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건장한 체격의 태웅이 몸부림쳐도 커다란 덩치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야가 검은 천에 차단된 태웅은 자신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것만 인지할 뿐이었다.
“조용히 하고 가시죠. 회장님께서 은밀하게 찾으시니.”
시각이 가려지니 청각은 더욱 곤두섰다. 퇴근 후 불과 20분 만에 벌어진 일이다.
‘하태웅 기자님?’
‘네, 누구시죠?’
묻는 순간, 남자 한 명이 태웅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몸은 본능적으로 힘을 주었지만, 태웅은 저항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거친 쇠문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천 사이로 희미하게 꿉꿉한 냄새가 난다.
“왔군. 벗겨.”
익숙한 창진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곧바로 창진에게 따지려고 했던 태웅은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처참한 모습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며칠 전에 지원우가 하 기자를 찾아갔다고 하던데.”
맞다. 태웅이 처음 알아본 그대로, 떡이 된 저 남자는 지원우가 맞았다.
“지원우가 그때 하 기자에게 무슨 말을 했지?”
원우를 바라보고 있는 태웅의 등 뒤로 묵직한 발소리가 났다. 태웅은 가뭄이 난 목구멍에 침을 흘려 보냈다.
여기서 내가 뭐라고 해야 할까.
머리가 빙빙 돌고, 다리가 떨렸다.
“지원우 씨는 그저…….”
창진을 본 태웅은 다시 한번 원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원우의 입이 아주 자그마하게 움직였다.
‘아…… 이…….’
위기의 순간이 오면 모든 감각이 곤두선다. 태웅은 원우가 말하는 걸 정확히 알아들었다.
“저에게 아이에 관해 아는 것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 이상은 저도 모르고요.”
딱딱하게 굳은 뺨을 억지로 움직였다. 창진은 원우의 말과 일치하는 태웅의 말에 눈썹을 치켜떴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 고작, 그것뿐이었다고?
창진의 의문은 태웅에게 엄청난 협박으로 다가왔다. 태웅은 무고하다는 듯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정말입니다, 회장님. 제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습니까.”
“그렇지. 하 기자는 청렴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폭행하는 건 정당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적절한 훈육을 한 건데.”
원우를 빼내려던 일말의 시도는 창진 앞에선 쓸모없었다.
“개한테는 매가 답이야. 아무리 어르고 달래 봐야 캉캉대며 기어오르지. 그걸 찍어 눌러 줘야 하는 게 주인의 도리고.”
그렇게 말하는 창진의 표정엔 죄책감은 전혀 없었다. 태웅은 순간 도운의 말을 떠올렸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돈이 있는 자는 무섭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무서울 게 없다. 그걸 이제야 확인하고 체험한 태웅은 그 질문에 이제야 답한다.
나는, 감당하지 못한다고.
‘손제인과 채연이 친자매입니다.’
지원우가 말한 진실로 심창진을 들쑤시는 일은 더더욱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러면 제인이는?
‘제인아, 너 지금 엄청 위험해…….’
비겁한 자의 속마음은 두려움으로 흔들린다.
* * *
[은선 씨.]
[문득 은선 씨 생각이 났습니다.]
은선은 지난번에 국현에게서 온 문자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만져지지는 않지만, 보이는 글자는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한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도 의지할 사람 하나 없어서일까. 국현은 종종 이런 식으로 은선을 찾았다. 그리고 이따금 보이는 다정한 언동이 그의 고독함을 더 극대화하는 것 같아 은선은 마음이 아팠다.
“그래…….”
씁쓸한 미소는 금방 현실을 띄워 올린다. 국현이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엄마 정옥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기도 하다. 이 나이 먹고 철없이 설레는 동안 국현은 뭔가를 알아내고 그녀를 부른 거일 수도 있다.
“그래, 그런 거야.”
그러니 후회할지언정 그가 만약 무언갈 물어보면 솔직해지자. 과거를 더는 감추지 말자. 제인이를 위해서라도, 도운이를 위해서라도.
“모른다면 내가 제인이의 존재를 알게끔 말할 거야.”
굳게 다짐한 은선의 눈빛엔 쉬이 꺼지지 않을 결의가 서려 있었다.
* * *
부지런히 출근하는 제인의 발목을 붙잡은 건 호텔 라운지 앞에 쌓여 있는 수북한 체리 박스였다. 마침 근처에서 수량 조사를 하고 있던 호텔 지배인이 제인을 발견하곤 살갑게 다가왔다.
“서 전무님 일 처리가 상당히 빠르십니다. 시일 내에 올 수 있는 나라부터 알아보시더니 하루 만에 전용기를 타고 날아온 체리들이지요.”
“그게 가능한가요?”
“괜히 에덴 호텔이 전 세계를 주름잡겠습니까. 손 기자님 덕분에 저도 뿌듯합니다. 유기농 체리 음료 기사가 뜬 후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워요. 벌써 라운지를 예약하시는 이용객들의 시음 예약도 폭주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도운의 업무 처리 능력은 빠르고, 공격적이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단번에 밀어붙이는 결단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어? 두 분 같이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저도 좋은 아침입니다.”
교진이 다가왔다. 상냥한 아침 인사를 건넨 그는 다급해 보이는 듯, 전달 사항을 깔끔하게 이야기했다.
“잘됐다. 제인 씨는 오늘 위로 올라오지 마시고 여기서 일하면 될 것 같아요.”
“라운지에서요? 왜요?”
교진은 지배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게 죽였다.
“사실 어제 도운이가 술에 떡이 됐거든요. 서울 병원 이사장이랑 접대 자리 갖느라.”
“접대요?”
가시처럼 거슬리는 단어에 미간을 구기자 교진은 두 손을 저었다.
“아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여자 있는 그런 접대 자리는 죽어도 아니니까. 단순히 서울 병원 이사장이랑 가지는 술자리였어요. 이럴 줄 알았는지 도운이가 잘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묻기도 전에 교진이 귓속말을 속삭였다.
“자기한테 여자는 손제인뿐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시킨 걸 또 그대로 전달한 교진은 속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우웩. 죄송합니다. 제인 씨한테 그러는 건 아니고요.”
가슴을 퍽퍽 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니 제인은 부끄러워졌다.
“그런 말은 굳이 안 전해 주셔도 돼요. 누가 보면 저 전무님이랑 연애하는 줄 알겠어요.”
“지금은 물론 도운이 혼자 절찬 연애 중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제인 씨도 도운이 옆에 있을 거잖아요. 그리고 도운이 서울 병원 이사장이랑 술 마시는 것도 사실 제인 씨를 위해서예요.”
“저요? 왜 저를 위해서…….”
“거기서 회장님 아이가 예전에 진찰을 봤었거든요. 심채연도 거기서 태어났고.”
확연히 낮아지는 교진의 음성에 제인의 심장은 선뜩해졌다.
그럼 요즘 들어 정신없이 바빴던 게 다…….
“도운이는 한번 시작하면 무조건 해내고 말아요. 오늘도 서울 병원 이사장이랑 다시 한번 술자리를 가질 것 같긴 한데……. 이게 문제가 아니라, 오늘은 도운이가 올라오지 말고, 음료수 맛 좀 평가하고 그에 관련된 기사 쓰고 일주일 안으로 본인은 에덴 에리스로 입주한다는 기사도 넣으라고 했어요.”
교진의 말로 제인은 예리한 감을 잡았다. 김정배가 이사장직에 있는 서울 병원은 제인이 태어난 곳이다. 심창진의 친구이자 제인과 접점이 있는 그를 만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도운이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제인은 순간 느껴지는 울컥한 감정에 쉬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지배인님, 혹시 미리 시험 삼아 만들어 둔 체리 음료수 있나요?”
“예, 있습니다.”
교진의 부탁에 지배인은 체리 주스를 가져왔다. 가루로 타 인위적인 색깔을 만들어 낸 체리 에이드와 달리 생체리 주스는 그야말로 고농축으로 응집된 붉음의 향연이었다.
“제인 씨가 마셔 봐요.”
“……네.”
지금 제인이 느끼는 뭉클한 감동처럼.
제인은 빨대를 입에 물고 체리 주스를 빨아들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너무 달아요.”
“이런. 아가베 시럽을 조금 넣었는데, 그게 자극적인가 보군요.”
“우리 손제인 기자님이 체리 박사십니다. 체리 주스의 완성을 장식하실 분이고요. 함께 맛을 조율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그럼 이만 올라가 볼게요!”
달아도 너무 달다. 나름 유명한 호텔이고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들이 많이 방문하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너무 달아서 심장이 아플 지경이다.
홀로 고생하고 있을 서도운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체리는 충분히 다니까 설탕은 굳이 안 넣으셔도 될 것 같아요. 필요하다면 선택 사항으로 따로 가져다드리는 게 나을 것 같구요.”
“그게 좋겠습니다. 여러 방도로 만들어 볼 테니 시음 부탁드립니다, 손 기자님.”
자꾸만, 자꾸만 서도운이 심장에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 * *
다시 헐레벌떡 집무실로 올라온 교진은 숨을 크게 뱉었다.
“사랑의 메신저 완료.”
고개를 젖히고 앉아 있던 도운은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며 몸을 바로 세웠다.
“잘했어.”
“속은 괜찮냐?”
“김정배 그 인간, 금도를 조지자니까 내 위장을 조졌어.”
도운은 술의 시옷 자만 떠올려도 위가 쓰렸다. 김정배의 주량을 버틴 도운의 얼굴은 상당히 까칠해 보였다.
“야, 그럼 조금 더 쉬어. 너 이따 또 김 이사랑 자리한다며.”
“시간 없어. 해야 할 일이 많아.”
친구의 걱정은 알지만, 도운은 지금 하루를 쪼개서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