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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60화 (60/79)

60화.

도운을 태운 고급 세단이 부드럽게 멈췄다. 주차를 마친 교진은 조수석에 놓인 태블릿으로 메일함을 하나씩 확인하며 보고를 이었다.

“지금 우리 쪽에 호의적인 언론사들이 슬슬 심창진 불법 투기랑 차명 계좌, 돈세탁 등과 관련된 비리 기사 내고 있어. 이거로 심창진 꼼짝도 못 하게 발목 잡으면 될 것 같아.”

“그렇지. 근데 저건 또 뭐야?”

“뭐가?”

도운은 창밖에 있는 익숙한 오토바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일찍이 제인을 데리러 온 그의 잇새에서 바람 같은 웃음이 터졌다.

잠도 못 자며 머리 굴리느라 눈이 어떻게 된 줄 알았는데.

“뭐야. 저거 지원우 오토바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 여자 집에 도둑년 한 마리가 들어온 것 같네.”

“설마 심채연?”

“어, 집 뺏길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남의 집까지 뺏으려 드네.”

도운은 볼 안쪽을 혀로 쓱 쓸었다. 지극히 불량스러운 모습은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일 하나만 더 하자, 교진아.”

설마 싶었던 교진은 앓는 소리를 참았다. 지금도 일이 넘쳐 죽을 지경인데,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지만, 그래. 내 친구를 위한 일이니까.

“말해.”

“제인이 집 빼. 단순 변심이라 계약금 안 준다고 하면 그냥 내 돈으로 처리하고.”

“알았다, 알았어. 이 지독한 놈아. 더 이어서 이야기해도 되냐?”

“어.”

도운은 교진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제인이 나올 공동 현관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쨌든 기사 터지면 심창진 쪽에선 꼼짝 못 해. 사람 붙여 놨는데 집에서 움직임이 없더라. 그 성격에 최연정 감시하고 있는 거겠지.”

“회장님은?”

“금도 쪽 이사들 만나서 구슬리고 있어. 김정배 입은 헬리콥터냐? 아빠한테 들어 보니까 회장님이 만나기도 전에 아이 얘기 알아서 떠벌려서 쉽게 넘어오는 것 같대.”

“이래서 신은 존재한다니까.”

일이 아주 술술 풀린다. 냉소적이었던 눈빛도 일렁인다. 오늘도 청초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의 여신이 도운의 시야를 확 밝혔다.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나가 보폭을 넓혔다.

“까꿍.”

“깜짝이야.”

불시에 앞을 가로막자 제인의 작은 몸이 도운에게 콩 부딪혔다. 도운은 손을 뻗어 제인의 허리를 감았다.

“전무님이 여긴 왜…….”

귀신같이 나타난 남자의 등장에 놀란 심장은 쿵쾅쿵쾅 뛰어 댄다. 자연스럽게 넓은 가슴팍에 올라간 손도 떨리고, 훅 밀려오는 향도 간지럽고, 깊숙이 들어오는 눈빛도 따가워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누나. 뭘 모르나 본데,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한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아.”

도운은 피곤한 눈을 웃음으로 능숙하게 감추었다.

“나한테 1순위는 손제인인데, 일 따위가 중요해? 손제인이 더 중요하지.”

아…….

담백한 말투는 언제나 뭉근한 감동을 몰고 온다. 심채연과 지원우 때문에 단단히 열 받아 있는 상황에서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기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리 와. 안아 보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회오리친다.

위로해 주듯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 턱 끝에 닿는 다부진 어깨, 그 어떤 역경이 찾아와도 다 막아 줄 것만 같은 든든한 품.

“전무님.”

“응.”

제인은 아래로 떨어진 손을 들어 도운의 허리에 살포시 얹어 보았다.

“보고 싶었어요.”

네가 그리웠던 나. 네가 필요했던 낮.

작았던 서도운은 어느새 나한테 이만큼의 존재감이 됐구나.

제인이 도운을 애틋하게 올려다보았다. 도운은 표정만으로도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커다란 손이 제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럼 앞으로 보고 싶어 할 일 없게 같이 살까? 내가 이 집 처리해 둘게.”

다가올 집 처분에 대한 은근한 통보였다. 저 집에 있을 심채연과 지원우를 떠올린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

“뭔데? 다 해 줄게.”

짙어진 시선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꽁꽁 매듭짓는 눈빛에 마음도 결연해진다.

“아무 생각이 안 날 만큼 일 좀 안겨 주세요.”

절대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을 거야.

도운은 엄지로 제인의 뺨을 쓸었다.

“잘됐다. 마침 손제인을 위한 일이 있는데.”

키스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아 낸 도운은 제인의 입술을 엄지로 눌렀다. 뭐든 다 해 주겠다는 맹세의 도장이었다.

* * *

“이건…….”

“그래, 네가 말한 걸 디자인으로 뽑아낸 거야.”

일을 달라고 하자 도운은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을 안겨 주었다. 도운의 손에서 팔랑거리는 종이에는 일전에 제인이 말한 인테리어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국현이 말한 것처럼 정말, 고작 손바닥에 그린 삐뚤빼뚤한 그림을 도운은 정확히 이해하고 구현해 낸 것이다.

“난 내 것이 아닌 걸 빼앗을 생각이 없어. 이건 오로지 손제인 손에서 탄생한 손제인 거야.”

“이걸 그럼 저더러 완성하라는 건가요?”

“이해가 빠르네.”

씩 웃은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이 살을 더 붙일 수 있도록 넌 다음 회의까지 이 인테리어에 대한 발표를 완벽히 준비해 둬.”

제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디자인 종이를 하나씩 들춰 보았다. 깜빡이는 눈 사이로 그녀가 바랐던 인테리어가 빼곡히 들어찼다.

심장이 무섭도록 뛰어 집중되지 않았다. 늘 빼앗기기만 했던 인생이었는데.

이번엔 빼앗기지도, 빼앗지도 않고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 종이를 내려놓은 제인은 고개를 들었다.

“전무님.”

“응.”

“고마워요.”

목 끝을 간질이는 조각을 언어로 뭉쳐 냈다.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도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반달이 된 제인의 눈을 보자 가슴이 콱 아리기도 하고 심장이 내려앉기도 한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제인의 옆자리로 향한 상태였다.

“심장이 너무 뛰어.”

병이지, 병. 손제인을 사랑하게 된 지독한 병.

“수혈이 필요해.”

그러니까 치료해 줘. 키스로.

몸을 기울인 도운은 제인의 입술을 삼켰다. 짙은 숨이 얽히고, 낮게 신음하는 제인의 목소리가 도운의 목을 타고 흘렀다.

그녀가 너무 예뻐 참을 수가 없었다.

* * *

“내부 상황은 어때.”

-이사회가 전부 사국현의 조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이대로라면 금도가 위험합니다.

다급한 음성을 들은 이 실장은 혀를 찼다. 하루아침에 금도의 수장인 창진의 비리가 세상에 뿌려졌다. 전부 이를 갈고 있던 사국현과 서도운의 짓이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이 실장 또한 지금 차 안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창밖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창진의 비리가 까발려지면서 이미 집값이 하락했고, 어마어마한 정재계인이 거주하고 있는 한남동 고급 주택 부지에는 수많은 현수막이 붙었다.

<금도 그룹 심창진을 퇴출하라!>

<청렴한 한남동 주택 부지를 더럽힌 이방인!>

창진과 관계가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등을 돌리는 것이고, 관계가 없는 거주자라도 집은 곧 명예와 관련된 재산이니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봐 그를 내쫓으려는 것이었다.

-기사는 최대한 막고 있지만, 한계입니다. 김정배 서울 병원 이사장의 인터뷰까지 떠 걷잡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럼 이제 과거의 그 진실마저 세상에 알려졌다는 말인가.

-이 실장님, 회장님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지금 연락도 두절되셔서…….

“우선 내가 회장님을 찾아뵙도록 하지.”

뒤에서 수습하는 직원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이 실장의 눈 밑 또한 지난 며칠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해 거뭇했다.

틈을 주지 않고 족족 터지는 불법 투기와 횡령, 비자금 조성과 마지막 피날레인 출생의 비밀까지. 이 모든 걸 해결하지 않은 창진은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금도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이 실장은 차에서 내렸다. 본채로 걸어가며 본 지원우의 별채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는 현관 벨을 누를 여유조차 없었다. 다급히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회장님.”

긴 현관 복도를 걷던 이 실장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물건들이 죄다 뒤엎어지고 깨진 거실 광경을 보며 숨을 삼켰다.

“회장님, 이게 무슨…….”

연락 두절이 된 창진은 거실의 광경처럼 난장판이 된 채 술에 찌들어 있었다. 5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몸엔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그는 독한 보드카를 병째 잡아 들이켜고 있었다.

곧 흐리멍덩한 눈이 이 실장을 향했다.

“뒤에서 관망하기 좋아하는 김정배가 이번엔 머리 좀 썼어.”

“…….”

“보안 좋기로 소문난 서울 병원의 진료 기록이 유출돼? 그것도 최연정의 출산 기록만?”

혀는 알코올에 잠긴 듯 불분명한 발음을 내뱉었다. 그래도 사태 파악은 한 모양이다. 이 실장은 정신을 잡고 말했다.

“서도운과 사국현이 뒤에서 주무른 모양입니다. 진료 기록을 유출했다던 내부 인사는 아마 김정배가 만든 가상의 인물인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일전에 회장님에 대한 원한으로 에덴과 손을 잡은 모양입니다.”

“채연이는.”

“……지원우와 함께 손제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두 짐승에게 배신당한 창진은 입가에 보드카를 질질 흘리며 실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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