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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43화 (43/79)

43화.

“서도운이지.”

고요한 미성이 잘게 떨렸다. 채연은 옆구리와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온 원우를 보며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제인이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내가 너까지 아프게 한 것 같아.”

“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난 네 일이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누군가는 채연의 사고가 비이성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걸 받아 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자신뿐이라고 원우는 단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랬기에. 금도의 운전기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원우는 이 세상에 자신이 홀로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작은 관심과 사랑이라도 구걸했다. 채연의 곁에 있어도 그건 여전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해야만 채연의 애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아빠가 안 들어온다고 해도 고용인들이 있는데 조심하는 건 어떻겠니.”

하지만 저 여자, 최연정은 아니다.

채연은 침대에 걸터앉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워 항변했다.

“아빠가 화났는데도 상당히 즐거워 보이시네요?”

“당연하지. 네 뜻대로 안 됐으니까.”

“내 뜻대로 안 됐으면 엄마 뜻대로도 안 될 거예요. 사국현한테 아이가 있었다는 건 또 뭐예요? 심창진하고 최연정 사이에 낳은 아이가 우리 말고 또 있었냐고요!”

“그게 중요하니?”

어리석은 내 딸. 제 감정에만 치우쳐 정작 중요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게 제 아빠랑 똑 닮았다.

원우와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연정은 산뜻한 미소를 지었따. 그럴수록 채연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난 제인이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엄마란 사람은 왜 그거 하나 못 들어주는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엄마라고 부르지 마!”

엄마이길 강요하는 제 딸의 요구에 연정은 처음으로 비명같이 내질렀다.

“난 너한테 엄마가 되고 싶었던 적 단 한 번도 없어. 늘 누군가의 여자가 되고 싶었지.”

“당신이란 사람은 진짜…….”

“지긋지긋하면 너도 그 입 다물어. 한 번만 더 손제인이란 이름이 내 귀에 들리면, 그때는 손제인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리는 수가 있어.”

처음으로 제인을 겨냥한 협박이었다. 연정이 제인을 건드리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채연은 입 안 여린 살을 아프게 깨물었다.

부모가 되면 오로지 본인이었던 삶을 그리워한다고 한다. 하지만 제 엄마는, 최연정은, 사랑에 대한 갈망만 높아 배 아파 낳은 딸을 무작정 거부한다. 포기할 법도 한데 채연은 그게 여전히도 서러웠다.

“사국현이 아직도 엄마를 사랑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나밖에 모르던 남자야.”

“착각도 유분수지…….”

조소를 버무린 비난이 연정의 고막에 상처를 냈다. 눈앞에 번쩍 불이 붙은 듯했다. 연정은 당장 원우의 뺨을 날렸다.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원우의 고개가 형편없이 돌아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경악한 채연이 원우의 앞을 막고 섰다. 연정은 끝까지 잔인하게 읊조렸다.

“이제 알겠니? 너도 네 사람 건드리면 마음 아프지? 나도 그래. 더는 손제인으로 사국현 건드리지 마. 네 아빠도.”

그리고 그녀의 싸늘한 시선은 뒤에서 저를 맹렬히 노려보고 있는 원우에게 흘렀다.

“시키는 대로 엎드리는 개 주제면 주인 잘 지켜.”

다시 한번 제 위치를 상기시키는 연정의 말에 원우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속이 뒤틀린다.

채연이를 제외한 금도를 뒤집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원우를 휘감았다.

* * *

제인은 지금 자신의 의식이 무의식과 현실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심채연과 얼굴을 나란히 마주하고 있을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꿈에서도 그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아 제인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그녀를 노려보고 있던 심채연이 목소리를 냈다.

‘네가 나를 버렸어.’

‘뭐?’

어처구니가 없어 다시 정면을 보며 되물었다. 심채연의 눈에는 어느새 투명한 이슬이 긴 원망처럼 타고 흘렀다.

‘내가 아니라 네가 먼저 나를 버린 거라고.’

‘헛소리하지 마. 너 거기 안 서?’

이기적인 책임 전가를 한 심채연은 홀연하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화난 제인은 손을 뻗었다. 끝까지 제 잘못을 모르고 원망만 해 대는 심채연을 보니 다시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너한테 뭘,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나한테 뭘 더 바라는데.

하지만 걸음도, 목소리도 덜컥 멎어 버린 건 뒤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채는 굳건한 힘 때문이었다. 따스한 기운에 묶인 제인은 뒤를 돌았다.

‘가지 마.’

그곳엔 어른이 된 서도운이 있었다. 뒤에선 심채연이 멀어지는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제인은 그런 도운을 보며 긴장된 몸의 힘을 풀었다.

‘가지 마. 여기 있어.’

‘도운아…….’

‘내가 있어.’

내가 있는데 어딜 가냐는 강한 소유욕이 담긴 어투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도운은 잡은 제인의 손을 입가로 당겨 손끝을 잘근잘근 깨물어 댔다.

아릿한 통증은 얼굴로 올라와서야 부드러워졌다. 촉, 촉. 야릇하고 촉촉한 입술이 얼굴 곳곳에 와 닿았다.

그 촉감이 너무 선명하고, 아늑해서.

“초코야…….”

제인은 비로소 현실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몽롱한 정신이 일깨워졌는데도 뺨을 지분거리고 콧잔등을 깨무는 감촉은 끝나지 않았다.

“알았어, 초코야…….”

당연히 초코인 줄 알았다. 이렇게 끈질긴 애정을 보이는 건 한동안 게을렀던 산책을 시켜 달라는 초코밖에 없을 테니까.

안달 난 초코를 달래 주려고 제인은 손을 들었다. 그러나 손바닥에 와 닿는 감각은 초코의 매끈한 털이 아니라 결 좋은 머리칼이었다.

가만 느껴 보니 몸 위로 와 닿는 몸도 아주 단단하다. 번쩍 눈을 뜬 제인에게 보이는 건 블랙홀처럼 새까만 눈동자와 장난스러운 입술의 소유자였다.

“멍멍.”

“서도운…….”

“몇 번이고 물고 빨았는데 일어나질 않더라.”

확인 사살을 하듯 도운이 제인의 몸 위를 완벽하게 정복한다.

“괘씸하게. 날 옆에 두고 무방비하게 잘 수 있다 이건가.”

“……잠깐.”

위협적일 정도로 천천히 상체를 기울이는 도운을 보며 제인은 한쪽 발을 들어 올렸다. 방어 기제처럼, 혹은 방패처럼 벽을 세운 제인의 발바닥은 도운의 굴곡진 복근 위에 닿았다.

다행히 도운은 눈썹을 쓱 올릴 뿐 더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제인은 발끝에 힘을 주어 도운을 밀었다.

서서히 밀려난 도운은 얌전히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제인은 이불을 감싸 쥐며 사태 파악을 했다. 은근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어제 결혼이 파투 났고, 넌 여기로 오겠다며 내 곁에서 잠을 잤고.”

“…….”

“그리고 여긴 내 침대니까, 더 할까?”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려는 도운에게 제인은 손바닥을 내보였다.

“기다려.”

도운은 저도 모르게 몸을 멈춰 세웠다. 좁은 시야 틈으로 멀뚱히 앉아 있던 초코도 움직임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제인에게는 지금 눈앞의 짐승을 잠재우는 게 급선무였다.

“앉아.”

어디까지 하는지 보려는 듯 고개를 까딱인 도운은 얌전히 침대에 앉았다. 제인은 한 발씩 조심스레 침대 아래로 내렸다.

“옳지.”

“…….”

“잘한다…….”

그러곤 끝까지 도운의 움직임을 살핀 채 화장실로 줄행랑친다. 문이 꽁꽁 잠기자 도운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씩 웃었다.

“시키는 대로 하니까 내가 정말 개로 보이나.”

나쁘진 않지만, 그럼 곤란하다. 자신은 손제인에게 남자로 보이고 싶으니.

하지만 이내 도운의 눈빛엔 예리한 이채가 스쳤다.

아까 전의 일이었다. 잠든 제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를 몇 시간째, 불현듯 제인의 입술이 달싹였다.

‘제인아…… 아니야, 제인아…….’

괴로운 듯 눈썹을 찌푸리며 애절하게. 무언가 억울하고 서럽다는 듯이.

“왜 본인 이름을 부르지?”

어딘가 석연치 않은 잠꼬대다.

* * *

그대로 집으로 내빼려고 했던 제인은 자신을 애달프게 바라보는 초코에게 다가갔다.

“알았어. 산책시켜 줄게.”

익숙하게 초코의 목줄을 잡았지만, 도운이 도로 빼앗는 탓에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됐다.

“안 해도 돼. 내가 이미 했어.”

“이렇게 일찍이요? 안 잤어요?”

“못 잔 거지. 좋아하는 여자랑 누워 있는데 태평하게 잘 남자가 어디 있어.”

“간지러운 말을 되게 스스럼없이 하시네요.”

“그렇게 들리면 심장이 반응했다는 건데.”

“……신세 많이 졌습니다. 가 볼게요.”

어디 가서 말로 져 본 적이 없는데. 서도운 앞에서는 어떻게 된 게 죄다 무용지물이다. 줄행랑치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싣자 도운은 끈질기게 쫓아왔다. 그는 제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 숙박비로 아침 사.”

“손은 놔요.”

여긴 두 사람에겐 직장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드나드는 호텔이기도 하다. 게다가 주말 호텔 로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인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손을 잡으면 어떤 이슈가 도래할지 모른다.

“걸리기 싫으면 잘 따라오든가.”

그러나 도운은 개의치 않았다. 잡고 있는 제인의 손을 놓지도 않았다. 도운의 시원한 보폭만큼 제인은 거리를 좁혀 그의 옆에 붙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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