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경식의 말을 곱씹은 국현은 그길로 꿈으로 보육원으로 향했다. 거대 기업의 회장이라는 사명감은 마음 놓고 털어놓을 구석도 없게 했다.
고독한 마음을 유일하게 알아주고 안정시켜 주는 사람은 은선뿐이었다. 오늘도 보육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던 은선은 국현을 발견하곤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오늘은 무슨 고민으로 오셨어요?”
웃으며 다가오는 은선은 늘 한결같았다. 국현은 난감한 듯 관자놀이를 긁었다.
“내가 그동안 은선 씨에게 고민을 많이 털어놨나 보군요.”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좋은 거예요. 그만큼 상대를 믿는다는 따뜻한 감정이잖아요.”
“그럼 제가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은선 씨뿐이군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지만, 은선은 순수하다. 새하얀 뺨 위로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잠시 만져 보고픈 욕구를 참아 낸 국현은 은선을 근처의 그네로 이끌었다. 아이들이나 앉던 그네에 자신이 앉게 되자 은선은 의아한 듯 국현을 돌아보았다.
“그네는 왜…….”
“오늘 할 이야기는 조금 부끄러우니까 이렇게 들어요. 내가 뒤에서 밀 테니 흘러가는 바람처럼 들어 주면 됩니다.”
국현이 그녀의 등을 두 손으로 짚어 약한 힘을 실었다. 은선은 그넷줄을 꽉 잡았다.
“도운이 결혼, 결국 안 시키기로 했습니다. 도운이도 내 아이라고 생각하니 나와 같은 길을 걷게 할 순 없었어요.”
“그런데요?”
은선은 편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뒤에서 흘러 들어오는 국현의 음성이 정말 따스한 봄바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내 아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더군요.”
그 순간 은선의 몸이 휘청였다.
“은선 씨!”
하필 그네가 올라갈 때여서 은선이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하자 국현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하필 잡은 곳이 허리라 그네에서 내려온 은선은 국현에게 안긴 모양새가 됐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진 덕분에 국현은 은선의 눈에 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은선 씨는 눈이 예쁘네요.”
아주 맑고 거짓 없이 투명하다. 은선은 떨리는 숨결로 말했다.
“그래서요?”
“제 눈에 예뻐 보인다는 말입니다.”
“아니, 아이요.”
“아.”
왜인지 모르게 두 사람은 황급히 떨어졌다. 은선은 다시금 얼굴이 붉어졌지만, 정신을 붙잡고 국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국현은 진중한 눈빛을 은선에게 밀어 넣었다.
“최연정. 그 여자를 제가 끊어 낼 수 있을까요?”
은선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제인이를 알아보셔야죠.
“어떻게요?”
말하고도 국현은 다소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선의 다음 행동은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은선은 국현의 목 뒤로 팔을 걸어 그를 끌어안았다. 순간 국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힘을 주는 거예요.”
국현이 굳어 갈수록 은선은 강해졌다. 태어나자마자 억울하게 버림받아야 했던 우리 제인이. 아빠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원하는 우리 제인이.
“그러니까 힘내세요, 국현 씨. 할 수 있어요.”
사실 안아 줬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체격 차이가 확연해서 은선이 국현에게 안긴 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국현은 이 여린 품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나한테 국현 씨라고 한 거 압니까?”
혼란스러움은 사라지고 어느덧 미소가 번졌다.
“듣기 좋네요.”
역시, 찾아오길 잘했다. 언제부턴가 이 여자 앞에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국현은 손을 들어 은선의 마른 등허리를 끌어안아 보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 * *
“쯧쯧쯧.”
정배는 한바탕 난리가 난 창진의 집무실을 보며 혀를 찼다. 업무 데스크고 바닥이고 죄다 깨지고, 종이가 널브러져 있다.
“사국현에게 또 한 번 제대로 당했나 보지?”
“꺼져.”
“이봐, 친구. 위로해 주러 온 사람한테 너무 무서운 거 아니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지 말라고.”
기쁜 나쁜 웃음을 흘린 정배는 소파에 걸레짝처럼 앉아 있는 창진을 훑어보았다. 본인 신세는 원래 본인이 더 들볶는다고, 아주 가관이다.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 하며, 뒹굴고 있는 술병까지. 정배는 정신 차리라는 듯 창진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심창진, 너 혹시 사국현과 너의 차이를 알아?”
“꺼지기 싫으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어.”
“사국현은 아무리 감정적인 상황이라고 해도 지극히 이성적이라는 거야. 충분히 생각하고 따지며 결론을 내리지.”
살벌한 공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정배는 희희낙락하며 떠들어 댄다.
“반면 너는 이성적인 상황에서도 격정적이라는 거야. 그래서 늘 중요한 걸 놓치고, 당하고, 완벽히 소유하지 못했지.”
“…….”
“그 옛날 최연정처럼.”
길게 쭉 찢어지는 정배의 입가를 보는 창진의 눈빛엔 이채가 서렸다. 잔인한 충동이 든다.
이 충동이 맞는 말을 한다는 제 인정에서 비롯됐다는 걸 창진은 충분히 알고 있다. 사국현이 당연히 결혼을 승낙하리라 생각했고,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사국현의 선택은 제 생각을 뒤집은 완전한 반전이었다. 창진은 다시 한번 진한 굴욕감과 패배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절실히 느꼈다.
김정배의 말처럼, 자신은 단 한 번도 사국현을 이겨 본 적이 없다고.
제아무리 최연정을 돈으로 끌고 들어와 새장 속 그의 여자로 만들었어도 그녀가 날갯짓하고 도망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당사자는 모르는 친딸 채연이를 데리고 와 인질로 잡고 있으면서도 항상 그 정체가 밝혀질까 봐 두려웠다.
그걸 이번에야 확실히 느꼈다. 채연이를 바라보는 사국현의 눈. 사국현을 바라보던 최연정의 눈.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언뜻 비쳤던 그 웃음.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억!”
비틀거리며 일어난 창진은 그대로 정배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맞으니까, 맞는 만큼 맞아 봐. 이 개 같은 새끼야.”
그리고 눈이 돈 만큼 무자비하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니까, 내가,”
“윽! 이 새끼가!”
“조용히, 꺼지랬지.”
“회장님!”
주둥이만 동동 떠다니면 간수를 잘해야지.
정배의 얼굴이 피떡이 돼서야 창진은 손에 힘을 풀었다. 창진은 들썩이는 흉곽을 크게 부풀렸다.
“이 실장.”
“……네.”
“네 생각에도 연정이가 스스로 내 목줄을 빼고 다른 곳으로 눈독 들이는 것 같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다. 이 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침묵을 고수했다.
“야, 이 개새…….”
바닥에서는 정배가 피 끓는 목소리를 내며 아픈 몸을 웅크리는 게 보였지만, 창진에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이성적으로 알아보기로 했어.”
“그럼 사국현 회장의 다른 아이는 제가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직접 확인하는 것만큼 명확한 증거는 없거든.”
“그렇다면…….”
“우선 사국현에 대한 최연정의 마음 좀 살펴보자고.”
어차피 결혼은 결렬이다. 사국현의 성향은 그래도 한때는 친구였으니 누구보다 잘 안다. 한번 밀어붙인 건 절대 번복하지 않으려고 할 테지.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는 창진의 눈빛이 번뜩인다.
“심채연하고 지원우도 좀 들쑤셔 봐야겠어.”
더 이상 내 여자와 사국현이 놀아나는 꼴은 못 보겠다. 연정은 제 것이었다. 그들이 엮일 수 있는 모든 다리를 불태워 버릴 것이다. 연정을 가둬서라도, 그 둘 사이에 있는 애가 아직 운 나쁘게 살아 있다면 그 애를 죽여서라도. 현재 그 둘을 가장 견고하게 엮고 있는 것은 얼굴도 모르는 그 핏덩이와 제 딸이었다. 제가 가질 수 없는 연정의 핏줄과, 증오스러운 사국현의 핏줄을 나눠 가진 아이. 피는 물보다 강하다고 했지. 그 피를 없애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창진은 애써 채연으로 향하는 생각을 몰아냈다. 지금은 그 얼굴도 모르는 애가 먼저였다.
꾀가 말짱한 심채연은 제 피붙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 가능성이 농후했다. 또 되짚을수록 은밀한 심채연과 지원우의 관계에서, 지원우도 어떻게 보면 사국현의 아이를 알 수 있는 중요 인물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목걸이 하나만 구해 봐. 속이 안 보일 만큼 반짝이는 거로.”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최연정의 속을 들여다볼 것이다.
* * *
주말은 인터넷 뉴스가 가장 잠잠한 날이다. 월요일 출근 시간에는 화력이 가장 세고. 주말 동안 감추어 둔 문제를 터트리는 것이다.
그 시간에 채연과 서도운의 결혼 소식이 터지지 않는 건 연정으로서는 축배를 들어야 할 일이었다.
손제인이 제 정체를 사국현에게 알릴 일도, 사국현이 그것을 알아낼 방법도 없다고 판단한 연정은 프랑스 찻잔에 담긴 붉은 체리 차를 음미했다.
“오늘따라 체리 차가 맛있네요.”
“아무래도 요즘 체리 철이어서 그런지 달고 싱싱하더라고요. 사모님이 체리 차 좋아하셔서 직접 만들어 봤어요.”
“좋네요.”
체리 향만큼 은은한 칭찬에 고용인들은 시선을 교류했다. 연정은 성질이 고약한 안주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칭찬을 해 줄 만큼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다.
차라리 사람을 괴롭히면 대놓고 욕이라도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게끔 불편하게 하는 것이 연정의 성향이었다.
“남편이 꼬박 이틀을 외박했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리고 지금처럼 심창진까지 나타나면 더욱 숨이 막힌다. 고용인들은 방에 불이 켜지면 달아나는 바퀴벌레처럼 재빠르게 흩어졌다. 연정은 까칠한 얼굴로 등장한 남편을 파악하듯 빤히 주시했다.
“묻는 말에 대답 좀 해 주지?”
“체리 차가 맛있어서 잠시 기분이 좋았어요. 그러는 당신은 기분이 괜찮아 보이네요.”
“왜. 내가 난리라도 칠 줄 알았어?”
연정은 침묵으로 긍정을 드러냈다. 그 솔직함에 창진은 비틀린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내가 그동안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 그동안 당신 몰아세운 거 미안하게 생각해.”
창진은 주문 제작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연정에게 채워 주었다. 아주 반짝반짝하되 저 다이아몬드 안엔 도통 무엇이 있는지 모를, 마치 최연정과 흡사한 목걸이는 그녀의 쇄골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예쁘네. 고마워요.”
“채연이는?”
“방에 있겠죠.”
무심한 대꾸에 뒤를 돈 창진은 그대로 2층이 아닌 밖으로 나섰다. 연정은 다시 한번 찻잔을 들며 그런 제 남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채연이가 원우의 별채에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지독하게 격정적인 제 남편이 저렇게 날뛰지 않을 땐, 먹이를 향해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쯧.”
당분간은 그녀도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