비로소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눈물을 흘리는 국현이 보였다.
* * *
회사 곳곳을 뒤져도 제인은 보이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이 든 도운은 제인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마저도 받지 않았다.
“어디 있어.”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탄 도운은 넥타이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어 뺐다. 헝클어진 퍼즐 조각을 비로소 맞추게 되자 얼른 제인을 마주하고 싶었다.
몸이 으스러지게 안아 주든, 숨 막히게 키스하든. 제인을 보면 당장 해 주고 싶은 말과 행동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가 봐야 할 곳은 회장실이다. 금도 이사들과 조찬이 끝난 국현이 제인을 만났다면. 긴 이별을 했던 부녀가 비로소 만났다면. 지금쯤 두 사람은 긴 공백의 회포를 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함께 있던 경식과 교진이 도운에게 다가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전무님?”
“너 뛰어왔어? 옷은 왜 이래?”
“제인이 봤습니까?”
제인이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그들이 먼저 이야기를 했을 텐데. 도리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여기도 아닌가 보다.
그럼 다음은 어디지.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경식이 말했다.
“아까 회장님께서 옥상으로 가셨습니다. 아가씨를 따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