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남들이 보면 여느 연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도운이 제인을 데리고 온 곳은 놀랍게도 근처에 있는 순댓국밥집이었다.
“아주머니, 여기 순댓국 두 개요.”
자리에 앉아 능숙하게 주문하는 도운이 제인은 조금 신기했다.
“이런 거 먹어 보셨어요?”
“당연하지. 볼래?”
도운은 빠른 속도로 나온 순댓국 안에 새우젓을 넣어 간을 맞추고 밥을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정장 차림이 아닌 편한 후드티를 입은 서도운은 이 구수한 풍경에 이질적이지 않았다.
“나 이런 거 되게 좋아해. 어려서 못 먹고 자라서 가리는 건 더더욱 없고. 가끔 접대니, 뭐니 코스 요리만 먹을 땐 토악질이 나와서 교진이랑 동네 떡볶이 먹고 들어간 적도 있어. 그만큼 나는 평범하고 다루기 쉬운 사람이야.”
도운은 제인의 뚝배기를 눈짓했다.
“빨리 먹어. 식겠다.”
“……네.”
제인은 따뜻한 국물을 먼저 한 숟가락 먹었다. 눈앞의 도운은 식사 예절을 깔끔하게 지키면서 국밥을 푹푹 잘도 떠먹었다. 이렇게 자유로운 서도운을 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언제든지.”
“누나를 그렇게 찾고 싶으셨다면서 왜 보육원은 한 번도 안 가 보셨어요?”
도운이 떠난 뒤, 제인은 언제든 그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도운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국현의 후원을 받으면 못 할 것도 없을 텐데, 대체 왜?
원망이 아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도운은 제인을 마주 보며 숟가락으로 뚝배기 끝을 두드렸다.
“내가 이런 음식 좋아해서 한번 먹었다가 사람들 눈에 띈 적이 있어. 그때 내가 이런 소리를 들었거든.”
“…….”
“역시 질 떨어진다, 태생이 미천하다. 사 회장 얼굴에 먹칠한다.”
고작 식사 하나 했을 뿐인데. 제인의 입술이 황당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내가 보육원까지 찾아가 봐. 소문 도는 거 한순간이고, 회장님 명예를 더럽히는 건 물론, 보육원까지 까발려져서 거기 있는 애들 어떻게 됐을지 몰라.”
“…….”
“그래서 못 간 거야, 제인아.”
내가 그래서 너를. 내 세상의 전부였던 너를.
“내가 버렸어, 누나를. 돈도, 집도 다 준다는 회장님 말에 혹해서.”
“…….”
“따라가면 하루아침에 집이 생겨서 누나랑 한 약속 지킬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이제 놓치지 않아. 손제인 너를.
도운은 제인의 커진 눈에 맹세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결혼도 무마되었고, 누나도 다시 얻게 되었다. 모든 건 도운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우리 운명이 왜 이렇게 꼬여 버렸는지.
도운은 그걸 하나하나 알아내 잘근잘근 밟아 줄 생각이었다.
* * *
“이러고 계실 줄 알았지.”
비서의 권한으로 국현의 집에 들어선 경식은 진동하는 술 냄새에 한숨을 푹 쉬었다. 환기를 시킬 겸 창문을 여니 거실에서 자고 있던 국현이 머리를 짚고 일어난다.
“배 실장이 여긴 어쩐 일이야.”
“회장님이 어제 전화를 수십 통이나 하셨잖습니까. 정말 내 아이가 살아 있는 거냐고, 손제인 씨 이야기는 왜 꺼낸 거냐고.”
“……내가?”
기억이 없다. 집무실에서 마신 후 이만 들어가 보라는 경식의 걱정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복잡한 머릿속이 씻겨 내려가지 않아 술을 계속해서 마셨는데…….
“전화가 하도 많이 와서 교진이도 회사에 일 터진 줄 알고 놀라 씻으려는 거 겨우 진정시켰습니다. 전 복수에 실패해서 속상하신 줄 알았더니, 이제 그런 마음은 아닌가 보죠?”
“말했잖나. 도운이는 내 아들이나 다름없다고. 사랑이 없다면 일부러 결혼시켜 애 인생 망가뜨릴 생각 추호도 없어.”
“그럼 손제인 씨와 아이에 대한 문제는요?”
“……거기에 대해서는 배 실장이 알아봐 줬으면 하는데.”
“알아봐 드리는 거야 문제는 없죠. 단, 저와 약속 하나만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국현은 경식이 건넨 냉수를 마시며 어질어질한 정신을 깨웠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어떤 진실이 나오든 그때는 회장님이 최연정 씨를 버려야 합니다.”
경식은 그동안 국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사랑하는 여자의 배신과 목숨을 걸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아이의 죽음. 결말이 암울할지언정, 복수라는 이름으로 심창진과 최연정을 놓지 못했던 그 마음을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질긴 인연이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회장님은 두 사람의 농간질에 깜빡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것도 2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썩은 동아줄 아무리 부여잡고 있어 봐야 언젠간 썩어 끊어지기 마련입니다. 회장님 마음에 피고름이 차 더 아프기 전에 스스로 끝내셔야 합니다.”
국현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보고 있지만 볼 수 없었던 그 너머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 다짐이 서실 때,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
“전 언제나 회장님 편입니다.”
* * *
도운은 밥 먹고 바로 집으로 가려던 제인을 근처의 대형 서점으로 이끌었다. 이곳으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주말 데이트.”
서점의 구석진 곳에서 멈춰 선 도운은 입꼬리를 얄궂게 올렸다.
“그냥 집 가긴 아쉽잖아.”
“원래 그렇게 막무가내세요?”
황당한 제인이 작게 속삭였다. 폭풍전야 같은 이 상황에서 데이트라니.
도운은 제인을 향해 고개를 느슨히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그에게서는 포근한 향이 났다.
“내가 워낙 못 배운 놈이라.”
아무렇지 않은 말은 또 장난스럽게 하니 할 말이 사라진다. 서도운은 늘 그런 식이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억울한 과거도, 다 괜찮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게 마치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같아 제인은 밥을 먹을 때도, 이 순간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뭐.”
한숨을 쉰 제인은 서점을 넓게 둘러보았다. 주말의 대형 서점은 여가 생활을 즐기러 온 사람으로 가득했다. 다들 지극히 평범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남들 눈에도 우리가 그렇게 보이겠지. 이곳에선 굳이 금도와 심채연의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인은 몸을 틀어 서점 매대를 훑었다.
“여기 마침 전무님한테 딱 맞는 책이 있네요.”
제인의 옆으로 붙어 선 도운은 책 제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이 행동 교육 3세에서 6세????? 그거 설마 나한테 써먹으려고?”
“수준이 딱 이 정도 되는 것 같아서요. 제가 에덴에 들어온 이후로 고삐 풀리신 것 같으니까 책임은 져야죠.”
“그 책임, 이왕이면 나 데리고 살면서 지는 거 어때?”
도운은 주인을 뒤따르는 개처럼 계산대로 가는 제인의 그림자를 밟았다.
“내가 뒤집어지게 호강시켜 줄게.”
“허.”
이 낯간지러움에 내성이라도 생긴 건가. 이젠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바짝 다가온 도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낸 제인은 서점 바닥에 앉았다. 그래도 거부는 안 하는 제인의 방식을 아는 도운은 똑같은 책을 계산한 뒤 제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애초에 책은 수단이었다. 책을 읽는 척 턱을 괸 도운은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
고요한 서점보다 더 고요한 옆모습을 그는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긴 속눈썹, 눈을 살짝 내리깔아 보이는 짙은 쌍꺼풀, 화장기가 전혀 없는데도 매끈한 피부와 책장을 넘기는 기다란 손끝.
도운에게 제인은 끝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볼수록 다채로운 사랑인데 이 감정에 끝이 가당키나 할까.
그때, 감상에 젖은 도운의 팔을 제인이 툭툭 쳤다. 그녀는 책 속 한 문장을 검지를 사용해서 옆으로 쭉 그었다.
아이들이 과한 장난을 치거나 이유 없이 우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표출하고 싶어서입니다.
“이거 딱 전무님이에요.”
“나?”
“네, 한마디로 관종.”
그 말을 하면서 제인이 웃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 나는 서점이라 그런가. 희미한 숨결로 흘려 보내는 웃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살포시 올라간 입꼬리에 도운은 잠시 넋을 놓았다. 그 밑에 있는 해결 방안은 아주 훌륭한 처방이었다.
그럴 땐 아이의 눈을 깊이 들여다봐 주세요.
흔하지 않은 제인의 웃음을 도운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만 봐.”
한 손으로 제인의 턱을 고정한 도운은 둘의 얼굴을 책으로 가렸다. 일순 짙어진 도운의 시선에 제인은 시공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도운은 말간 얼굴을 잡아당겨 입술을 눌렀다. 벌어진 잇새로 혀가 얽힌다. 하지만 공간이 공간이니만큼 외설적인 소리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부드럽고,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운 숨결이 제인을 보듬어 준다.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올리자 입술이 떨어졌다.
뒤에는 책장, 얼굴 옆에는 도운이 세워 올린 책. 앞에는 비좁은 거리로 와 닿는 시선.
“딱 너 같기도 해, 제인아.”
알아 달라고, 내 앞에 나타난 거잖아.
다시는 제인을 놓쳐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도운의 마음속에서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