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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55화 (55/79)

55화.

침실로 다가가는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줄였다. 열린 귓속으로는 소리를 잔뜩 죽인 연정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작업은 어떻게 돼 가고 있나요.”

문고리를 잡은 창진은 표정을 굳혔다. 안에서는 수상한 통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원래도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번엔 조금 더 걸리는 것 같네요. 할 말이요?”

“…….”

“……뭐라고요?”

그 순간 등을 보이던 연정이 몸을 바로 돌리며 격양된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럼 사진부터…….”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연정은 재빨리 통화를 갈무리했다.

“우선 이따 연락해요.”

창진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누구지?”

자연스러운 물음에 의심은 없다.

통화 내용을 못 들은 건가.

나름 안심한 연정은 팔뚝을 문지르며 적절하게 둘러댔다.

“이번에 가져올 프랑스 작가 그림의 공수가 어렵다고 하네요.”

“그래?”

“그런데 블루투스 이어폰은 왜 벌써 끼고 있어요?”

연정은 창진의 왼쪽 귀에 꽂힌 블루투스 이어폰이 낯설었다. 창진은 이어폰을 검지로 톡톡 치며 기계적인 미소를 그렸다.

“아, 이거.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 보려고.”

거리를 좁힌 창진은 연정의 쇄골 아래에 위치한 목걸이를 어루만져 보았다.

“당신, 내가 준 목걸이 잘 하고 있군.”

“그럼요. 당신이 준 건데.”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 요즘 들어 남편의 의중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의심스러운 속마음을 죽이고 연정은 꽃과 같은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래, 앞으로도 잘하고 있어. 난 이만 출근해 보지.”

“조심히 다녀와요.”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지금 남편이 중요한 게 아니다.

연정은 창진이 멀어지자 표정을 싸늘히 치워 냈다. 방금 나눈 통화가 계속 귓가에 모기처럼 날아다닌다.

‘작업은 어떻게 돼 가고 있나요.’

작업, 그건 오래전부터 연정이 뿌리고 다녔던 사국현과의 염문설이었다. 신분 미상에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하청업자들과 거래를 한 것이다.

‘원래도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번엔 조금 더 걸리는 것 같네요. 할 말이요?’

그럴싸한 염문설을 만들기 위해 하청업자들은 사국현을 몰래 미행했다.

-네, 그런데 사국현 이 사람. 여자 생긴 것 같은뎁쇼? 꿈으로 보육원 원장이요.

그런데 여자라니? 그것도 손은선이라니?

급격히 초조해진 연정은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적어도 연정의 마지막 말을 놓치지 않았는지 하청업자는 문자를 보내왔다.

[사진은 오늘 사국현 추적하며 찍어 보겠습니다요!]

* * *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도운이 왔다 갔다는 흔적은 메시지로 남아 있었다.

[나 같은 놈 앞에서 함부로 잠들면 안 돼. 함부로 들여서도 안 되고. 다음에는 안 재운다.]

본인이 먼저 들어와 놓고.

‘아’ 다르고 ‘어’ 다른 도운의 문자에 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참 서도운다운 대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제인은 즐겁게 아침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은 제인이 어제 만들어 낸 체리 음료의 무료 시음회가 있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시음회라 제인은 오늘도 집무실로 올라가지 못했다. 라운지 한편에 소지품을 내려 둔 제인은 카메라를 세팅했다.

이미 저명한 맛집 칼럼니스트와 유명한 요식업계의 큰손, 그리고 호텔 이용객까지 인산인해였다. 제인은 사람들이 마시고, 반응하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찍었다.

그때 맛을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국현이었다.

제인은 기업의 총수로서 예의를 갖추고 등장한 국현의 모습 또한 놓치지 않았다. 번쩍이는 플래시에 체리 주스를 마시던 국현의 시선이 제인에게 꽂혔다.

그는 제인에게 올곧게 걸어왔다.

“체리가 썩 괜찮은 과일 같군.”

“맛 괜찮으세요?”

“그래, 손 기자가 준 체리도 몽땅 해치웠어.”

국현의 평이 궁금했던 심장은 한층 더 크게 뛰었다.

“어떻게 확인시켜 줄까 고민했는데 마시는 걸 보여 줄 수 있어 다행이군.”

국현은 유리잔을 흔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정말 체리 주스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체리 주스가 손 기자 손에서 탄생한 거라던데?”

“그냥 조금 많이 마셔 본 사람으로서 전무님께 도움을 드린 겁니다.”

“새로 시공 들어가는 에덴 더 헤븐 인테리어도 그렇고.”

“그건 그냥 전무님을 살짝 거들었을 뿐이죠.”

“살짝이라고 하기엔 디자인으로 뽑아낸 설계도가 무척 좋던데.”

제인은 고개를 들어 국현을 바라봤다.

“진지하게 검토 중이니 숨겨진 역량 더 펼쳐 내 보도록 해 봐.”

갑작스럽지만 묵직한 칭찬에 제인은 입술을 감쳐물 수밖에 없었다.

* * *

“속은 좀 괜찮냐?”

“어, 어제 달콤한 꿀물을 마셔서.”

“징그럽고 무서운 새끼. 일 너무 한 번에 처리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체해.”

이틀 연속 고량주로 달렸으니 꿀물 하나로 해소될 속이 아닐 텐데.

어떤 꿀물을 지칭하는지 모르는 교진은 괴물 같은 체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끌어 봐야 소용없어. 제인이 생일도 2주 정도 남았고.”

도운은 단단히 뭉친 목덜미를 주무르며 고개를 젖혔다. 일을 이렇게 많이 한 것도 처음이지만, 괜찮았다.

제인에게 완벽한 세상을 안겨 주어야 하니까.

“회장님은. 가셨어?”

“어, 아까 아빠한테 들어 보니까 잠시 보육원 들렀다가 갈 예정이라더라. 근데 회장님이랑 거기 보육원 원장이랑 뭐 있는 것 같지 않아?”

“관심 없고. 초코.”

“컹!”

“이사 가자.”

김정배를 유인했으니 이제 국현은 모든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 도운은 집무실 안에 차곡차곡 쌓인 짐을 훑어보았다. 동시에 단정한 노크를 한 제인이 들어왔다.

“지금 시음회 기사 적으려고 하는데…….”

제인은 수북하게 쌓인 짐을 보고 놀라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마침 잘 왔다.”

“왜요?”

도운은 제인의 볼을 툭 건드린 다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 집 놀러 가자.”

“컹!”

신난 초코까지 풀쩍 뛰어 제인의 등을 떠밀었다.

* * *

“걸친 것만 해도 다 얼마여.”

꿀꺽. 침을 삼킨 하청업자는 국현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한편으로는 비웃음도 나왔다.

“고귀하신 마나님이 뒤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걸 알면 세상이 얼마나 뒤집힐까.”

남자는 어깨를 떨며 낄낄 웃었다. 이럴 때마다 매스컴에 확 밝혀서 거한 돈을 더 챙길까 싶지만, 상대는 대기업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힐 수 있어 남자는 그저 연정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국현의 뒤를 쫓고 그에 따른 동선을 짜깁기하며 둘의 염문설을 퍼뜨릴 뿐이다.

“어디 보자. 그런데 우리 마나님…….”

남자는 핸드폰을 들어 국현과 은선을 확대했다. 퍽이나 묘한 분위기인 것이 서로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오늘 제가 가야 할 곳이 있는데, 다녀오면 은선 씨한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그래요? 네, 다녀오세요. 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찰칵, 찰칵.

뭐라고 하는진 안 들리지만, 남자는 사진을 연속으로 찍었다.

“이 사진 보면 속이 꽤 아프겠어?”

남자는 입에 담배를 물며 두 손을 꽉 잡은 국현과 은선의 사진을 연정에게 찍어 전송했다.

* *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도운이 이끌고 초코가 떠미는 대로 향한 에덴 에리스 24층엔 이미 가구가 빼곡하게 들어선 상태였다.

“컹!”

초코는 새집이 좋은 모양인지 거실 중앙에 깔린 러그에 몸을 마구 뒹굴며 냄새를 묻히기 시작했다. 제인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언제 이걸 다 하셨어요?”

“입주 기사 쓰라고 할 때부터. 뭐 마실래?”

“탄산수요.”

설마, 냉장고까지 채웠을까.

생각나는 걸 말했더니 키친핏 블랙 냉장고 안에선 마법처럼 탄산수가 나온다. 어이가 없어 도운의 옆에 서서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니 각종 음료와 생수가 까꿍 하고 인사한다.

치익, 탄산수 뚜껑을 돌려 딴 도운은 찬기를 품은 탄산수를 제인의 볼에 갖다 대었다.

“새삼 실행력 죽인다 싶지.”

“네.”

알고 있었지만, 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쓰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다 싶다.

제인은 탄산수를 마시며 거실을 쭉 둘러보았다. 도운의 취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거실은 차분하면서도 멋스러운 그레이 컬러가 주를 이루었다.

초코가 마구 긁어도 끄떡없을 것 같은 그레이색 패브릭 소파와 그 앞에 놓인 우드 톤 테이블, 회색빛 벽지. 또 벽지와 달리 거실과 주방을 잇는 바닥에는 짙은 잿빛 헤링본 타일이 깔려 있어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주는 게 특징이었다.

도운은 제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시선을 기울였다.

“침실도 보러 갈래?”

어딘가 은밀해 보이기까지 하는 말투에 제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로 설명해 주세요.”

멀쩡한 꾀, 예외 없이 잘릴 줄 알았다. 입꼬리를 올린 도운은 침실 구조를 설명했다.

“침실은 거실이랑 같은 톤으로 된 헤링본 바닥이야. 슬라이딩 도어를 열면 침실이 나오고, 욕조는 조금 밝은 그레이 색상의 테라조 타일로 했어. 딱 호텔식으로.”

“네, 그대로 기사에 넣을게요.”

“여기 일하라고 데리고 온 거 아닌데.”

“그럼요?”

도운이 한 말을 기억하기 위해 수첩을 꺼내던 손길이 멈췄다. 고개를 드니 그의 손가락이 제인의 콧방울을 톡, 친다.

“몸만 오라고 어필하는 건데.”

“……저요?”

“그래, 너요. 내가 너 말고 여자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안 돼요. 회장님 쓰러지실 수도 있어요.”

제인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서도운의 능청도 받아칠 여유가 생겼다.

도운은 손끝으로 제인의 입꼬리를 매만졌다.

“농담 아니야. 지금은 내가 오라고 했지만, 다음에 네 발로 오면 누나 너.”

급하게 숨을 삼킨 입술에 도운은 입을 맞추었다.

“평생 나랑 살아야 한다.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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