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53화 (53/79)

53화.

“오셨습니까, 전무님.”

거침없이 걸음을 옮긴 도운은 경식의 인사를 받고 회장실로 들어갔다. 심란한 듯 넓은 유리창을 바라보고 서 있던 국현은 대번에 몸을 돌렸다.

“어떻게 됐지?”

도운은 울리는 골을 손으로 누르며 김정배를 씹었다.

“김 이사장, 원래 그렇게 겁이 많습니까? 제 입으로 술술 불고 막상 결정적일 땐 꽁무니 빼던데.”

“뒤에서 웃고 떠들기 좋아하는 비열한 인간이야. 뭘 불었는데.”

“심창진의 불법 투기와 자금 세탁이요. 건설 쪽으로 회장님을 누르고 싶어 갖은 편법을 써 영역을 넓혀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김정배는 오늘 한 번 더 꼬시면 완벽하게 넘어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에덴 더 헤븐 시공 인테리어에 관해서는 제인이가 의견을 내 봤는데요.”

도운은 제인이 손바닥에 그려 준 인테리어를 명확히 기억해 내 디자인 팀을 들들 볶았다. 졸지에 야근하게 된 디자인 팀은 도운이 원하는 대로 완벽한 설계도를 뽑아냈다.

뿌듯한 결과물이 손안으로 오자 국현은 어이가 없었다.

“너한테 부탁한 걸 왜 손제인 기자한테 시켜.”

“시킬 만하니까 시키는 거예요. 나중엔 저한테 고마워하실 겁니다.”

“생과일 음료도 손제인 기자 머리에서 나온 거야?”

“그건 좋아하는 여자한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남자의 마음이고요. 뭐, 지금도 밑에선 제인이가 체리 음료를 시음하고 있죠.”

“하여튼 가지가지…….”

“설계도부터 확인해 보십시오. 부연 설명을 덧붙여 놨으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쯧, 혀를 차고 종이를 펄럭인 국현은 예리하게 설계도를 훑어 내렸다. 전문성이 없는 한낱 기자가 알긴 뭘 알겠어.

그렇게 단정했던 생각은 에덴엔 없던 방 구조와 나름의 스토리텔링이 있는 설명을 보니 고이 접히기 시작한다. 습관처럼 구겨진 미간이 빳빳해지고, 집중하는 눈빛을 보이자 도운은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거봐. 마음에 든다니까.

팔을 당겨 손목시계를 확인한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오고 있네요.”

“…….”

“제가 만들어 놓은 판에서 회장님은 준비만 하시면 됩니다.”

당신의 아이를, 제인이를 만날 준비.

도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그래서, 결정하셨습니까?”

그날 저녁, 도운은 다시 정배와 만났다. 저는 이제야 속이 좀 괜찮아졌는데 멀쩡한 김정배를 보고 오늘은 기필코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김정배는 의외로 순순히 포기했다.

“결정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내 입으로 내 비리까지 술술 불었는데.”

고량주를 털어 넣는 손길엔 신경질이 가득하다. 술이 좀 깨고 기억을 더듬었을 때, 정배는 심창진의 비리를 이야기하다 그만 자신의 무덤까지 팠다는 걸 상기했다.

모른 척 도망치자니 집요한 서도운은 계속 물고 늘어질 것 같고. 도망칠 구석이 없을 땐 그냥 적의 아군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럼 병원 진료 열람에 관해서는 동의하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어.”

“말씀하시죠.”

“내가 거는 패는 많은데, 서 전무는 거는 게 하나도 없잖아.”

대신, 적의 아군의 약점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기의 밀도를 좁힌 두 남자의 시선이 강하게 부딪쳤다.

“금도를 무너뜨리는 대신, 넌 나한테 뭐를 줄 거지?”

“그렇죠. 또 빈손으로 따르긴 섭섭하시겠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린 도운은 턱을 까딱였다.

“안 그래도 서울 병원 신관 신축 공사하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직 건설사는 정해지지 않았고요. 그거, 에덴이 투자하겠습니다.”

“에, 에덴이?”

승기를 잡으려고 했던 정배는 그만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꼴사납게 말을 더듬고 개구리처럼 두 눈이 번쩍 뜨였다는 의식은 저 멀리 사라졌다.

에덴이 투자한다. 그것도 건설사로 톱을 먹고 지난 수십 년간 부실 공사 논란 한번 없던 에덴이 신관 공사를 받아 준다면 서울 병원에서도 그야말로 더 많은 환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

“도약하셔야죠, 이사장님.”

대답을 더 들어 볼 것도 없다. 유혹하듯 속살거린 도운은 몸을 느슨히 늘어뜨렸다.

“그럼 이제, 거래는 성사된 겁니다?”

그게 마치 날개를 달아 준다는 유혹 같아 정배는 침을 꿀꺽 삼켰다.

* * *

종일 농도를 달리한 체리 음료수만 연거푸 마시니 그 맛이 그 맛 같고 판단도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빨리 끝날 것 같던 체리 음료의 최종 맛을 결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도운이 시킨 입주 기사까지 쓰고 퇴근을 하니 벌써 저녁 7시가 훌쩍 넘은 시각.

“서도운은 집에 갔으려나.”

직진밖에 없는 그 성격상 집에 갔으면 벌써 연락하고 난리가 났을 텐데.

제인은 오늘따라 조용한 핸드폰을 보며 서울 병원 이사장과의 술자리가 아직 진행되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만약 뒷거래가 성공해 최연정의 진료 기록을 뒤져 볼 수 있다면.

그 뒤에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상상은 제인의 가슴을 거칠게 뛰게 했다. 영악하고 간사한 심창진과 최연정이니 굳이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보거나 출산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곳저곳 흔적을 뿌려 대는 게 리스크가 더 클 테고, 친구였던 김정배가 서울 병원 의료계 집안이니 사람을 시켜 입막음했을 테지.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또 이 넓은 세상에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분명 존재한다. 꼬리는 처음부터 길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쪽에서 냄새를 맡았다는 게 심창진과 최연정에게는 일생의 큰 행운이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집으로 향하던 제인의 걸음이 멈추었다. 제인이 사는 빌라 앞에서 헤드라이트가 켜진 차가 그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제인은 눈이 부셔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차를 응시했다.

서도운인가?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리자 차가 선명히 보였다.

“제인아, 나랑 얘기 좀 해.”

다급한 기세로 차에서 내리는 태웅까지.

“할 말 없어.”

단번에 인상을 구긴 제인은 뒤를 돌았다. 그러자 사나운 손이 제인을 낚아챘다.

“놔!”

“너 심채연하고 자매라며!”

제인은 제 몸을 함부로 만지고 돌려 버리는 무례함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격양된 음성에 그만 경악해 버리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지원우가 말하더라. 나보고 너하고 심채연 자매라고 밝히라고. 그거로 심창진 더 들쑤시라고!”

“…….”

“그런데 더 소름 돋는 게 뭔지 알아? 서도운도 그거 알아! 알면서 내가 퍼뜨리려는 거 녹음기 부수고 막았어!”

호통을 치는 태웅은 제인의 어깨를 흔들기까지 했다.

“서도운, 제정신 아니야. 너와 관련해서는 그냥 미친놈이라고.”

그러니까 그만 너라도 정신 차리라고, 위험한 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오라고 태웅은 빌라촌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제인은 본드처럼 떨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래서.”

“뭐?”

“그래서 선배가 뭐 어쩔 건데.”

잡을 곳 없이 툭 떨어진 손은 태웅의 허망함을 그대로 보여 줬다. 앞뒤 쏙 빼고 서도운만 미쳤다고 했는데, 제인은 태웅이 생략한 부분의 의미를 이미 간파해 버렸다.

“결국엔 선배도 심창진 들쑤시려고 녹음기 켠 거잖아. 지금도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 소름 돋는 건 서도운이 아니라 지원우지. 심창진의 사람이면서 또 다른 심창진의 사람인 선배를 방패 삼아 심채연을 가지려는 거잖아. 적어도 서도운은 안 그래.”

분명 달콤하고 상큼한 체리처럼 기쁨과 설렘, 그 경계로 푹 절인 하루였다. 서도운은 내색하진 않지만, 뒤에서 열심히 누나인 그녀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일을 했으며 그녀를 챙겨 주었다.

솔직히 그런 건 아무래도 소용없다. 저만 알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뭣도 모르고 서도운을 미친놈 취급하는 건 제인의 평온한 기분을 들쑤시기에 적합했다.

“도운이는 날 알아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도 내가 다치지 않게 노력하는 거라고. 적어도 선배나 다른 사람들처럼 뒤에서 지저분한 짓은 안 해.”

한 글자, 한 글자 말하는 제인에게선 떨리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 감정의 빛깔은 너무도 명백했다.

“그래서.”

태웅은 뜨거운 불길에 몸을 지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서도운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야?”

“어, 사랑해.”

어차피 깨우친 감정, 감춰 봐야 뭐 할까.

제인은 태웅의 두 눈을 똑똑히 응시하며 한 번 더 말했다.

“그리고 나 행복해.”

“…….”

“서도운이 소름 돋아? 그럼 내가 더 무서운 이야기해 줄까? 내 이름, 손제인 아니야.”

바들바들 떨리는 태웅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내 이름이 채연이야. 심채연이 제인이고. 걔가 어렸을 때 내 이름 빼앗고 서도운 앞에서 나인 척 20년간 연기했던 거야.”

“…….”

“그런데 선배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저 가지려고만 드는 거야. 아주 이기적이게도.”

그때 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하지 않은 익숙한 번호여서 제인은 전화를 받았다.

혼란스러워하는 태웅을 똑똑히 응시하면서.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성은 애처로웠다.

-제인, 아니. 채연아. 나 좀 도와줘.

“심채연…….”

멍하니 벌어진 입으로 태웅이 한숨처럼 속삭였다. 제인이 말한 진실에 진실을 얹는 확언이었다.

“너 나 그렇게 부르지 마.”

-…….

싸늘한 음성에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제인은 앞에 있는 태웅에게, 그리고 이 딱딱한 물건 뒤에 숨은 심채연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도운이 만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채연이라는 이름 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이젠 아니야. 도운이가 불러 주는 손제인이 좋아졌어. 그러니까, 제발.”

-…….

“제발 내 행복 깨지 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