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심창진과 김정배 소식은 들었겠지.”
“네, 이미 김 이사장한테 석찬 요청했습니다. 제가 물밑 작업을 할 테니 회장님은 그때 만나서 아이에 대한 걸 들으세요.”
이런 든든함을 보여 줄 때는 아들이 있어 좋았다. 국현은 냉철한 눈으로 허공을 훑었다.
“5월은 난리도 아니겠어.”
도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인이 놓고 간 체리 에이드를 쪽 빨아들였다.
“그놈의 체리는.”
5월 그리고 체리. 그렇게 다시 손제인. 경식이 손제인을 거론한 이후 자꾸만 그녀가 아른거리는 국현은 슬쩍 운을 떼어 보았다.
“손제인 기자. 딱 체리 철에 태어나 체리를 좋아하는 것 같더군.”
“언제 태어났는데요?”
도리어 돌아오는 질문에 국현은 인상을 구겼다.
“넌 좋아하는 여자 생일도 몰라? 5월 24일.”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관심도 없다던 한낱 기자의 생일을 너무 상세히 알고 있다. 늘 그랬듯 도운의 직감은 끝내준다. 지금 이 상태로라면 가려진 진실을 알아내는 것도 식은 죽 먹기다.
“그럼 생일 선물을 준비해야겠네요.”
“어떤?”
“우선 아까 말씀하신 에덴 건설, 저한테 맡겨 보세요.”
앞으로 3주 남은 시점이 제인의 생일이라면 일 처리는 더 신속해져야 한다. 마침 교진이 도운에게 말했다.
“지원우 움직였어.”
단박에 자리에서 일어난 도운은 회의실을 나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 그리고 회장님. 제가 말씀 안 드린 게 있는데요.”
“뭐냐.”
“심채연. 저랑 같은 보육원 출신이에요.”
방심하고 있던 국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 * *
채연은 오늘도 원우의 별채에 은닉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창진을 맞닥뜨릴 수 있으니 고요하고 바람 한 점 없는 별채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불같은 성정의 심창진은 요 며칠 너무 잠잠했다. 당장 결혼이 어그러진 것에 대해 길길이 날뛰고, 서도운이 말한 제 남자가 누구냐고 닦달해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전혀 안 보였다.
뭘까. 왜 이러는 걸까.
채연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불안을 가까이에서 목도한 원우는 비로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가죽 재킷을 입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 거야. 그때까지 본채에 가서 자고 있어.”
“어디 가는데?”
침대 끝에 앉아 있던 채연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 안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잠깐 누구 좀 만나러. 늦지 않을 거야.”
원우는 채연의 불순한 감정을 앗아 가듯 그녀의 눈꺼풀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오면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지 별채엔 오지 마. 회장님 눈에 띄면 안 돼.”
“……알았어. 기다릴게.”
채연의 입술을 진득하게 빨아들인 원우는 곧장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속도를 올리는 만큼 매서운 바람이 헬멧을 때린다.
거침없이 도로를 누비며 도착한 곳은 건국 일보였다. 정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시동을 끈 원우는 헬멧을 벗지 않은 채, 나오는 사람들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우의 목표물인 태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우는 택시를 잡아타는 태웅의 뒤를 쫓았다.
주인도 아닌 인간들에게 개 취급을 당한 원우는 결심했다. 사람을 이용해 그들을 들쑤신 뒤 채연을 데리고 도망가겠다고.
예상대로 하태웅은 다른 언론사의 기자 몇 명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 사국현의 아이를 수소문하고 있겠지.
직업이 기자이니만큼 어느 정도 감을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원우는 오로지 채연을 소유하고 싶은 열망에 비열한 사용하기로 했다.
이야기가 끝난 하태웅이 상심한 표정으로 카페에서 나올 때, 원우는 그의 앞에 섰다. 원우를 발견한 태웅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랑 이야기 좀 하실까요, 하태웅 기자님?”
* * *
회의 중 올라온 제인은 도운의 말마따나 그의 자리에서 기사를 썼다. 하지만 마음대로 승인을 해도 될까.
도운이 올리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와 초코의 거주지에 관한 기사이니 도운이 직접 검토한 후 승인을 내리는 것이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자 그녀가 일을 끝냈다는 걸 알아차린 초코가 제인의 무릎을 앞발로 짚고 일어났다.
“초코야, 너 이사 가면 이제 나랑 얼굴 못 보겠다.”
쫑긋 올라온 귀를 살살 만져 주니 초코의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이 귀여운 행동을 못 본다는 게 너무 아쉽다.
시간이 난 김에 초코가 지낼 수 있는 에덴 건설 소속의 아파트를 찾아보니, 지낼 수 있는 곳은 많아 보였다.
건설 쪽은 워낙에 꽉 잡은 에덴이니 사실 그런 건 제인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긴 했다.
“아, 역시.”
태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위기감이 없다. 제인과 초코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 틈에 온 건지 도운이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빨리 오셨네요.”
“그거 말고 이 대사 해 봐.”
도운은 일어난 제인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앉혔다. 그리고 본인이 대할 때의 고압적인 말투를 흉내냈다.
“무슨 일이지?”
정말 무슨 일일까. 또 무슨 속셈으로 이런 걸 시키는 걸까.
제인의 눈썹이 의심으로 구겨지자 도운은 어깨를 으쓱인다.
“아니, 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너무 공주님 같길래 내가 여왕 자리까지 올려 주고 싶었지.”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승인부터 내려 주세요.”
대충 흘려들은 제인은 도운에게 제가 쓴 기사를 손짓했다.
“승인은 앞으로 네가 내릴 거야.”
“그래도 윗선의 확인은 필수예요.”
“에덴 에리스랑 에덴 빌리지는 왜 찾아본 거지?”
그 이상의 속마음을 감춘 도운은 제인이 찾아낸 에덴 건설 소속의 아파트를 확인해 보았다. 제인은 띄워 놓은 창을 하나씩 클릭하며 설명했다.
“초코가 살 아파트 찾아봤어요. 보니까 에덴 건설은 인테리어가 다 고만고만하더라고요. 평수는 다 넓어서 초코가 답답해하진 않을 것 같구요.”
“너라면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 거지?”
도운은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의자 뒤에서 그러고 있는 터라 넓고 탄탄한 몸이 제인을 끌어안은 것처럼 보였다.
“그건 생각해 봐야겠죠.”
“그럼 생각해 봐. 안 그래도 회장님이 나보고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에덴 더 헤븐 건설도 맡아 보라네.”
“그건 전무님 일이잖아요.”
“간혹 지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니까. 좀 도와줘.”
상체를 숙인 도운은 제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앞으로 3주간은 무척 바빠질 예정이거든. 지금도 바로 나가야 해.”
“힘내요.”
“뽀뽀해 주면 힘날 것 같은데.”
“아, 그래요?”
평소라면 귓가에 닿는 뜨끈한 숨결에 목을 움츠리고 얼굴을 붉혔겠지만, 오늘은 예외다. 도운의 수작에 이미 내성이 생길 대로 생겨 버린 제인은 고개를 휙 돌린 뒤 도운의 턱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쪽.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건 도운이었다. 눈과 입이 탁하게 풀리는 도운을 보며 제인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맨날 허락도 없이 저한테 키스하시잖아요. 하지만 전 허락받고 한 거예요.”
“하…….”
한 방 먹은 도운은 헛웃음을 지으며 제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튕길 때 튕기다가도 이런 식으로 끌어당기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고 싶다. 고로 도운은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지원우가 행동한다는 보고가 들려왔으니.
“시간만 남아돌았으면 물고 빨고 했을 텐데.”
“어림도 없어요.”
“그럼 여기 앉아서 내가 시킨 것 좀 하고 있어. 알았지?”
애정 가득한 손길로 제인의 뺨을 매만진 도운은 집무실을 나섰다.
“주인 없는 방에 있기 좀 그런데…….”
잠시 망설인 제인은 이내 도운이 도와 달라고 한 인테리어에 대해 꼼꼼히 찾아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더 물고 늘어졌을 도운은 오늘 정말 바빠 보였으니까.
* * *
태웅과 자리를 옮기려던 원우는 몇 시간째 도로를 빙빙 돌았다. 백미러로 시선을 옮겼을 때, 아까부터 검은 세단이 뒤를 쫓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따라붙은 것 같네요.”
원우의 낮은 목소리에 태웅의 몸엔 힘이 들어갔다.
“누구인지 아십니까?”
“짐작 가는 사람은 있죠. 서도운. 속도 좀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심창진은 아닐까 하는 미약한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지금 그는 최연정을 감시하느라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헛다리를 짚은 원우는 액셀을 더 세게 밟으며 달리는 차들 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감췄다. 그렇게 한참을 맴돈 뒤에야 두 사람은 프라이빗한 한식 다이닝룸으로 올 수 있었다.
태웅은 테이블 밑으로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원우 씨가 할 이야기라는 게 뭡니까.”
마음이 또 급변한다.
“아니, 제가 먼저 묻겠습니다. 도대체 사 회장의 숨겨진 아이가 누굽니까?”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는 원우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역시나 하태웅은 그걸 알아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길게 끌 필요가 없다.
“하태웅 씨, 손제인 기자 좋아하죠?”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태웅의 입이 굳게 닫혔다. 저 입은 이제 경악으로 벌어질 것이다.
“그럼 심 회장 찾아가서 들쑤셔 줘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손제인이랑 채연이, 친자매거든요.”
“뭐라고요……?”
역시나. 태웅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최연정과 사국현 사이의 아이가 뜬소문이 아니라는 걸 직접 들었을 때, 어느 정도 직감이 오긴 했다.
하지만 타 언론사 기자들을 만나 물었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제 예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진짜였다니.
“그럼 사 회장의 딸이…….”
“손제인입니다.”
“……지원우 씨는 그걸 왜 저한테 말하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심 회장 좀 들쑤셔 달라고.”
배신을 감행하려는 원우의 얼굴은 지독하게 무감했다.
“채연이는 손제인을 데리고 오려고 합니다. 전 그걸 막고 싶고요. 한마디로 채연이가 기댈 사람은 나뿐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제인이가 위험해지잖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태웅 씨한테 말하는 거 아닙니까.”
“…….”
“손제인, 서도운한테 빼앗기고 싶어요?”
가지고 싶으면 빼앗아야지. 뺏기기 싫으면 지켜야지.
원우는 태웅의 심정을 알기에 그를 자극했다. 작게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태웅의 욕심을 긁어 내리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거칠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