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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54화 (54/79)

54화.

부탁이자 강요였다. 전화를 끊은 제인은 뒤를 돌았다. 태웅은 더 이상 제인을 잡진 못했지만, 간절한 목소리로 한 번 더 그녀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것만 들어 줘! 지원우, 지금 심창진한테 감금당해 있어. 너한테 무슨 일 날까 봐 네 얘기 꺼내진 않았는데, 너 정말 위험해. 제인아.”

심창진이 지원우를 감금했다고?

도와 달라는 심채연의 전화가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태웅이 쫓아오진 않았지만, 이미 뒤집힌 속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발장 앞에 서서 한참이나 숨을 골라야만 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감정을 다스리고 있을 때쯤, 이번엔 초인종이 딩동 울렸다. 제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도대체 나를 왜 이렇게들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일까.

화가 난 제인은 현관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내가 찾아오지 말랬……!”

당연히 단념하지 못한 태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제인의 눈에 보이는 건 달랑이는 검은 봉지와 그 검은 봉지가 쓱 내려가면서 보이는 도운의 얼굴이었다.

“누구야.”

웃고 있던 도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우리 제인이 괴롭혔어.”

* * *

“여긴 왜…….”

뾰족하게 올라간 눈매는 도운을 보자마자 순하게 힘이 빠졌다. 수상한 냄새를 맡았지만 도운은 더 묻지 않고 집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당연히 보고 싶어서 왔지.”

“…….”

“우리 오늘 종일 못 봤잖아.”

도운의 등 뒤로 자연스레 문이 닫혔다. 그는 낙엽처럼 사부작거리는 봉지를 제인의 눈앞에 달랑였다.

“환하게 웃는 모습 보려고 체리도 사 왔는데 말이야.”

누가 또 우리 누나 기분을 조져 놨을까.

몇몇 후보군이 떠오른 도운은 웃는 눈빛 뒤로 살벌함을 감췄다. 제인은 연신 달랑거리는 봉지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20분 남짓, 홀로 다스리지 못한 분이 도운으로 인해 거짓말처럼 날아간다. 이미 알아차린 감정에 하나 더 알게 된다.

“오늘 체리를 너무 먹어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에요.”

내가 서도운을 생각보다 많이 사랑한다고.

“그래도 하나만 맛봐. 길거리에서 할머니가 파시길래 싹쓸이해 왔어.”

식탁으로 걸음을 옮긴 도운은 체리 몇 알을 흐르는 물에 씻어 제인의 입에 쏙 넣어 줬다. 제인은 입안 가득 퍼지는 과즙을 음미하며 도운의 손을 잡아 소파로 이끌었다.

“맛있어요. 여기 잠깐 앉아 있으세요.”

“그래.”

손제인을 위해서라면 다 할 수 있는데 뭔들 못 할까.

요즘 들어 제인은 그에게 스스로 손을 내미는 일이 많아졌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손은 힘든 하루를 어루만져 준다.

곧 제인이 부엌에서 타 온 건 꿀물이었다.

“이거 마셔요. 어제도 오늘도 술 잔뜩 드셨잖아요.”

도운은 투명한 잔에서 부드럽게 희석된 꿀물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밥은?”

“안 먹었어요.”

“그럼 이거 같이 마시자.”

도운은 고개를 젖혀 꿀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저걸 어떻게 같이 마시자는 걸까.

남자다운 목울대를 응시하던 제인의 팔이 일순 당겨졌다. 도운의 허벅지 위에 앉혀진 제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도운의 입술과 함께 달콤한 꿀물이 제인의 입속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제인은 시냇물처럼 졸졸 흘러 들어오는 꿀물을 삼키기에 급급했다.

자연히 열린 입술은 도운의 입술을 살살 감쳐무는 행위로 변했다. 하지만 작은 입술은 도운의 넘치는 애정을 받아 내기엔 무리였다.

입술 새로 가느다란 꿀물이 흘러내렸다. 목덜미에 끈적이는 감촉이 이어지자 제인은 몸을 떨었다.

“흘러요.”

“괜찮아.”

내가 먹으면 되니까.

도운은 혀를 길게 내밀어 꿀물이 흐른 경로를 쭉 핥아 올렸다. 턱선을 스치고 다시 제인의 입술 위로 올라간 혀는 촉촉이 젖은 그녀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빨아 봐. 체리보다 맛있을 거야.”

제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졌다. 도운은 얼른 제인의 뺨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닌가. 이게 체리인가.”

맛있어 죽겠다는 듯 쪽쪽 입을 맞추는 행위에 제인은 몸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서도운을 마주 본 상태로 앉아 있어 그 부끄러움은 배가 된다.

“아기 같네.”

아, 참을 수 없다. 제인은 결국 도운의 목에 두 팔을 걸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만하라는 말을 하는 대신 옹골진 주먹으로 도운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큭큭거리며 웃는 웃음에 온몸이 진동한다.

“그럼 내 애인인가.”

퍼억. 이번엔 꽤 부끄러웠나 보다.

아까보다 세진 힘에 도운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동시에, 넘어오는 제인의 허리를 강하게 옥죄며 그녀의 등을 말없이 두드렸다.

단전이 뻐근하지만, 우선 지금은 이 상태로 있어도 완벽하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 위로 새근새근 잠든 제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도운은 그 상태 그대로 제인의 엉덩이 밑을 받쳐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간 제인의 침실은 그녀의 성격처럼 간소하고 단정했다. 목이 젖혀지지 않게 잘 받쳐 제인을 침대에 눕힌 도운은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조용히 나와 제인의 핸드폰을 찾았다. 다정한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한 밤공기로 뒤바뀌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그래도 서도운은 위험해.]

심채연의 전화부터 아까 전 제인이의 기분을 확인해 주는 하태웅의 문자까지.

“이것들이 덜 맞았지.”

아니면 아픈 걸 즐기는 타입인가?

도운은 태웅의 문자를 삭제하고, 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연아!

다급한 음성과 이름에 도운은 짜증이 나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귀에 다시 덧붙였을 때, 도운은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내가 지금 취해서 잘못 들었나.”

-……서도운?

당연히 제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채연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너지. 네가 원우 어디다 놨지. 저번에도 원우 때린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야, 심채연.”

-원우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해!

“너나 말해.”

-뭐?

“너랑 금도에서 숨긴 비밀이 뭔지.”

이 비열한 족자들은 꼭 말을 안 하면 감춰지는 줄 안다.

도운은 조소를 버무리며 작게 읊조렸다.

“야, 너 숨 떨리는 거 다 들려.”

-…….

“그냥 제발 얌전히 있어라, 어? 내가 너희 가족 다 조질 때까지. 닥치고, 가만히.”

잇새로 말을 씹은 도운은 단번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채연의 번호를 제인의 핸드폰에서 깔끔히 차단했다.

* * *

채연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언제나 제 곁에 있던 원우는 돌아오지 않았고 제게 애원했어야 할 제인이는 어젯밤, 서도운과 함께 있었다.

마음이 두 번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걸까.

사라진 원우를 당장이라도 경찰에 실종 신고하고 싶지만, 언론에서 금도가 화두에 오르면 아빠는 원우를 당장 내칠 것이고 엄마는 방관자가 되어 도움을 주지도 않겠지.

생각은 거기까지 미쳐 마지막 지푸라기로 제인이한테 전화한 건데.

‘내가 도운이 만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심채연이라는 이름 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이젠 아니야. 도운이가 불러 주는 손제인이 좋아졌어.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내 행복 깨지 마.’

이것으로 모자라 서도운마저 그따위 협박 전화를 하며 우리 둘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으려고 한다. 세상이 뒤흔들리듯 요동치는 이 불안을 어떻게 하면 떨쳐 낼 수 있을까.

“원우야. 어디 있어, 원우야…….”

침대에 파묻힌 채연이 흰 침구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릴 때였다.

“둘이 그렇게 애틋한 사이인 줄은 몰랐는데?”

“……아빠.”

채연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아 눈앞이 핑핑 돌아서 창진의 손을 잡으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아빠, 원우가 계속 집에 안 들어와요. 우리 실종 신고라도…….”

“아니.”

단칼에 잘라 낸 창진은 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언가 이상한 기류가 스치는 순간이었다. 채연의 뒤통수에 닿아 있던 창진의 손에 잔인한 힘이 실렸다.

“윽!”

두피가 찢어지는 고통에 채연은 겨우 눈을 떴다. 창진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내가 데리고 있었으니까. 지금부터 네 대답에 따라 지원우가 무사히 돌아올지 돌아오지 못할지가 달려 있어.”

어떻게든 창진의 손을 떼어 내려던 채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대뜸 눈앞에 들이밀어진 창진의 핸드폰 안에는 온몸이 성치 않은 원우의 사진이 있었다.

“원우……. 원우야.”

충격받은 채연이 작게 속삭이자 창진은 그녀의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실었다.

“안심해. 아직은 살아 있으니까. 이만큼 맞았으면 사국현의 아이에 관해 불 거라고 생각해 너한테도 같잖은 위로를 했던 건데, 아무래도 지원우의 주인은 너인 것 같더군. 너는 알지.”

숨이 굳은 채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국현의 또 다른 아이가 누구인지. 최연정과 나. 그리고 널 사이에 둔 비밀을 아는 사람도 너뿐이니까.”

두려움, 무서움? 그것보다는 직감이 아우성쳤다.

말하면 안 돼. 제인이를 들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 거야.

채연은 덜덜 떨리는 입술로 겨우 입을 열었다.

“몰라요. 전 정말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동생에 관한 건 알지도, 묻지도 말라고 하셨잖아요.”

창진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에요. 원우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거짓말할 이유도 없잖아요.”

한참을 탐색하는 눈빛이 이어졌다. 채연의 눈에 매달린 눈물이 떨어지고 나서야 창진은 그녀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옆으로 밀었다.

“쯧……. 찾으면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창진의 서슬 퍼런 혼잣말에 채연은 이불을 왈칵 움켜쥐었다. 지금은 그 어떤 동요도 들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창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지우고 1층으로 내려갔다. 지원우는 현재 하태웅의 진술 확인 이후 치료를 받고 있다.

크게 난 상처는 이미 아물었고, 자질구레한 멍 정도야 학습 능력이 없지 않은 이상 함부로 발설하지는 않겠지.

그럼 우리 최 여사께서는 언제 꼬리가 밟히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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