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58화 (58/79)

58화.

“그거 아십니까? 태생이 금수저인 사람은 삶 자체가 여유로워요. 열등감 따위는 느낄 여유가 없는 거죠. 그런데 최연정도 소유하고, 심채연마저 가둬 두는 우리 심 회장님은 뭘 가지셨나요? 가진 게 있긴 하신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이 개새끼야!”

“교진아.”

미쳐 날뛰는 창진이 도운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운은 들어온 교진에게 오른쪽 창호지를 턱짓했다.

“아직도 아둔하시네. 문 좀 열어 드려라.”

“무슨 수작이야! 어떤 개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분노로 붉어진 얼굴에 핏대가 섰다.

“직접 보시든가.”

거만한 도운의 턱짓에 창진은 서서히 열리는 창호지 문으로 시선을 박았다. 한편의 클라이맥스가 이런 걸까.

도운은 휘익, 휘파람이라도 불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덧 멱살을 쥔 손엔 힘이 탁, 하고 풀려 있었다.

“그러게, 눈 좀 뜨시라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충고했거늘.

도운은 넋 빠진 창진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놀리는 손길도 모르는지 창진은 남자에게 키스를 퍼부으려는 여자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최연정…….”

그제야 제 아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당, 당신이 여긴 왜.”

당황한 얼굴을 보자 현실이 들어찼다. 최연정이, 사국현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

내 눈앞에서.

새까만 분노가 시야에 몰려왔다.

* * *

옆방 상황을 알 리 없는 연정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기자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사국현의 입에서 기어코 나와 버리고 말았다. 손제인이란 이름이.

고작 그 세 글자만 들었을 뿐인데 연정은 숨조차 체하는 것 같았다. 턱마저 간헐적으로 떨렸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 모습은 수면에 떠오른 동요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의 이상 반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국현은 하하, 하고 맥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얼굴은 사나운 분노로 일그러졌다.

“최연정, 사람에게는 직감이라는 게 있어. 너도 지금 느껴지지 않나? 네가 망했다는 걸.”

“무슨 소리야. 나는 그저 당신이 손은선이랑 있다는 말을 듣고 보육원으로 간 것뿐이야.”

“은선 씨?”

그 순간 국현이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온기 하나 없는 음성은 가뭄이 나 갈라진 시멘트 같았다.

“네가 그 여자 이름을 왜 함부로 말해. 게다가 너.”

국현은 불꽃이 이는 것처럼 분노에 타오르는 눈동자로 연정을 보았다.

“지금 말실수한 건 알고 지껄이는 거야?”

팽팽히 조여든 근육은 이제 제멋대로 움직인다. 국현은 말을 하면서도 떨리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목뼈를 드러내며 숨을 헐떡이는 최연정은 지금 자신의 과거를 토로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은선을 보러 간 이동 경로를 알고 입막음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건 그동안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과도 같았다.

“은선 씨? 언제 봤다고 그 여자를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

하지만 연정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손제인이란 이름으로 심장을 선뜩하게 만들더니 이젠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몰아치려고 한다. 연정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그 여자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손제인이 내 애가 맞냐고!”

“맞든 아니든 어차피 밑바닥까지 간 인생이야! 적어도 당신하고 심창진은 내 남자여야 한다고!”

쨍한 목소리가 실내를 경악스럽게 할퀴었다. 국현은 눈앞에 있는 최연정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고작 이런 여자 하나를 잊지 못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 목을 맸다니. 허송세월하는 동안에도 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니.

국현은 끔찍해져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연정은 악다구니를 더욱 퍼부었다.

“만약 그랬다고 하더라도 손은선도 똑같은 여자야! 똑같이 협조하고, 묵인한 거라고!”

“은선 씨 함부로 욕하지 마. 미쳤어?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 너 같은 걸 사랑한 내가…….”

“하지 마!”

말하지 마. 그 이상 내뱉지 마.

자리에서 일어난 연정은 국현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뭐 하는 거야!”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입을 막고 싶었다. 최연정이 아닌 손은선을 담는 숨결을 빼앗고 싶었다.

무서운 집착에 그렇게 눈이 멀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편에서 짝짝짝, 하고 감탄 섞인 박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웃고 있는 서도운이 보였고, 얼굴이 검붉어진 심창진도 보였다.

“다, 당신이 여긴 왜.”

“왜.”

창진의 목소리는 갈라지다 못해 쇳소리가 났다.

“내가 방해꾼인가?”

연정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들켜 버렸고, 또 들어 버렸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멍해진 연정의 뒷덜미를 낚아챈 건 창진의 사나운 손바닥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당장 따라 나와.”

* * *

거실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던 채연은 숨 막히는 고요를 밟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일전에 아빠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사진까지 보여 준 마당에 거짓일 수 없겠지만.

정말 원우가 아빠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원우야…….”

차라리 네가 멀리멀리 도망가기를 바랐는데. 별채 앞에는 원우의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던 오토바이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원우임에도 채연은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울지마. 제발 울지마. 되뇌어도 손과 앙다문 입술이 덜덜 떨렸다.

별채 문을 힘겹게 밀어 열자 보이는 원우의 모습에 채연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원우……. 원우야.”

“채연아.”

“흐윽……! 여길 왜 와, 이 바보야!”

여길 다시 들어오면 어떡해. 입은 그렇게 소리치는데 팔을 원우를 간절히 끌어안았다. 네가 없어 무척 불안하고, 힘들었던 나날이었다.

그래서 네가 눈앞에 있으니 안심되지만, 또 너를 그렇게 만든 게 나인 것만 같아 미안했다.

“괜찮아. 난 다 괜찮아.”

등을 쓸어내리는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입술을 꾹 깨문 채연은 잠시 원우에게서 멀어졌다. 그녀는 원우의 티셔츠 끝을 잡았다.

“옷 좀 벗어 봐.”

부탁이 아니라 강제다. 채연은 원우가 입은 얇은 면 티를 목까지 들쳐 올렸다, 그러자 채 지워지지 않은 피멍이 그녀의 시야를 물들였다.

창진이 보여 준 사진과 다를 것 없는 원우의 상처였다. 널 이렇게 만든 게 정말 아빠야? 채연은 알면서도 울먹거리는 시선으로 물었다. 원우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상처받을지라도, 말해야 한다. 다시 눈을 뜬 원우는 말했다.

“맞아. 심창진이야.”

채연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심창진이 우리 관계 다 알고 있어. 여기서 나가야 해. 심창진 지금 제정신 아니고, 사모님까지 도청하고 있어.”

왜…….

멍하니 시작했던 질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별채의 살짝 열린 문틈으로 거친 고함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거 놔!”

“닥치고 따라와!”

어떻게든 버티려는 최연정과, 손목을 잡아끌다 못해 그녀의 온몸을 포박해 들고 걸어가는 심창진이었다. 채연은 집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다 원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선 여기 가만히 있어. 무슨 일인지 보고 올게.”

“채연아. 잠깐만, 채연……!”

고통스러워하는 원우의 신음이 얼핏 들린 것 같았지만 채연은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반대로 문을 닫는 동작과 집에 들어서는 동작은 조심스러웠다.

말다툼은 침실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사국현한테 가서 뭘 어쩔 셈이었어! 그동안 뒤에서 몰래 염문설 퍼뜨린 것도 당신이었나? 그 새끼가 도대체 뭐가 좋아서!”

“당신도 내가 이런 여자인 줄 알고 데리고 온 거잖아! 아이들을 버리게 종용하면서!”

……뭐?

채연은 천천히 침실 앞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충격적인 진실이 들려왔다.

“돈에 눈이 멀어 아이들을 버리겠다고 선택한 것도 당신이야! 내가 뭘 못 했지? 적어도 사국현의 아이인 심채연은 거두어들였잖아! 아니면 네 또 다른 애가 그리운 건가? 그 애를 찾아 사국현한테 돌아갈 셈이었냐고!”

사국현의 아이인 심채연.

내가, 아빠의 아이가 아니라고……?

“채연이는 당신 아이가 맞아! 진실을 말해도 안 믿잖아, 당신은!”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내 앞에서 사국현과 입을 맞추려고 했던 게 바로 너라고!”

“내 배를 갈라서라도 보여 줘? 채연이가 당신 씨라는 걸?”

“그래, 보여 줘. 낱낱이 보여 달라고!”

그 후에는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치고받고 몸부림치는 소리,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종국에는 혀 따위가 섞이며 몸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소리가 진공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아 채연은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였다.

잠깐만. 그럼 나는, 누구 아이인 거야……?

채연이 홀린 듯이 안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익숙한 손이 불쑥 다가와 채연의 입을 막고 몸을 끌어당겼다.

채연은 몸부림치며 반항했다. 하지만 끝까지 채연을 밖으로 끌고 나온 원우는 채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지금 들어가면 안 돼. 제발 너라도 정신 차려.”

“원우야…….”

버석하게 말라 버린 채연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원우는 참을 수 없었다. 낙엽처럼 맥없는 그녀를 간절한 마음으로 품에 끌어안았다.

“나는 뭐야? 나는 그동안 뭐였어……?”

사국현에겐 아이가 있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고, 아빠가 말한 게 진짜라면…….

나는, 이 집안에서 뭐였지?

허망한 결론 끝에 생각난 것은 제인이었다. 그녀가 이름을 훔쳐 가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그 아이.

채연은 영혼이 빠진 손을 들어 원우의 등을 툭툭 쳤다.

“제인이. 제인이한테 가자.”

그 아이라면 전부를 말해 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