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원우야.”
“……예, 회장님.”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대답도, 인기척도 한참 있다가 들려온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창진이 허름한 별채까지 행차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문을 연 원우는 늠름한 어깨로 방 안을 교묘하게 가렸다. 창진은 원우의 눈동자에 시선을 찍어 박았다.
“내 소유의 집에서 내가 객식구 취급을 받아야 하나?”
“죄송합니다. 갑자기 방문하셔서 놀랐습니다.”
“놀라긴.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너털웃음을 터뜨린 창진은 원우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인다.
“원우야, 개는 개답게 주인 뒤를 지켜야지 겁대가리 없이 앞으로 나서는 게 아니야. 네 주인은 누구지?”
“……회장님이십니다.”
“그렇지. 네 주인은 채연이가 아니야.”
사랑하는 이름 석 자에 원우의 아래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음에 이어진 질문엔 숨이 거칠어지지 않게 노력해야만 했다.
“그럼 채연이가 만나는 남자는 누구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기묘한 침묵에 휩싸인다. 원우는 혼란스러웠다. 심창진의 성격상 채연과의 관계를 안다면 자신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딸에 대한 애정은 없어도 집착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니.
“그럼 사국현의 또 다른 아이가 누군지는 아나?”
뜻밖에 질문에 원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익숙한 탓에 원우만 느낄 수 있는 집 안의 인기척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들키기 전에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이 원우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러시죠?”
“아아, 별거 없어.”
손을 내젓는 행동과 달리 창진의 음성은 선뜩했다.
“찾으면 죽여 버리려고 했지.”
잠시 잠깐 칼날 같은 눈빛이 원우의 등 뒤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 지으며 원우의 어깨를 쳤다.
“우선은 알겠다. 쉬어.”
“……네, 들어가십시오.”
원우는 문을 닫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나와도 돼.”
그러자 화장실 안에서 얇은 슬립만 입은 채연이 사뿐히 나왔다. 채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떨리는 숨을 토해 냈다.
“아빠가 왜 갑자기 제인이에 관한 걸…….”
채연이 원우의 별채에 자주 드나들어도 들키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연정은 신경도 안 쓰고, 창진은 늘 바깥일이 중요한 사람이니까.
아내와 제 딸이 집에만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단순하고도 집착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창진이 갑자기 별채에 찾아온 건 채연도 예상하지 못해 당혹스러울 뿐이다.
“채연아.”
“응.”
“그냥 우리 도망가서 살까?”
원우는 충동적으로 말을 붙였다. 요즈음 그의 감정은 널을 뛴다. 특히 오늘처럼 제 존재를 감추고 눈에 띄게 안도하는 채연이를 볼 때면 알 수 없는 소유욕이 치솟는다.
“농담이야. 네가 놀랐을 것 같아서.”
미소로 가면을 덧댄 원우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채연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채연이 보지 않는 얼굴은 금방 딱딱하게 굳어 간다.
최연정도, 심창진도 전부 저를 개 취급한다.
이럴 때면 정말이지 주인을 물고 달아나는 개가 되고 싶다.
원우는 채연의 여린 몸을 꽉 부둥켜안았다.
* * *
제인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꿈을 꿨다. 꿈에서 심채연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가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다.
그 불쾌한 기분을 닦아 내고자 제인은 자주 신던 벨크로 운동화를 죄다 빨았다. 조금은 말끔해진 기분으로 핸드폰을 들었는데, 이건 또 뭘까.
줄지어 온 문자를 본 제인은 연한 웃음을 터뜨렸다.
[밥 먹자.]
[아직도 자?]
참을성 없는 문자의 주인공은 단 한 사람이었다.
[나 보고 싶지.]
[난 보고 싶어. 그러니까 밥 먹자.]
대책 없는 무데뽀.
“서도운 진짜…….”
귀찮다는 말투와 달리 입꼬리에 맺힌 즐거움은 꽤 오래도록 지속된다. 제인은 일전에 ‘서도그’라고 저장해 둔 도운의 저장명을 검지로 콕 찔러 보았다.
“너 때문에 봐준다.”
심채연, 그 어이없고 못된 계집애.
일어난 제인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 * *
달칵,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사이좋게 누워 있던 초코와 도운이 동시에 눈을 떴다.
“초코야, 엄마인가?”
“엄마는 무슨. 아빠다.”
“아.”
차분한 미성이 아닌 국현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자 도운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이없어 헛웃음을 치는 국현에게 초코가 다가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왜 개가 사람보다 낫다고 하는지 이제 알겠네.”
“주말인데 여긴 왜 오셨어요.”
“할 말 있어서.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누워 있는 거야?”
“내일을 위해 충전 중이었죠.”
오늘 밤 눈을 감았다 뜨면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도운은 침대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워 집무실 소파에 앉았다. 국현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이건 뭐예요?”
“딱 보면 몰라? 초음파 사진이잖아.”
“…….”
“정확히는 내 아이의 사진이지.”
그 말에 도운은 새까만 사진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이 작은 점이 손제인이라는 것이다. 도운은 국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건 갑자기 왜요?”
“살아 있는지 아닌지 알아내려면 그 뿌리부터 뽑아 봐야지.”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간다.
“산부인과를 말씀하시는 거네요.”
“그래, 심창진이랑 최연정 파 봤자 더 감출 뿐이야. 이 사건에 대한 근본을 캐 봐야지.”
불과 며칠 전, 묵묵히 술만 마셨던 국현은 지금 무척이나 담대한 기백을 보여 주고 있었다. 도운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느슨히 풀었다.
“갑자기 마음먹으신 이유가 궁금한데요.”
“네 말대로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왜 최연정한테 목을 매고 있었는지.”
따지고 보면 전부 은선 덕분이었다. 끊어 낼 수 있다는 반짝이는 눈이 가슴 깊이 박혔고, 해답을 내려 주진 못해도 주의 깊게 들어 주는 고갯짓에 마음에는 풍랑이 일었다. 그리고 덥석 안아 주는 작은 품에 커다란 위안을 얻기도 했고.
이런 감정을 언제 느껴 보았는가. 스물두 살, 멋도 모르는 청춘에 느낀 첫사랑이 마지막이었다. 묻혀 있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끊어 내려면 끄집어내야 한다. 그게 국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좋네요, 그런 다짐.”
어쨌거나 도운은 대찬성이다. 도운 혼자 알아보는 것보다 국현과 함께 진실을 파헤치는 게 더 빠를 수 있다.
“컹!”
냄새는 지금 초코처럼, 우리가 제대로 맡았으니.
그리고 아까부터 밖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눈치챈 도운과 국현은 예리한 눈빛을 교환했다. 도운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새끼가 듣는다더니. 이 주말 저녁에 거기 누구?”
상대가 도망갈 새도 없이 초코가 앞발로 살짝 열린 집무실 문을 벅벅 긁어 활짝 열었다. 동시에 두 남자의 눈에 의문이 떠오른다.
“뭐야.”
“손제인 기자?”
“내 여자였네.”
“이런 미친놈.”
작게 중얼거리는 국현의 욕지거리에도 도운의 곧은 걸음은 제인에게로 향했다.
“나 보러 왔어?”
“하도 밥 타령을 하길래 왔는데…….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들어 버렸습니다.”
저를 찾아낼 거라는 조용한 속삭임을 들어 버렸다. 제인은 기분이 이상했다.
저 작은 초음파 사진이 나. 나를 간직한 사국현.
자연스레 소파에 앉게 된 제인은 서툴게 권했다.
“회장님도 식사 전이시면 같이 드세요.”
제인은 도운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직접 만든 김치볶음밥을 꺼냈다. 그녀가 숟가락 두 개를 꺼내자 국현은 도운에게 혀를 찼다.
“넌 여자 친구한테 밥 심부름이나 시켜?”
“아니요, 전 여자 친구가 아닌……”
“그러면서도 은근히 숟가락 드시네요.”
부정하지 말라는 듯 도운이 말꼬리를 싹둑 잘라 먹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기분은 이런 걸까.
제인은 원목 테이블 위에 놓인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며 벅찬 가슴을 느꼈다. 도운이 주시하는 제인의 만면에 그득한 것은 생소한 기쁨이었다. 제인은 들고 있던 까만 봉지를 불쑥 국현에게 건넸다.
“다 드시면 이것도 드세요.”
“이건 뭐지?”
“체리요. 요즘 체리 철이어서 한 봉지 샀어요.”
체리. 그 불쾌하고도 아련한 단어에 국현은 김치볶음밥을 퍽퍽 떠먹으며 말했다.
“체리 하니 생각나는군. 저 아이 이름이 채연이었어.”
제인의 반응을 살피던 도운의 숟가락질 또한 멈추었다.
“최연정이 체리를 좋아했지. 내 딸의 이름은 체리와 연정을 따서 채연이라고 지어 주고 싶었고.”
“…….”
“그런데 그 이름을 심창진의 아이에게 지어 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지. 내가 그래서 심채연을 안 좋아해. 체리도 싫어하고.”
고요한 분노가 서린 말투에 도운과 제인의 얼굴엔 금이 갔다.
회장님 아이 이름이 채연이라니. 도운은 제 짐작에서 벗어난 말이라 의아했고, 제인은 제 이름을 싫어한다는 말에 순간 기분이 상했다.
“아, 그리고 손제인 기자 덕분에 내일부턴 도운이 옹호 기사가 여럿 뜰 예정이야. 호텔 사고로 인해 도리어 도운이 평판과 주가가 회복되고 있거든. 물론 초코에 대한 안 좋은 기사도 뜰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초코가 사람을 구했지만, 신성한 호텔에 애완견이 무슨 말이냐는 언성 또한 자자하다. 엎친 데 덮친 격일 수 있지만, 주가 하락이 지속되는 것보다야 낫다. 초코 문제는 안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던 도운의 거처를 옮기면 해결될 문제다.
“손제인 기자의 현명한 대처 때문이었어. 고마워.”
“고마우면 이거 다 드세요.”
국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앞으로 검은 봉지가 불쑥 들어온다. 당황한 국현이 체리 봉지를 받아 들자 도운도 제인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드시고 꼭 확인도 받으세요. 체리가 얼마나 맛있는데.”
퍽 억울해 보이는 음성에는 은근한 원망이 가미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