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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51화 (51/79)

51화.

밀폐된 창고 안에는 어둠이 자욱했다. 백주인 바깥 상황과 달리 이곳에는 피 끓는 원우의 신음이 가득했다.

“윽! 으읏……!”

원우는 찬 창고 바닥에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실눈을 뜨면 보이는 덩치들의 무수한 발이 그의 등을 차고 배를 가격했다.

그 앞에서 영화를 감상하듯 끔찍한 폭행을 자행하고도 태평한 창진은 잠시 그들에게 손을 들었다. 작은 신호에 덩치들의 폭행이 멈추었다. 귀에 꽂힌 이어폰을 잡아 뺀 창진은 상대의 성미만큼 급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야.”

-심창진, 너 정말 나한테 사과 안 하냐?

씩씩거리는 숨소리의 주인공은 정배였다. 어딘가 기고만장한 목소리인 것 같기도 하다. 창진의 입꼬리는 능란한 호선을 그렸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이 오십 넘어 주먹질한 거 가지고 사과라니. 원한다면 해 줄게. 미안해.”

-야, 이 새끼야. 너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

“맞는 게 그렇게 억울하면 앞으로 내 앞에서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너 후회할 거다. 두고 봐.

“글쎄. 그런 감정은 이미 팔아 치운 지 오래라서.”

새파란 협박도 가볍게 절단한 창진은 원우를 턱짓했다. 동시에 빨래처럼 축 늘어진 원우의 몸을 덩치 두 명이 우악스럽게 잡아 무릎을 꿇어앉혔다.

“지원우.”

눈높이를 맞춘 창진은 손등으로 원우의 뺨을 매섭게 날렸다. 피멍이 들어 달걀이 들어찬 것 같은 두툼한 눈두덩이 힘겹게 벌어진다.

“정말 사국현의 또 다른 아이에 관해 모른다 이건가?”

“모, 모릅니다……. 정말 알지 못합니다…….”

“그럼 하태웅 기자는 왜 만난 거지?”

“사국현…….”

한 마디를 내뱉자 배 속 장기가 아우성친다. 쿨럭, 하고 기침한 원우의 입가엔 새빨간 혈흔이 줄지어 흘렀다.

“사국현의 아이가 있다는 말에…… 혹시 아는 것이 있나, 만난 겁, 윽! 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지금은 죽어도 사국현의 아이가 손제인이라는 말은 못 한다. 본래 계획은 하태웅을 자극해 심창진을 망치고, 채연을 데리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정말 배은망덕한 개새끼처럼.

그러나 자신이 잡혀 있는 이상, 모든 과거를 토로하면 이를 함께 숨긴 채연이 위험해질 수 있다. 국현의 아이라는 이유로 제인을 죽이려는 창진이다. 부정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가 채연을 특별히 아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채연이를 가져야 한다는 저열한 소유욕에 그만 뒤를 살피지 못했다.

“네가 끝까지 모른 척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 볼 생각이야. 카메라.”

창진은 원우를 끝까지 주시한 채 손을 뻗었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창진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생각하기도 전에 창진이 원우의 사진을 찍었다.

“자, 여기 보고.”

찰칵! 찰칵!

여러 번 셔터를 누른 창진은 만족한 듯 사진을 확인했다. 그리고 친히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설명해 주었다.

“참고로 이 사진은 심채연에게 보여 줄 거야. 몸을 섞은 남자니 널 담보로 협박하면 사국현의 또 다른 아이에 관해 불지 않겠어? 심채연은 어릴 때부터 제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니 분명 어디에 있는 지 알 테니까.”

“회장님. 아가씨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차라리 저를, 윽……!”

“닥쳐. 판단은 내가 해.”

순간 속에서 불길이 치솟은 창진은 원우의 머리를 후려쳤다.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른 원우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후으…….”

창진은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이상한 곳에서 충직한 지원우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하태웅 기사를 만나볼 거야. 이 실장?”

“네, 회장님.”

“하태웅 기자 불러.”

창진의 눈에는 더는 뵈는 게 없었다.

* * *

자신이 고른 에덴 에리스로 온 제인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촌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지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초호화 펜트하우스였다.

“저 이런 집 영화로만 봤지 실제로는 처음 봐요.”

제인은 입주 조건마저 까다로운 이곳을 합법적으로 돌아다녀 보았다.

오트밀 색상으로 반짝거리는 대리석 거실은 기본 옵션이었고, 천장은 높고 딱 트여 있었다. 베란다 밖에는 또 다른 테라스가 있어 흡사 별장에 놀러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도운은 피식 웃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제인의 뒤를 밟았다.

“여기서 살면 어떨 것 같아?”

“당연히 좋겠죠.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집에 대한 로망이 있는 제인은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이곳이 싫다는 사람은 아마도 서도운보다 어마어마한 부자일 게 틀림없다.

“결정은 전무님이 하셔야겠지만, 전 여기가 초코가 누비기 딱 좋은 것 같아요.”

“그때 내가 내 준 숙제는 생각해 봤어?”

“인테리어요?”

“응.”

“생각은 해 봤는데 제가 그쪽 전공은 아니라서 어려워요. 설계도도 만들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의 사회학과를 나와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했지만, 건축과 건설 쪽으로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도운은 아무렴 어떠냐는 듯 다정한 행동을 보여 준다.

“넌 절대 어렵게 생각하지 마. 편하게 생각하면 돼.”

“어떻게요?”

“네 머릿속에 있는 걸 나한테 보여 줘.”

제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린 도운은 없는 종이를 대체할 자신의 손바닥과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여기다 그려.”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는 도운의 손바닥은 정말 크고, 드넓었다.

“재미있을 거야.”

왼손을 내민 도운은 오른팔로는 제인의 어깨를 다정하게 그러안았다. 잠시 주춤한 제인은 도운의 손을 잡고 만년필을 놀렸다.

“사실 특별할 것도 없어요. 밖에선 회사니, 사람이니 빽빽하게 치여 사는 요즘이니까, 거실은 지금은 크고 넓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인은 도운의 손바닥 위로 반듯한 정사각형을 그렸다. 그리고 모서리에 각을 표시하듯 네모 하나를 더 그린다.

“대신에 방 안에 방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방 안에 방? 내 집무실처럼?”

“네, 잘 때는 또 이런저런 생각에 휩쓸리잖아요. 사람들이 홀로 걱정에 부유하지 않도록, 차가운 밤이 외롭지 않도록, 형제나 자매를 위한 방처럼 방을 붙여 놓는 거예요. 어차피 문은 설계해야 하니까 사생활 침범의 문제는 없고요.”

“막 아이를 낳은 부부들에게도 좋겠네. 요즘엔 아이의 독립성을 위해 잠을 따로 자는 추세니까.”

“맞아요.”

그림을 그리고, 서툴게 내뱉은 의견에 호응해 주고.

“재미있지, 제인아.”

“네.”

고개를 끄덕인 제인은 도운을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즐거움으로 찡그려진 코끝을 보니 도운은 참을 수 없어졌다. 고개를 숙인 도운은 제인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맞대 좌우로 문질렀다.

“너도 웃는 널 보니까 좋아.”

너무 행복해.

* * *

제인을 퇴근시킨 도운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김정배가 중화요리를 좋아한다는 걸 입수한 도운은 오늘 하루 고급 중식당인 청홍각을 통째로 예약했다.

고급 정보를 줄 귀한 인력에게 이 정도 사치는 아무것도 아니다. 도운은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느슨하게 떨어뜨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우리 이사장님, 얼굴이 무척 안 좋으십니다.”

“에라이, 씨.”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농락당한다고 생각했는지 정배는 발끈했다. 그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얼굴 곳곳엔 멍이 퍼져 있었고, 아파서 문지르는 입술은 찢어져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정배는 분한 듯 책상을 쾅 내리쳤다.

“알면서 떠보지 마. 나도 지금 심창진 조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니까.”

정배는 다리를 달달 떨며 맞은편에 앉은 도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래서. 나한테 심창진의 뭘 원해서 만나자고 하는 거지?”

도운은 눈썹을 여유롭게 들어 올렸다.

“역시 병원 이사장님이어서 그런지 주삿바늘보다 예리하십니다.”

“서도운이 곧 사국현 아닌가. 사국현과 심창진은 세기의 원수고. 내 얼굴도 사국현 이야기를 꺼냈다가 이 지경이 된 거야.”

이야기의 전개는 의외로 빨랐다. 상대가 당기는데 도운이라고 물러날 이유가 없다. 도운은 거칠 것 없이 목표를 읊조렸다.

“그럼 저도 심창진 조지는 일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금도를 박살 내는 쪽으로요.”

“그 방도가 나한테는 없을 텐데?”

“아니요, 있습니다.”

잠깐의 침묵을 둔 도운의 눈에는 이채가 반짝였다.

“20년 전 최연정의 산부인과 진료 기록.”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정배는 인상을 구겼다.

“뭐? 그건 왜.”

“진료 기록을 먼저 알려 주시면 저도 말씀드리죠.”

금방 또 의심의 방패를 세우는 정배에게 도운은 거래를 했다. 김정배가 고민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건 서울 병원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배의 얼굴에 어린 비열한 노기가 이 대화의 결말을 쉬이 짐작하게 했다.

정배는 초조한 듯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볐다.

“다른 쪽은 안 되나? 심창진의 불법 투기나 자금 세탁 같은 거.”

“자질구레한 것도 버무려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긴 합니다만 이왕이면 더 큰 걸 들어야죠. 그런데 우리 심 회장은 불법 투기까지 했나 봅니다?”

윽…….

실수한 정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 봤자 도운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분이긴 하다.

허허벌판을 전형적인 부촌의 성지로 만들어 내는 심창진. 일용한 양식이 나던 땅에서 부귀를 누렸으니 이제 그 영화는 막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도운은 비스듬하게 올린 입꼬리처럼 독한 고량주를 정배와 자신의 잔에 따랐다.

“그럼 우리,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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