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내 예상을 벗어나지를 않아서 놀랍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사람은 서도운이었다. 놀란 원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도운은 곧장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너, 내가 입조심하랬지.”
퍼억, 주먹이 살갗을 스치는 둔탁한 소리가 룸 안에 퍼졌다.
“가벼운 입 그냥 뭉개 줘?”
“윽!”
방심하고 있던 원우는 강한 힘에 못 이겨 바닥에 쓰러졌다. 도운은 가차 없이 원우의 목을 구두로 눌렀다. 목에 핏대가 서고 얼굴이 터질 것 같은 원우를 보며 태웅은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하지만 떼어 낼 수 없었다. 도운을 따라 들어온 교진이 태웅을 벽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우와 이곳에 들어왔을 때 몰래 켠 만년필 녹음기까지 교진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 개자식아!”
태웅은 녹음기마저 들켰다는 생각에 아연실색해서 소리쳤다. 도운은 자신의 발목을 붙잡으며 바르작거리는 원우의 목을 더 세게 짓누르면서 비웃었다.
“칭찬해 주니 고맙네. 지금 내 꼴이 누가 봐도 주인 지키려는 개새끼처럼 보이긴 하지?”
“나, 날 미행한, 게…… 큭, 당신, 이야……?”
폐부로 들어오는 소량의 공기를 붙잡아 원우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도운은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이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나도 있었고, 심 회장도 있었고.”
그러자 도운을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했던 원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심 회장이 나를? 그럼 채연이는…….
“……안 돼.”
발에서 슬쩍 힘을 풀어 주니 원우는 혼미한 몸을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나간다. 도운은 그 뒷모습을 보다 태웅에게 빙글 몸을 돌렸다.
“쟤는 진짜 개새끼네. 널 여기다 혼자 두고 나가고.”
도운이 뚜벅뚜벅 태웅의 앞으로 다가갔다. 교진이 물러선 지 오래지만, 태웅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말을 짓씹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네가 그냥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거.”
도운은 포악한 손을 뻗어 태웅의 멱살을 비틀어 짰다. 마주한 눈동자 안엔 섬뜩한 칼날이 도사리고 있었다.
“난 너와 제인이에 대한 어떤 것도 공유할 생각이 없어. 내가 알아서 탄탄대로를 만들 텐데 네까짓 게 뭐라고 끼어들어.”
숨이 조여 와 태웅은 얼굴을 구기면서도 자존심을 부렸다.
“그래도…… 들은 사실입니다.”
“그럼 잊어.”
하지만 도운은 가차 없었다.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심창진을 들쑤시면 제인이가 너한테 갈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너는 감당 못 해.”
“…….”
“우리가 뒤에서 이 짓 하는 거 보면 답이 나올 텐데. 원하는 목표가 있으면 사람이 얼마나 비열하고 악랄한지.”
솔직한 심정으로 찔렸다. 그리고 무서웠다. 두 가지 감정이 태웅을 참 용기 없는 사내로 만들었다. 그 태도가 도운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그냥 살던 대로 조용히 사세요, 하태웅 기자님.”
도운은 태웅의 멱살을 집어 던지듯 놓아주었다.
채연이가 위험하다.
그 일념 하나로 뛰쳐나간 원우는 순간 찢어지는 두통을 안고 눈을 떴다. 마지막 기억은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는 것뿐이다.
“윽.”
어질어질한 시야를 되돌리고 주변을 살피니 낯선 창고였다. 그리고 제 앞에서 이어폰을 낀 채 발을 까딱이고 있는 창진이 보였다. 원우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회장님…….”
“아, 이제 정신 차렸나?”
유쾌한 미소를 지은 창진은 이어폰을 빼며 말했다.
“원우야, 개는 주인 앞을 막는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원우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데 감히 나를 뒤에 두고 꼬리를 물게 해?”
한마디로, 아까 자신을 미행했던 차는 서도운이 아니라 심창진이었다. 원우는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림자처럼 뒤에서 이 짓거리 하는 것도 성가신데 말이야.”
핏줄이 불거진 손이 무언가와 연결된 이어폰을 확 잡아 뺐다. 그러자 이곳엔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원우가 연락이 안 돼요.
“채연아…….”
-지금은 아빠 심기가 안 좋으니 얌전히 있으렴.
원우는 그만 채연의 이름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창진은 고개를 저으며 가죽 장갑을 손에 끼웠다. 말 안 듣는 개에겐 합당한 벌을 줘야 한다.
“그전에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창진은 장갑을 낀 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빳빳한 가죽이 손아귀에 부대끼는 소리는 금방이라도 원우의 목을 조여 올 것만 같았다.
“사국현의 또 다른 아이. 너라면 어쩐지 그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모릅니다. 전 정말 알지 못합니다, 회장님.”
원우는 숨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손제인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손제인의 정체가 들키면 이를 함께 알고 있던 채연 또한 위험해진다.
애초에 심창진이 그를 납치한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최연정과 심채연. 그 두 여자의 속내와 배신을 알아내고자 함이 분명했다.
“그래? 그럼 심채연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긴 한데…….”
“…….”
“그걸 내가 믿을 수 있어야지.”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창진이 아니었다.
“매 좀 맞자, 원우야.”
원우의 뒤에서 나타난 건장한 사내 두 명이 그의 팔을 포박했다. 창진은 그대로 원우에게 주먹을 날렸다.
* * *
지난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한 채연은 연정과 창진이 나오기 전에 다급히 별채로 향했다.
“원우야…….”
별채의 문은 역시나 굳게 잠겨 있었다. 늦게 들어와 잠을 자는 거라고 믿고 싶어도 원우의 유일한 이동 수단인 오토바이마저 보이지 않았다.
연락도 없이 외박할 원우가 아니었기에 채연의 가슴은 더욱 불안하게 파도쳤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본채로 돌아갔다. 거실에선 연정이 난을 닦고 있었다. 채연은 그녀의 발치에 서서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했다.
“원우가 없어요, 엄마.”
난을 닦는 고요한 손길만큼 연정의 말씨는 참 태평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찾아야죠.”
“겨우 하루 안 들어온 것뿐이야. 괜한 소란 피워서 아빠 귀에 들어가게 하지 마. 성가셔지니까.”
“원우가 없어졌는데 엄마는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네가 이렇게 종종거리는 게 성가시고 귀찮을 뿐이야.”
내뱉는 말은 가차 없고 뾰족하다. 연정은 항상 그랬다.
타인보다 못한 남.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채연의 오기는 충동처럼 튀어나온다.
“사국현 회장이 실종돼도 이러실 건가요?”
허를 찌르려는 채연의 화살은 연정에겐 그저 간지러울 뿐이다. 그녀는 비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얘, 채연아.”
두 눈매와 입가가 한껏 이죽거린다.
“그 사람은 날 못 떠나. 20년 넘게 이어진 사랑이 쉬이 끊어지겠니?”
“엄마는 왜 이렇게 매정한 거죠? 저하고 제인……!”
“조용.”
연정이 눈동자를 옆으로 돌리며 날카롭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왜 그래.”
창진이 넥타이를 조이며 침실에서 나왔다. 그가 내뱉은 단순한 말에 채연은 창진에게 기대를 걸었다.
“아빠, 원우가 집에 안 들어왔어요.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여자라도 만나러 간 모양이지.”
“원우한테 여자는 없어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창진의 억측에 채연이 발끈하자 창진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할 말을 잃은 채연의 입술이 버석하게 말랐다. 연정은 몰래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성인 남자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을 당했을 리는 없어. 부산 떨지 말고, 네 엄마처럼 얌전히 집에 있기나 해.”
“……알겠어요.”
다들 너무하다. 그래도 원우도 한 식구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기침처럼 차올랐지만, 채연은 포기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창진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늘은 뭘 하고 있을 거지?”
“평소처럼 집에 있어야죠.”
“좋군. 그럼 난 다녀오지.”
연정의 턱을 한 번에 끌어 올린 창진은 그녀의 입술을 진득하게 훔쳤다. 창진마저 자리를 뜨자 연정은 채연이 사라진 2층을 보며 눈썹을 구겼다.
“기대할 사람한테 기대해야지.”
연정은 어젯밤 늦게 들어온 창진의 셔츠에서 핏자국을 발견했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들어오지 않는 지원우는 남편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는 걸.
그 사실을 딸에게 말해 봐야 더 큰 소란만 있을 것이다. 또 까딱하면 채연이가 손제인 이야기를 하겠지.
“눈치껏 행동해야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연정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의문의 대상에게 문자를 보냈다.
[슬슬 사국현과의 염문설을 뿌릴 때가 된 것 같네요.]
답장은 빨랐다.
[준비하겠습니다요.]
* * *
지각이다. 어젯밤 퇴근을 해서도 도운과 초코가 살 집을 찾아보다 그만 알람 소리도 못 들어 버렸다.
제인은 도운에게 보여 줄 태블릿을 고이 안고 때마침 다가오는 버스를 향해 힘껏 내달렸다. 한 손으로는 교진에게 다급한 연락을 취했다.
[배 비서님, 제가 오늘 좀 읒을 것 가터요. 되공해요.]
너무 급해 오타가 난무했지만, 말없이 늦는 것보단 낫다. 다행히 버스는 달려오는 제인을 발견했는지 기다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기사…….”
숨을 헐떡인 제인이 막 버스에 올라설 무렵이었다. 익숙한 팔과 향이 제인의 허리를 감아 올려 다시 바닥으로 번쩍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