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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47화 (47/79)

47화.

바쁜 평일이 될 거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교진은 구운 식빵을 꿀꺽 씹어 삼키며 경식에게 되물었다.

“아부지, 지금 뭐라고 했어? 심 회장이 서울 병원 이사장을 팼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들려온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래. 지금 김정배 얼굴 떡 됐단다. 심창진 고소하겠다고 난리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은 간다. 아주 오래전부터 국현을 전담한 경식은 심창진의 성정과 김정배의 깐족거림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분명 김정배는 회장님이 거론한 아이 문제와 결혼 결렬로 안 그래도 열 받은 심창진을 제대로 긁었겠지. 김정배는 팝콘이나 물고 재미를 보려다가 호되게 당한 것이다.

“너 알지. 회장님이 최연정 산부인과 기록 알아본다고 한 거.”

“알지. 설마, 그 병원이…….”

제 아버지가 별 뜻 없이 이런 소리를 할 리는 없다. 정보를 요긴하게 활용할 줄 아는 교진이 뜨악, 하자 경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산부인과가 김정배 병원 소속이야.”

“어어?”

지옥 같은 월요일의 징조는 또 다른 진실을 위한 발돋움에 불과했다.

* * *

“체리 에이드 하나 주세요.”

에덴 호텔에 와 좋은 점은 값비싼 호텔 라운지 음료를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출근하자마자 출입증을 건네며 음료를 주문한 제인은 어느새 익숙해진 에덴 호텔의 로비를 걸었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끈한 대리석을 탁탁 치는 신발 끈은 역시나 익숙하지 않다. 풀어진 신발 끈을 보면 심채연이 생각난다. 심채연을 떠올리면 언니가 묶어 주던 신발 끈이 떠오른다.

이틀 내내 꿈에 나타난 심채연 때문에 벨크로 운동화를 다 빤 결과물은 결국 이거였다. 아슬아슬하게 묶인 신발 끈이 힘없이 허물어지는 것. 마치 피로 연결되었지만 옅어진 두 사람의 인연처럼.

하지만 이제 심채연이 아니더라도 신발 끈을 묶어 줄 서도운이 있다. 사람이 가면 다른 사람이 오듯, 풀어졌던 인연은 서도운으로 다시 매듭지어질 수 있다.

“손제인 기자?”

1층 엘리베이터 로비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을 때, 시야 안으로 날렵한 구두코가 보였다.

“회장님.”

“같이 타지.”

다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로 돌아온 국현이었다. 제인은 국현의 권한으로 회장실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국현은 제인이 들고 있는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보니 체리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어색함에 체리 에이드를 한 모금 빨아들인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체리 철에 태어나서 그런가 봐요.”

“생일이 이번 달인가?”

“네. 5월 24일이요.”

“신발 끈 풀려 있는데.”

“아, 제가 신발 끈을 못 묶어서요.”

기묘하고 어색한 대화의 끝은 침묵이다. 제인은 테이크 아웃 잔에 맺힌 이슬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질문을 내던진 국현의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엘리베이터 숫자판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쯧.”

성가신 듯 혀를 찬 국현이 불쑥 제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기에 제인이 발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그보다 신발 끈을 잡는 국현이 더 빨랐다.

“가만히 있어. 신발 끈 밟고 넘어져서 그 좋아하는 체리 에이드 다 쏟지 말고.”

국현은 능숙하게 제인의 신발 위로 예쁜 나비를 묶어 주었다. 그는 더 이상 풀리지 않게끔 신발 끈 양옆을 다시 단단하게 조였다.

“체리는.”

제인의 몸이 움찔 튀었다.

“먹고 꼭 확인받도록 하지.”

다시 상체를 일으킨 국현의 눈빛은 진지했다.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국현을 지그시 바라본 제인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다시 고개를 숙인 제인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전무실로 향했다. 좁아지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제인의 뒷모습을 보던 국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5월생, 체리, 왼손잡이.”

자신과 공통점이 너무도 많은 아이라 자꾸만 제 아이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 * *

“심창진이 김정배를 쥐어 팼다…….”

한달음에 회사로 달려온 교진은 이 뉴스를 곧바로 도운에게 전했다. 오늘부터 소리 없는 총성을 터뜨릴 도운은 새벽같이 옷을 갖춰 입고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교진은 심각한 얼굴로 제안했다.

“심창진 지금 독이 바짝 올랐어. 심창진 쪽에 사람 붙여 놔야 할 것 같아.”

당장 회장님이나 제인에 대한 뭔가를 알아낸다면 큰 해를 가할 수 있다. 하지만 도운은 고개를 저었다.

“독이 오른 만큼 주변을 탐색하고 있겠지. 심창진은 눈치 빠른 인간이야. 괜히 재촉해서 낭패 볼 필요는 없으니 다른 사람을 노려야지.”

“다른 사람 누구?”

펼쳐 내는 수많은 계획만큼 책상은 치는 도운의 손끝은 빨라졌다. 일순 엄지와 중지를 튕겨 소리를 낸 도운은 교진에게 검지를 뻗었다.

“지원우.”

“심채연 이거?”

교진이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세워 돌렸다.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심채연 남자야. 애인인데 애인도 아닌 것이 애인 그림자만 쫓는 개새끼의 심정은 지금 어떻겠어.”

꼬리에 불붙은 것처럼 속이 온통 헤집어져 있을 거다. 지원우야말로 심채연과 심창진의 움직임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당장 지원우한테 사람 붙여. 그리고 김정배는 내가 만나. 석찬 초대해.”

“알았어.”

대답과 동시에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린다. 교진은 절로 말소리를 죽이며 고했다.

“그리고 10시에 회의 있어. 이사장 쪽에 석찬 초대 보내고 참석할게.”

들어온 제인에게 살짝 눈짓한 교진은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인에게 다가왔다.

“왔어?”

늘 제인을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하게 된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안 신던 신발 끈 운동화를 신고 왔길래 당연히 이번에도 신발 끈을 덜렁이며 왔을 줄 알았다.

“뭐야, 어떤 놈이야.”

그런데 신발 끈이 이번엔 꽤 예쁘장한 모양으로 견고하게 묶여 있다. 무릎을 굽히려고 했던 도운은 다리에 힘을 주고 눈썹을 들썩였다.

“회장님이 묶어 주셨어요.”

“회장님이? 어느 쪽.”

“왼쪽이요.”

“그럼 난 오른쪽 묶어 줄게.”

태초부터 잠재된 소유욕은 그간 키워 준 국현에게도 해당된다. 도운은 기어코 무릎을 꿇고 잘 묶인 신발 끈을 다시 풀어 묶어 주었다.

누군가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도운은 단단히 매듭을 지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제인은 아침 기사 보고를 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번 사고로 인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효과로 호텔 주가가 다시 상승했어요. 하지만 초코의 거처에 대한 평판이 제각각 나뉘어 처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초코는 제 이야기를 하는 걸 아는지 제인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이 귀엽고 착한 초코가 사람을 구했는데. 정작 사람들은 청결이 중요한 호텔에 냄새나는 개는 무슨 일이냐며 들고일어나기 바쁘다.

“그건 이따 회의에서 이야기할 거고.”

도운은 체리 에이드를 쪽 빨아들이는 제인의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진 않지만, 에이드로 빨갛게 물든 입술은 평소보다 오동통해 앵두를 머금은 빛깔이었다.

요 며칠 저 입술을 물고 빨지 않아서 그런가.

“체리 좋아해?”

도운은 적당히 도톰한 제인의 입술에 시선을 박아 넣으며 낮게 물었다. 체리 향을 머금은 인간 체리가 말한다.

“좋아해요. 드셔 보실래요?”

체리 향을 솔솔 풍기며. 주는 걸 마다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어.”

도운은 제인이 뻗어 준 빨대로 입술을 가져다 대는 듯하다 경로를 선회했다. 가볍게 머금는 것만으로도 달달한 체리 맛이 혀끝에 감돈다.

벌어진 입술 틈을 파고들어 얽힌 혀를 쪽쪽 빠니 체리 과즙이 도운의 목을 타고 흐른다. 숨이 벅찬 제인은 강하게 몰아붙이는 도운의 어깨를 밀어냈다.

“뭐 하는 거예요.”

“나는 내가 사랑하는 거 마시려고.”

“…….”

“네가 체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식욕과 성욕은 비례한다. 도운은 처음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도운이 지금 입 안에 넣어 물고 빨고 씹고 싶은 건 손제인뿐이니까.

도운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제인의 입술을 야릇하게 쓸었다.

“나는 누나를 마실게. 너도 날 먹어 봐.”

“…….”

“꽤 맛있을걸.”

고개를 깊숙이 기울인 도운이 한층 더 뜨겁게 제인의 입술을 물었다.

* * *

오전 회의의 주제는 뻔했다. 다시 복구된 주가 상승세와 초코의 이야기. 겨우 수습된 주가가 초코로 인해 다시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이사회는 이번엔 초코의 문제로 언성을 높였다.

도운은 그 재촉들을 단칼에 잘라 냈다.

“의견 반영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이제 집을 마련해서 나가려고 했거든요.”

어떠한 위기가 있어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도운의 반응에 다들 놀란 눈치였다. 특히 측근인 제인과 국현, 교진은 이 문제에 관해 단 한 마디도 들은 것이 없었다.

도운은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제인을 불렀다.

“손제인 기자?”

“네, 전무님.”

제인은 펴놓은 노트북 위에 자연스레 손을 올렸다. 당장이라도 도운의 지시 사항을 받아 적기 위해서였다.

“내가 방금 한 말 올라가서 바로 기사로 내요.”

“거주지는 에덴 건설 쪽 아파트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가가 더 올라가겠지. 그러도록 해요.”

도운의 의도는 확실했다. 상승곡선을 타는 지금, 더 이상 주가로 머리 아프지 않게 자본을 확실히 뿌리내리고 더 신경을 써야 할 곳에 매진해야 했다.

이윽고 제인이 나가고, 회의도 끝이 났다. 국현은 의아한 듯 도운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바람이 든 거냐.”

“저도 이제 정착할 때가 됐죠.”

“이왕 들어가는 거 최근에 시공 완료한 에덴 에리스로 들어가. 난 호텔에 이어 네가 건설에 좀 관여했으면 하는데.”

이사회가 들었으면 난리 났을 소리였다. 하지만 도운이 말하는 정착은 이제 슬슬 밝혀질 진실에 대한 종착지이기도 했다.

만약 제인이가 정말 회장님의 딸이라면.

‘미리 자리를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은밀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도운은 곧장 제인에게 문자를 했다.

[내 책상에 앉아서 기사 써. 바로 승인 내려서 올려 버리게.]

답장은 안 왔지만, 제인은 또 착하게도 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도운은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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