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서도운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퇴근 시간이라 차와 지하철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바쁜 서도운이 떠오른다. 틈만 나면 갖은 수작으로 웃음을 흘렸던 서도운은, 아까 전 의문의 통화를 받고 표정을 무섭도록 굳혔다.
바로 알 수 있었다. 과거의 덜미가 잡혔거나 일이 틀어졌거나.
분명 많은 것을 눈치채고 알아내려는 서도운은 굳이 그걸 제인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마치 거대한 선물을 준비한 뒤 나중에 짠, 하고 보여 주려는 것처럼.
그래서 지금 서도운은 뭐 하고 있으려나. 밥은 먹었으려나.
생각은 다시 원점이다. 한참 손댈까 말까 고민한 이삿짐도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옷 정도는 우렁각시처럼 말끔하게 정리해 주고 올걸. 명색이 에덴 호텔 전무인데 구겨진 슈트를 입으면 웃기잖아.
우스운 생각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을 때, 꿈으로 보육원이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원장님을 뵙고 난 후 다시 에덴 에리스로 가 봐야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5월, 자꾸만 따뜻해지는 봄바람이 입꼬리마저 간질인다.
제인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원장님께 웃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지, 하고 생각하곤 원장실 문을 열었다.
“원장님, 저 왔…….”
“……제인이 왔니?”
“원장님, 이게 무슨.”
다짐은 샛노란 액체에 흠뻑 젖은 은선을 보고 말끔히 휘발됐다.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은 제인이 얼른 은선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제인은 급한 대로 물티슈라도 뽑아 은선의 끈적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은선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제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초연한 그녀의 눈빛 속에서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아까 국현 씨와 도운이가 이곳에 왔어. 그리고 최연정까지.”
제인의 눈이 번지듯 커다래졌다. 곧 더 말하라는 듯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선은 힘주어 이야기했다.
“국현 씨가 알아챘어. 당신 딸이 살아 있다는 걸.”
“그럼…….”
“난 얘기했어. 채연이도, 너도, 이 보육원에서 살았었다고.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타난 최연정이 내 말을 막아 세웠어. 아마 국현 씨랑 지금 이야기 나누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저 오렌지 주스로. 제인의 시선이 쓰러진 유리컵으로 향하자 은선은 그녀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쏠려 가던 제인의 화는 덕분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제인아.”
“네.”
“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무서워하지도 말고, 네 가슴을 치며 화내지도 마. 정작 널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 곧 아빠가 널 알아보실 거야.”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온 신경과 근육이 심장에 쏠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원인 모를 불안감에 제인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먼저 문자 내용을 확인한 은선은 경악을 삼키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문자를…….”
[네 엄마 간수 잘해. 너나 손은선이나 다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협박 문자의 주인공은 눈이 뒤집혀 여유를 잃은 최연정이었다.
* * *
차 안은 서늘한 냉기 그 자체였다. 제인에게 문자를 보낸 연정은 운전하는 국현에게 몸을 틀어 하소연했다.
“나랑 얘기 좀 해. 저 여자 말 믿으면 안 돼.”
“입 닥치고 있어.”
“당신…….”
기가 막힌 탄식이 흩날렸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사국현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험악한 말과 분위기를 보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 정도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그녀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손은선이 모든 걸 폭로했을 수 있다. 그래, 이제부터 말을 잘하면 정상 참작이 된다.
그리고 만약 제 뜻대로 안 되면 그땐 정말 이 일의 원흉인 손제인과 손은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생각이었다.
국현의 뜻대로 연정은 지금 당장은 조용히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고급 일식집이었다.
그들이 들어선 룸 왼쪽 벽면엔 왼쪽 창호지가 있지만, 특수 방음 장치를 사용하여 옆방의 대화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오는 내내 손님이 보이지도 않았다. 당연히 국현의 지시라고 생각한 연정과 달리 국현은 도운이 왜 이 방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국현은 본격적으로 연정을 심문했다.
“길게 끌지 말고 말해. 왜 내 애를 지웠다고 거짓말한 거야.”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 애는 이미…….”
“개소리 집어치워!”
분명 손제인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문제의 시발점부터 짚는 국현의 서슬 퍼런 언성에 연정의 뺨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서울 병원 가서 확인하고 왔어. 너, 그리고 심창진. 아주 영악한 방법을 썼더군. 심창진의 아이와 내 아이가 그 병원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넌 왜 심창진의 아이인 심채연을 보육원에 버렸지?”
어떻게 알았나 싶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낸 국현의 포위망에 연정은 꼼짝없이 묶여 버렸다. 가볍게 놀리는 혀와 달리 흔들리는 눈동자는 숨겨지지 못했다.
“말해도 당신은 못 믿을 거야.”
“믿고 말고는 내가 판단해. 넌 지금부터 발언권만 있어. 하나부터 열까지 샅샅이 다 이야기해.”
여기서 피하면 모든 혐의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건 안 되지. 머리를 굴린 연정은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이야기했다.
“채연이는 창진 씨 오해에서 비롯된 거야. 당신이 경영 수업을 받으러 해외로 갔을 때, 창진 씨가 날 찾아왔어. 창진 씨는 채연이가 자기 아이인지도 모르고 질투에 휩싸여 당신 아이라고 생각하곤 버리라고 했어.”
“뭐?”
퍽이나 당당한 해명이다. 어이가 없어 끔찍하다는 게 이런 걸까?
“그래서 아이를 버렸다고? 심창진에게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고?”
“이야기해도 믿어 주지 않을 거였어. 그때 당시에 난 아이보다 내가 우선이었으니까.”
“그럼 이로써 확실해졌군.”
“뭐가.”
“제 아이의 남편이 코앞에 있는데도 딸을 매몰차게 버린 거라면, 내 아이는 더더욱 가차 없이 내동댕이쳤을 거라고.”
심채연은 도운이와 같은 꿈으로 보육원 출신이다.
“혹시, 내 아이도 같은 보육원에 버렸나?”
“아니야.”
“그 아이 이름이 내 예상엔…….”
“아니라고!”
“손제인 같은데.”
무언가 잡지 않으면 이곳을 뒤집어엎을 것 같았다. 국현은 앞에 놓인 유리컵을 부서져라 쥐었다. 눈앞에 있는 최연정은 자신이 목을 졸리는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뭘 벌써 죽으려고 그러나.
“맞든 아니든 너랑 심창진은 내 손에 죽는 거야.”
이제 사랑은 없다. 눈앞의 여자를 찢고 싶은 살기만이 국현의 마음속에 들어찼다.
* * *
“이쪽 방입니다.”
재킷 단추를 풀며 들어서는 도운을 경식이 안내했다. 도운은 자신이 들어선 룸 오른쪽 창호지 사이를 두고 어떤 대화가 오갈지 예상이 갔다.
“심 회장은 만남에 응하신 상태입니까?”
“최연정과 회장님 이야기라고 하니 바로 날뛰더군요. 배 실장님은 혹시 모를 상태를 대비해 밖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교진이 넌 내가 부르면 들어와서 저 문 열고.”
“알았어.”
도운은 각자의 포지션을 딱딱 일러두었다. 도운이 짚은 창호지 문을 바라본 교진에게도 뜨거운 사명감이 생겼다. 두 부자가 나가자 이윽고 미닫이문이 확 젖혀졌다.
“사국현 어디 있어.”
재킷은 다 풀어 헤치고 길게 내려온 넥타이를 덜렁거리며 등장한 사람은 심창진이었다. 도운은 묘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이젠 하다못해 아내 감시까지 하십니까? 뭐가 그렇게 자신이 없으셔서?”
“너 이 개자식, 기어오르지 않는 게 좋아.”
“무슨 소리야. 난 지금 심창진 당신 찍어 누르려고 부른 건데. 그동안 최연정이랑 우리 회장님을 잘도 가지고 놀았겠다.”
가늠하듯 실눈을 뜬 심창진의 눈이 일그러진 것은 그때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미 서울 병원과 보육원에서 다 확인했습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창진의 두툼한 목울대가 요동쳤다. 도운은 때를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두 아이를 멀쩡하게 낳아 놓고 부모란 것들이 피도 눈물도 없이 버렸겠다.”
일부러 제인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 그럼 제인이 정말 위험할 수도 있기에.
“내가 매사 태평해 보여도 머리통은 빨리 굴러가요,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
“오늘 우리 회장님이 나한테 호적에 올라오라네? 서도운이 아니라, 사도운으로 살라고.”
서와 사. 서사. 이 모든 서사.
거기서부터 과거의 모든 서사가 딱딱 굴러갔다.
“당신은 심채연이 당신 아이인지도 몰랐던 거야. 그저 질투에 눈이 멀어 회장님 아이인 줄 알고 두 아이를 버리라고 했겠지. 그런데 막상 여자를 뺏어 오니 더 불안하데? 그래서 선택한 게 아이 한 명.”
그런데 왜 심채연이 회장님 아이의 이름, 즉 제인이의 이름을 가지게 됐을까. 왜 내게 손제인인 척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은 미동도 없던 창진의 비웃음이 멀리 날려 버렸다.
“비상한 척하지만 헛똑똑이야.”
실성한 듯 어깨를 흔들던 심창진은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착각하지 마. 심채연은 내 애가 아니야. 사국현의 아이지.”
도청을 통해 최연정의 궤변도 아주 잘 들었다. 감히 사국현 앞이라고 나를 팔아 심채연이 사국현 아이인 걸 숨겨?
밝히면 밝히는 대로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국현 앞에서 굳이 심채연을 내 아이라고 하는 건 사국현에 대한 티끌 같은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 아닌가.
“등신 같은 놈.”
“그래, 등신같이 제 아이도 못 알아보는…… 뭐?”
흐름대로 대답한 심창진은 눈빛을 번뜩였다. 도운은 신랄하게 창진을 깎아내렸다.
“하물며 20년 이상 생이별한 우리 회장님도 본인 아이를 알아보는데, 어떻게 피부를 맞대고 사는 딸을 못 알아보시는지. 이봐요, 심 회장.”
손을 뻗은 도운은 물이 가득 들어찬 컵을 잡았다.
“눈을 뜨세요. 등잔 밑이 어두워요.”
그는 조용히 일어나 잔을 기울였다. 창진의 머리 위로 차디찬 물이 쏟아졌다. 창진은 부들부들 떨며 정수리부터 옷가지를 흠뻑 적시는 물을 굴욕적으로 맞아야만 했다.
그 우스운 꼴을 도운은 기꺼이 냉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