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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56화 (56/79)

56화.

대답은 키스로.

자그마한 입안으로 도운의 혀가 흘러 들어왔다. 뭉근하고 따스한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제인은 왜 이 집이 도운과 참 잘 어울리는지 알아챘다.

차분하면서도 품격 있는 그레이 색상. 그건 서도운이었다.

진득했던 키스는 쪼듯이 이어지는 입맞춤으로 변했다. 질척이는 소리 사이사이로 도운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 보고 기절하실 장면은 이런 거지.”

엄한 놈이 귀한 딸 잡아먹는다고. 이게 바로 머리 검은 짐승의 배신인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본격적으로 제인의 입술로 입을 틀어막으려고 할 때였다.

“하…… 전무님, 전화…….”

방해 공작을 하듯 재킷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김정배를 만난다던 국현이었다.

* * *

은선을 만난 뒤 국현은 서울 병원 이사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김정배는 접대용 소파 상석에 앉아 미리 빼놓은 진료 기록지를 국현에게 흔들어 보였다.

“오랜만이야, 사국현.”

“그것부터 빨리 봤으면 싶은데.”

진실이 눈앞에서 달랑거리니 가슴이 조여 온다. 김정배는 망설임 없이 서류를 밀어 넘긴다.

산모 최연정. 한때는 사랑스러웠던 그 이름. 국현은 김정배에게 시선을 틀었다.

“혹시 담당 의사도 만날 수 있나?”

“그 의사는 죽었어.”

“뭐?”

“아, 오해는 하지 말고. 2년 전에 폐암 말기로 사망하셨으니까. 내가 딱 이사장으로 취임하던 시기여서 죽어 가던 모습도 내가 직접 봤지.”

이 의사가 살아 있었으면 각종 법적 문제는 물론 의사 면허 박탈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전 이사장이었던 아버지도 모를 정도로 금도와 짜고 치고 입을 맞췄으니.

“그런데 말이야. 내가 호기심을 못 참고, 몰래 살짝 열어 봤거든?”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김정배는 국현의 손에 들린 진료 기록지를 턱짓했다.

“그 의사 양반이 살아 있어야 할 정도로 조금 이상한 게 있더라고.”

국현이 미간을 좁히며 딱딱하게 말했다.

“뭔데.”

“최연정한테 애가 둘이더라고. 근데 애비가 다르던데? 한 명은 사국현 네 이름으로, 다른 한 명은 심창진 이름으로.”

그 말에 심장이 격변하듯 튀어 오른다. 국현은 재빨리 진료 기록지 한 장을 넘겼다. 산모 최연정이라고 쓰인 진찰과 수술 기록 밑에는 1년 차이나는 3월생 아이와 5월생 아이가 적혀 있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3월생 아이는 태명이 없었고, 5월생의 아이는…….

“설마 심채연이 네 애였어? 태명이 채연이잖아.”

“……아니, 아니야.”

“그렇지? 심채연은 3월생이잖아. 그럼 5월의 채연이는 누구야?”

체리 연정. 그 줄임말을 딴 채연으로 태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낙태가 아닌 무사 출산으로.

“내 아이가 살아 있었어.”

게임 끝이다. 국현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도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회장…….

“당장. 당장 꿈으로 보육원으로 와라.”

남은 건 진짜 비밀을 아는 사람에게 들어야 한다.

* * *

“사국현…… 당신이 어떻게…….”

지난 수십 년간 평온을 잃지 않았던 얼굴에 균열이 갔다. 전부 남자가 보낸 사진 속 사국현과 손은선의 모습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애틋한 표정으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 손은 사국현이 먼저 잡았고, 살짝 얹은 손은선과 달리 사국현은 그녀의 손을 꽤 단단하게 옥죄고 있었다.

평생 저만 바라볼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나?

“어떻게 날 버리고 당신이…….”

다른 여자를 만나.

“설마.”

불현듯 연정의 머릿속에 결혼을 시키지 않겠다는 국현의 말과 제 아이가 살아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스쳤다.

설마, 손은선이 말한 걸까?

연정은 온 힘을 다해 쥐고 있는 핸드폰 액정으로 다시 한번 시선을 내렸다.

사국현과 손은선. 그리고 아이들을 버렸던 꿈으로 보육원.

그 다리를 잇는 이어진 손.

손, 손, 손.

손제인.

쩍, 심장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연정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장…….”

“에구머니나, 사모님. 어디 가세요?”

“당장 사국현한테 가 봐야겠어.”

“사모님!”

연정은 품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반짝이는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서 찰랑거렸다.

* * *

끼익, 보육원 앞에 거칠게 차를 대자 미리 도착해 있던 교진이 도운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

“최연정이 회장님을 속인 게 맞아. 아이는 살아 있었어.”

역시.

고개를 끄덕인 도운은 대번에 원장실 문을 열었다. 고개를 푹 숙인 국현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던 은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운아…….”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두 사람이었다. 도운은 그녀에게 악수했다.

“오랜만입니다.”

“어, 그래…….”

잘 지냈다고 묻고 싶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 국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도운이 네 말이 맞았다. 내 아이가 살아 있었어. 내 아이가…….”

살아 있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금방 괴로워하는 국현을 도운이 단단히 붙잡았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기록지에서 뭘 보셨나요?”

“최연정 밑으로 아이가 두 명이었어. 한 명은 내 아이고 다른 한 명은 심창진의 아이. 심채연이 내 아이가 아닌 건 분명해.”

그건 20년 전, 사라진 연정을 찾았을 때 진즉 알아챘다. 연정과 함께 있던 갓난아이는 심창진의 아이였고 그때 국현은 연정과 몸을 섞지도 않았으니.

“그런데 아이의 태명이 채연으로 되어 있었어. 5월생으로.”

그 말을 들은 은선은 때가 왔다고 느꼈다. 이제 모든 걸 밝히자.

그런데 은선이 입을 열려는 순간, 국현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한 눈빛으로 도운을 응시했다.

“도운이 너, 우선 내 호적에 올라와라.”

갑작스러운 전개에 도운은 눈살을 구겼다.

“이번 논란이 터지면 가장 먼저 네 신변과 명성에 흠이 가겠지. 정말 내 딸이 살아 있다면 세력 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는 문제야, 그러니까…….”

“아니요, 안 돼요.”

말 사이의 중앙선을 침범한 건 은선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국현의 팔을 그러잡았다.

“그 전에 제가 먼저 국현 씨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혹시, 심채연이 정말 이 보육원 출신입니까?”

지금 국현의 직감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뒤이은 은선의 말을 예상한 국현이 그녀를 예리하게 주시했다. 미약하게 커지는 눈동자는 이내 차분히 굳건해졌다.

“네, 맞아요. 채연이가 원정 출산했다는 말은 심창진과 최연정의 거짓말이에요. 채연이가 여덟 살 되던 해에 그들이 이 보육원에서 채연이를 데리고 갔으니까요.”

그럼 심채연은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분명 심창진의 아이인데, 심창진이 그걸 모른다?

국현은 은선을 재촉했다.

“계속 말하세요.”

“그리고 또…….”

자연스레 도운에게 시선이 흘렀다. 도운은 초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말해요.

그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아 은선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니, 제인이를 위해서라도 내야 했다.

“제인이.”

“…….”

“제인이도 이 보육원 출신이에요. 그 아이들은 전부 다…….”

그때였다.

“그 입 닥쳐.”

원장실 문이 벼락같이 열렸다. 막을 새도 없이 등장한 연정이 테이블 위에 놓인 주스를 은선의 얼굴에 뿌렸다. 형편없이 젖어 버린 은선을 본 국현의 눈동자엔 뜨거운 불꽃이 튀어 올랐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분노를 참지 못한 국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정은 작은 어깨를 헐떡이며 그런 국현을 도리어 쏘아보고 있었다.

찰나의 침묵, 소용돌이치는 공기. 얼굴에 끈적하게 타고 흘러내리는 주스를 닦은 은선은 침착하게 두 사람을 갈무리했다.

“아니요, 잘됐어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은선은 연정을 도전적으로 응시했다.

“당사자한테 들으면 되겠네요. 왜 두 아이를 버렸는지.”

“……그 입 닥치라고 했지.”

밝혀져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내 남자여야 할 사국현이다.

온갖 집착이 뒤섞인 연정은 은선을 향해 손을 매섭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손은 닿지도 못하고 힘없이 꺾여 버렸다. 은선의 앞을 가로막는 국현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

“너, 따라 나와.”

그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연정을 잡아끌었다.

이제는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다. 빠른 판단을 마친 도운은 은선에게 이야기했다.

“이다음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원장님.”

도운은 최연정을 억지로 차에 태운 뒤 운전석으로 향하는 국현을 보며 경식과 교진에게 차분히 일렀다.

“배 실장님은 지금 당장 프라이빗한 룸 두 개만 잡아 주시고, 교진이 너는 바로 심창진한테 연락해.”

“알겠습니다.”

“야, 뭐 하려고.”

“게임은 끝났어.”

왠지 모를 흥분이 차오른 도운은 넥타이를 쭉 끌어 내렸다.

“조져야지, 제대로.”

* * *

“초코, 누나 이제 갈게.”

초코의 턱을 부드럽게 긁어 준 제인은 에덴 에리스를 나왔다. 중문을 닫자 어룽거리는 초코의 실루엣이 마음에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이삿짐 오는 거 보고 입주 완료 기사 쓰고 기다리고 있어.’

아무리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심정이라도 그렇지. 자기 집을 덜렁 맡기고 떠나는 집주인이 어디 있냐고.

“같이 살자고 하지를 않나…….”

2404호. 검은색 현관문 위의 고급스러운 숫자가 유독 눈에 콕콕 들어온다.

비로소 생긴 도운의 보금자리를 바라본 제인은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오후 6시, 오랜만에 한 정시 퇴근이니 원장님을 찾아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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