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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59화 (59/79)

59화.

마무리가 불안한 하루였다. 원장님과 헤어지고 늦은 시각이 됐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서도운의 전화도 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망설이던 제인은 핸드폰을 들었다. 제인이 도운에게 처음으로 거는 통화였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여름밤 풀벌레의 울음처럼 긴 신호음이 지난 뒤, 그토록 기다렸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오래 살다 보니 손제인이 나한테 전화를 다 하네.

정말 기분 좋은 모양인지 피식거리는 웃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현실이에요. 이사는 잘하셨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죠.”

-제인아.

“네.”

-나 집 잘 들어왔어.

제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다 안다는 그 말투가 모든 걱정과 혼란을 말끔히 씻겨 내려가게 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뭘 어렵게 돌아가.

“…….”

-그러게, 나랑 같이 살자니까.

서도운은 제가 이렇게 걱정할 줄 알고 같이 살자고 한 걸까. 그는 침묵 사이에 계속해서 끼어들었다.

-누나 곧 생일이더라?

“생일 선물이라도 주시려구요?”

-당연하지. 다 줄게, 제인아.

그 말에 담겨 있는 무게에 잠시 언어를 잃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뒤늦게 정신 차린 혀에는 또다시 자물쇠가 채워졌다. 끝이 갈라지다 못해 진지해지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물씬 풍겼다.

-돈도, 명예도 다 줄게. 대신 넌, 나한테 너를 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왜 없어. 내가 손제인이면 된다는데.

오늘 하루 참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밥은 먹었는지. 그리 바삐 간 곳이 보육원이었는지. 더 나아간 질문을 하자면 그래서 뭘 좀 알아냈는지. 그녀를 알아본 것인지.

하지만 고작 저 한마디에, 늘 자신감 넘치고 여유로운 확신에, 묻지 않아도 그 대답을 알 것만 같았다. 제인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좋네요. 그럼 제 생일까지 기다려 볼게요.”

-이번엔 꼭 기다려.

내가 널 찾을 거니까.

뒷말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 그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한 달이면 되려나. 어쩌면 일주일일 수도 있겠다.

기다림이 설렘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경험한 제인은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은 씻고 잠을 자야지. 자고 일어나선 출근을 하고, 서도운의 얼굴을 봐야지.

그렇게 침대에 누워 가물가물한 의식을 완전히 끄려고 할 때였다.

딩동.

누군가 현관 벨을 눌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뇌리에 반짝 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서도운이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반가운 걸음으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누구인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연 건 큰 실수였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제인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지원우 씨가 여긴 왜…….”

“염치없지만, 채연이를 도와주십시오.”

제인의 한쪽 눈이 찡그려졌다.

“염치없는 거 알면 돌아가세요.”

문을 매몰차게 닫으려던 때였다. 도통 보이지 않았던 작은 몸이 불쑥 튀어나와 현관문을 잡았다.

“채연아.”

또다시 간절한 눈으로 그 이름을 입에 담는다. 겨우 펴낸 마음이 구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 내가 그 이름…….”

“넌 알고 있었어? 너랑 내가, 심창진 자식이 아닌 거.”

닫으려고 힘을 준 손에 제어가 걸렸다.채연은 찰나의 반응을 본 뒤 망연해졌다.

“넌 알고 있었구나…….”

제인은 채연의 울 것 같은 표정에 어이가 없었다.

얘 지금 뭐라는 거니?

“그럼 넌 그걸 모르고 있었어?”

묻고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심채연은 정말 충격이라도 받은 듯 휘청거렸다.

연약하게 쏠린 몸은 지원우의 품에 가련히 기대는 꼴이 되었다. 제인은 채연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설마……. 정말 몰랐던 건가? 그동안 금도에서 살면서, 정말 내가 심창진과 최연정의 딸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데 요지를 잘못 짚었어. 심창진 딸이 아닌 건 나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나 해서 말했더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나 보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눌러 참은 제인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채연은 닫히는 문을 비집고 들어와 소리쳤다.

“채연아!”

“그렇게 부르지 마, 제발!”

결국, 답답함이 흘러넘쳤다. 몸을 홱 돌리자 순진무구하다 못해 등신 같은 얼굴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말 좀 해 줘.”

평생을 제인과 금도 그룹의 친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녀가 창진을 닮은 것처럼, 제인은 연정의 얼굴을 닮았으니까.

왜 제인이는 보육원에서 데리고 오지 않냐고 묻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아빠는 무섭고, 엄마는 무관심하니까. 또 그녀가 제인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까.

그런데 심창진의 말로는 제가 본인 자식이 아니란다. 그런데 또 최연정은 그녀가 그들의 자식이 맞다고 한다. 그런데 제인이는 다시 본인이 금도의 핏줄이 아니라고 한다.

혼란에 더해진 혼란은 사고 자체를 붕괴시켜 버렸다.

“너도 저번에 들었잖아. 사국현한테 아이가 있었다고. 그게 나야. 최연정이, 심창진이랑 사국현 사이에서 각각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너랑 나라고.”

“거짓말하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아빠는 내가 사국현의 아이랬어.”

“그렇겠지. 심창진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무슨 말이야?”

“최연정이 모두를 가지고 논 거야. 심창진의 아이인 너를 가진 상태로 떠나서 몰래 너를 낳고, 그 후에 사국현의 아이인 나를 낳은 거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심창진은 우리 둘 다 사국현의 아이라고 생각한 거고.”

왜? 발작적으로 떨리는 속눈썹이 이유를 묻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한심해 보였다.

“최연정이 아무 말도 안 했기 때문이야. 네 아빠는 집착과 질투에 눈이 멀어 너를 알아보지 못한 거고.”

“……거짓말.”

“거짓말은.”

제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새하얀 얼굴이 폭우를 쏟아 내면서 고개를 젓는다. 참 웃겼다. 애초에 이 모든 악연의 시작은 그들이 행한 악행이지 않나.

“네가 네 인생에 친 거고.”

그러니 알량한 동정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 미안하지도 않다. 오히려 이렇게 설명해 주는 자신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될 뿐.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언제까지 그렇게 등신으로 살 거니?”

제인은 매섭게 혀를 놀리며 무너질 것 같은 채연을 응시했다. 이제 제발 세상을 똑바로 봐, 하고 채찍질하는 것처럼.

제인은 몸을 돌렸다. 그러기 무섭게 바닥으로 휘청이는 채연을 원우가 잡아냈다. 그녀는 원우의 팔을 그러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채연이가 사국현 아이일 리 없다고.”

같은 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채연이의 이름을 빼앗은 것도, 당연히 심창진의 아이라고 생각해서. 그럼 언젠가 저를 찾아 주고 우리가 다 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건데…….

“채연아.”

“원우야, 그래서였나 봐. 아빠가 그래서 나를 싫어했나 봐.”

“채연아, 제대로 생각해야 해. 정신 똑바로 잡아.”

“그래서?”

채연은 텅 빈 눈동자를 원우에게 맞췄다.

“그래서 나한테 남는 게 뭔데? 도대체 내 정체는 뭔데?”

껍데기만 가진 이의 영혼은 공허했다.

* * *

제인은 시큰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존재감은 새벽 내내 제인의 신경을 긁어 먹었다.

이름을 강탈하고 도망가더니, 뻔뻔하게 제 발로 찾아와 뿌리까지 내려 버렸다. 그 난리를 피우고도 나가지 않은 심채연과 지원우 덕분에 제인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방에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지만.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집주인인 자신이 피할 이유는 없다. 출근은 예정대로 해야 했으므로 준비를 마친 제인은 방문을 열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신발장으로 가려는데, 묵직한 그림자가 뒤따라온다.

“채연이는 울다 지쳐 잠들었습니다.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실 필요는 없었고요.”

“몰아세워?”

제인은 그 말을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한 뒤 요지를 정확히 짚었다.

“등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혼란스러워하길래 현실을 알려 준 건데. 그게 몰아세운 거라고?”

“……채연이한테는 너무 무서운 참사 같은 밤이었어요.”

꽉 눌린 제인의 목이 조여들었다. 지원우의 어깨 너머를 보니 어떻게든 일어나지 않으려고 소파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심채연이 보였다.

“심창진 새장 안에 갇혀 있는 것도 정도껏이에요. 지금 이렇게 도망쳐 와서 눈 하나 제대로 뜨지 못하면, 내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요?”

“…….”

“안 그래, 심제인?”

꾹꾹 눈물을 참고 있던 채연은 몸이 떨릴 정도로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 제인이. 내 이름은 제인이.

그게 현실이었다. 쾅, 하고 거세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채연은 느리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밤새 울고, 잠을 자지 못해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래도 중심, 잡아야지. 내가 택한 현실, 받아들여야지. 모든 걸 알아내야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채연아.”

“내가 누구 딸인지.”

결심을 내리자 창진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피처럼 진한 직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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