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죄송합니다, 기사님. 출발해 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고개를 숙이며 웃어 보이는 도운이 있었다. 당황한 제인은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전무님이 왜 여기 계세요?”
“직업이 기자여서 그런가, 달리기가 왜 이렇게 빨라. 몇 번이나 불렀어.”
“저 데리러 오신 거예요?”
“응, 어제 얼굴 못 봐서 밤새 보고 싶었잖아.”
도운은 얼빠진 제인의 뺨을 두어 번 건드리곤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거짓말은 아닌지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도운의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 교진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인다.
“제인 씨, 정말 급했나 봐요. 오타 작렬.”
“나한테 연락을 해야지 왜 쟤한테 해.”
“이럴 땐 질투가 아니라 걱정을 하는 거다, 친구야. 제인 씨, 어제 늦게 주무셨나 봐요.”
“네, 좀.”
“왜. 또 꿈에서 네가 너를 원망했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장난스러울 땐 언제고 잠을 자지 못했단 말에 도운은 제인의 까칠한 뺨을 손으로 한번 훑어 내렸다. 짧지만 염려 가득한 손길에 볼이 더워진다. 아직 5월인데 벌써 여름이 오려나.
제인은 태양 같은 도운의 눈빛을 피하며 태블릿을 켰다.
“마침 잘됐다. 어제 시키신 집을 좀 알아봤어요.”
제인은 차곡차곡 정리해 둔 에덴 건설 아파트 자료를 몇 개 보여 주었다. 제인의 옆으로 몸을 바짝 붙인 도운은 관심을 표했지만, 막상 얘기를 시작하자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몇 평이 좋을 것 같아?”
“전무님이랑 초코 두 사람이 살면 그리 넓은 평수는 필요 없지만, 초코의 활동성을 생각하면 중간 정도의 평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인테리어나 구조는?”
“여기가 좋을 것 같아요.”
제인은 말하는 대로 척척 자신이 알아본 인테리어를 짚었다. 거실 베란다가 기본적으로 터 있고, 거주자마다 테라스가 딸려 있어 활동적인 초코에게 적합할 인테리어였다.
도운은 고개를 숙이며 제인에게 시선을 틀었다.
“마음에 들어?”
“네.”
“그래, 그럼 여기로 들어가자.”
그런데 대화가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난 것 같다. 제인은 인상을 찌푸리고 도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 설명 듣긴 하신 거죠?”
“당연하지. 딱 내 취향이야.”
아휴, 저 화상. 아니, 사랑꾼이라고 해야 하나.
도운의 속셈을 아는 교진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거치대에 올려 둔 교진의 전화가 울렸다.
“네, 배교진입니다.”
상대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으로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김정배 이사장님 비서 이창훈입니다.
확실한 신분을 이야기하는 말이 흘러 나오자 도운과 교진은 룸미러로 시선을 교환했다. 교진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시죠?”
-저번에 전무님께서 요청하신 석찬 자리, 이사장님께서 오늘 저녁은 어떠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오늘 저녁에 뵙겠습니다. 장소와 시간은 근사한 곳으로 저희 쪽에서 예약하도록 하죠.”
사무적인 전화가 끊겼다. 주된 이야기가 생략된 통화 내용에 제인의 머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김정배 이사장이라면 심창진과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을 서도운이 만났다는 건, 김정배와 심창진 쪽에 어떠한 일이 터졌다는 뜻인데…….
기사 작성을 핑계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쉽게 이야기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역시나 도운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미소로 제인에게 물었다.
“아침은 먹었어?”
“아니요, 카페 가려고요.”
“체리 에이드?”
“네.”
“교진아, 이 앞에서 차 세워.”
도운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차는 호텔 정문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도운의 차를 알아본 도어맨이 문을 열었다. 라운지 카페로 도운이 입장하자 일을 하던 직원들은 일사불란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여기 체리 에이드 하나만 줘요.”
서도운의 행동과 말은 전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도운은 주문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불편한 기색은 없는지 자꾸만 살폈다. 이를 보는 제인의 가슴은 자꾸만 뛰었다.
“제가 주문해도 되는데요.”
“내가 이거 하나 못 해 줄까.”
지금 더한 것도 하려고 준비 중인데.
카페 라운지는 오픈형 인테리어였다. 그래서 음료 제조법이 훤히 보이는데, 도운의 눈에 석연치 않은 게 눈에 밟혔다.
“주문하신 체리 에이드 나왔습니다.”
“이거 그냥 설탕 덩어리네요?”
“네? 아, 체리 분말로 만들긴 합니다.”
“지배인 좀 부릅시다.”
예상치 못한 호출에 라운지 직원들은 일동 당황했다. 제인도 살짝 당황해 손에 쥔 체리 에이드를 더 맛있게 빨아들였다.
“이건 이거대로 맛있어요.”
“더 맛있게 만드는 것도 내 업무 중 하나야.”
“부르셨습니까, 전무님.”
곧 긴장한 기색의 지배인이 오자 도운은 거침없이 일을 진행했다.
“앞으로 카페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메뉴는 생과일로 해요. 미국 워싱턴에도 에덴 호텔 있으니까 체리는 앞으로 거기서 받아 오고.”
“하지만 전무님, 그렇게 되면 음룟값이 너무 인상됩니다.”
“아니요, 음룟값은 동일하게 갑니다. 건강과 유기농에 예민한 요즘이니 생과일로 바꾸면 분명 수요도 늘어날 거예요.”
확신에 찬 음성은 다시 제인에게로 향했다.
“그러면 넌 뭘 해야겠어?”
제인은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생각했다.
“에덴 호텔 카페의 음료가 생과일로 바뀐다는 기사를 내야겠죠.”
“정답. 그리고 하나 더 있어.”
“뭔데요?”
“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돼.”
훅 다가오는 도운의 얼굴에 체리 에이드를 머금은 제인의 입안이 찌릿해졌다.
“그게 네가 나한테 주는 선물이니까.”
설탕 덩어리. 맞다. 이 체리 에이드는 달아도 너무 달았다.
“오후엔 나랑 집 좀 보러 가자. 실물로 보는 거랑은 또 다를 수 있으니까.”
“……네.”
너무 달아서, 심장이 자꾸만 붉게 물드는 기분이다.
* * *
국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교진의 보고를 들었다.
“전무님께서 판을 만드실 겁니다. 회장님은 그때 김정배 이사장과 접촉해 최연정 씨의 산부인과 진료 기록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심채연이 정말 꿈으로 보육원 출신이란 말이지.”
“전무님 말로는 확실합니다. 금도 쪽에선 그 사실을 아이 교육과 최연정의 원정 출산이라는 명목하에 숨긴 것 같고요.”
그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폭탄이었다. 너무 혼잡하게 엉켜 제 아이의 출생일마저 기억도 안 날 지경이다.
설마, 심채연이 정말 제 아이라면…….
눈을 감은 국현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만 갔다. 상사의 고뇌와 고통을 아는 경식은 흔들리는 국현을 잡아 주었다.
“확실한 내용은 손은선 씨에게 여쭤보면 되지만, 지금은 행동을 아끼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어제 전무님이 지원우 측에 사람을 붙였습니다. 지원우 씨가 하태웅 기자와 접촉했다더군요. 게다가 심창진도 지원우 씨를 미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원우는 왜 하태웅 기자와 접촉을 한 거지?”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진은 알고 있지만, 침묵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도운이 모든 사건을 알아낼 때까지 말을 아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군…….”
힘겹게 눈을 뜬 국현의 눈에는 피로의 쌍꺼풀이 짙어졌다. 국현은 핸드폰을 들어 이 순간 생각나는 여인에게 문자를 해 보았다.
[은선 씨.]
[네, 국현 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장 오는 답장. 침울하게 내려간 입꼬리가 순식간에 살짝 생기를 띠었다.
화면을 배회하던 손가락이 의도한 것과 다른 문장을 만들어 냈다.
[그냥,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확실히 확인하는 건 나중 일이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웠다. 만약 정말 심채연이 제 아이라면. 딸의 존재 여부에 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국현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지금은 심창진과 최연정이 감춘 산부인과 진료를 알아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오랜만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국현은 제인이 주었던 샌드위치를 떠올렸다.
손은선처럼 또 문득 생각나는 아이.
국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검은 봉지를 꺼내는 국현을 보며 경식은 놀란 듯 물었다.
“체리 드시려고요?”
“약속해서 말이지.”
국현은 표면이 매끈한 체리 하나를 입 속에 집어넣었다. 치아로 짓이기자 상큼한 과즙과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감돈다.
심채연이 정말 채연이라면 그 아이도 체리를 좋아할까?
손제인 기자처럼?
하지만 이상하게 심채연 쪽으로 뻗어 난 상상은 다시 손제인으로 돌아간다.
손제인, 손제인, 손제인.
“그 아이는 오늘도 체리를 먹었으려나…….”
궁금증을 닮은 혼잣말이 허공에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