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42화 (42/79)

42화.

“제인아.”

“언제부터 내 집이 사랑방이 된 거야?”

심채연부터 태웅 선배까지. 도운의 옆에 선 제인은 삐딱하게 비아냥거렸다. 도운은 건들거리면서 사족을 덧붙였다.

“그러게, 내가 곱게 꺼지랬잖아요.”

“…….”

“금도 인간들은 왜 내 충고를 들어 먹지를 않지?”

태웅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도운의 말을 두둔하는 듯한 제인의 직설적인 눈빛이 태웅의 마음을 할퀴었다.

그는 아까 들었던 충격적인 이야기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알아야 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치졸한 질투는 앞다투어 싸울 겨를도 없이 태웅의 이기심을 재촉한다.

“손제인, 너 따라와.”

내 옆에 두고 싶다.

그 일념 하나로 손을 뻗었지만, 강인한 힘에 틀어막혔다.

“어딜 감히 손을 대.”

도운이 으르렁거리며 태웅의 손아귀를 뭉갤 듯 포악하게 쥐었다. 양보와 자비란 없다. 태웅도 이번만큼은 도운에게 대응하리라 마음먹으며 그의 멱살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안 가. 내가 왜 가.”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제인이 도운의 팔을 잡았다. 마치 자신을 지키는 안전띠처럼. 태웅에게는 그게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그녀만의 울타리 같았다.

동시에 제인이 도운에게 말했다.

“저 집에 가기 싫어요.”

“…….”

“전무님 집으로 갈래요.”

두 남자의 희비가 갈렸다.

심장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태웅은 아픈 감정을 부정하고자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제인아.”

“선배가 뭔데.”

그러나 돌아오는 건 싸늘한 눈빛과 거부감이었다.

제인에게 있어 집이란 꿈만 같은 장소였다. 어렸을 땐 집이 없어 가족이 없는 줄만 알았다.

집이 있으면 가족도, 사랑도, 추운 겨울도 모두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집을 가져도 그녀에게 가족은 없었다.

집이란 그저 유일하게 몸을 누울 수 있는 아늑한 구름이었는데 그걸 태웅이 방해한다. 또 자신이 자란 보육원까지 찾아가 그녀의 소중한 사람에게 협박까지 했다. 이 이상 그녀가 태웅을 봐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날 좋아한다는 이유로 선배 감정 나한테 강요하지 마. 이렇게 찾아오지도 마. 선배는 이제 더 이상 내 사람 아니니까.”

“……왜.”

“그건 선배가 더 잘 알겠지.”

알아서 미치겠고, 알아서 붙잡을 수 없다.

“절절하네.”

“…….”

“가자, 우리 집으로.”

승리의 미소를 짓는 서도운이 부럽다.

제인의 손에 깍지를 낀 도운은 완벽한 그녀의 사람이었다. 함께 걸음을 옮기고, 차에 올라타고, 서도운의 집으로 향한다.

덩그러니 남은 태웅은 패배의 눈물을 삼켜 냈다.

* * *

집무실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앞서 나가는 제인이 도운의 손을 놓지 않았다.

도운은 열이 오른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응시하다 핸드폰을 들었다. 한 손으로 메시지를 써 안절부절못하며 따라오는 교진에게 보여 주었다.

[너도 이만 퇴근하고, 나머지는 월요일에 알아보자.]

교진은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회장님에게는 도운도 소문인 줄만 알았던 아이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제인아.”

“…….”

“누나.”

“…….”

“손제인.”

도운은 제 방에 들어와서야 제인의 몸을 돌려세웠다. 겨우 마주한 눈에는 뾰족한 날이 서 있었다.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도운은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감도는 손길로 제인의 뺨을 감쌌다. 그의 입가엔 키스라도 할 것 같은 감미로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난 지금 결혼 안 하게 돼서 기분 째지는데. 넌 아니야?”

여기저기서 손제인을 건드려서 화는 났다만 결과적으론 계획대로 됐다.

“너도 네가 원하는 대로 됐잖아.”

‘전 전무님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했던 당사자이니 제인 역시도 누구보다 솔직했던 자신의 고백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장애물들이 제인을 걸고넘어졌다.

그녀는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냥 화가 나요. 왜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누가 널 괴롭히는데.”

“…….”

“나한테 들러붙는 심채연? 너한테 질척거리는 하태웅?”

그것도 아니라면 감쪽같이 회장님의 눈을 가린 심창진과 최연정?

제인의 입술이 순간 일자로 다물렸다.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도운의 시선은 짙어졌다.

“그깟 거 다 나락으로 끌어내리면 돼.”

네가 괴로웠던 것만큼, 네가 감내한 만큼. 뭐가 됐든 그 이상으로.

잔인한 성정을 감춘 도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가를 휘었다.

“말하지 않을수록 내가 알아내는 속도는 빨라진다는 거 알아 두고. 누나 오늘 여기서 못 가는 것도 명심하고.”

도운은 보름달처럼 하얗게 빛나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기 내 방이거든.”

살포시 눈을 감았다 뜬 제인의 눈앞에 빳빳한 셔츠가 쓱 다가왔다.

“우선 씻고 나와. 입을 게 이거밖에 없다.”

“……전무님은요?”

“잠깐 어디 좀 다녀올 거야. 금방 와서 상처 치료해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초코한테 그러는 것처럼 제인의 콧잔등을 작게 스친 도운은 방에서 나갔다. 그제야 제인은 힘이 쭉 빠져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컹!”

잘 왔어!

마치 대답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초코가 꼬리를 흔들며 제인의 볼을 할짝할짝 핥아 올린다. 제인은 초코를 가만 끌어안아 보았다.

놀랍게도 마음의 안정이 빠르게 찾아왔다.

* * *

도운이 가는 길은 올곧았다. 예고 없이 회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니 국현이 홀로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경식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전무님, 잠시 저와…….”

“아니야, 더 설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아까 들은 그대로 최연정하고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내가 경영 수업으로 해외에 가 있는 동안, 최연정이 내 아이를 지웠지만.”

국현의 씁쓸한 말투에 경식은 걸음을 뒤로 물렀다. 보아하니 오랫동안 국현을 보필해 온 경식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도운은 자리에 앉아 두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세웠다.

“어차피 회장님하고 제가 알아내야 할 건 같습니다. 회장님의 아이, 분명 뭔가 있어요.”

연거푸 술을 마시던 국현의 손이 멈추었다. 도운은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금도 쪽은 그걸 알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도운은 감이 좋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직감이었다. 사업을 굴리고, 호텔을 움직이며 어쩔 수 없이 직감이 주는 힘을 믿어야 하는 국현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은 20년이 넘어서야 어렴풋이 의심을 한 문제를, 도운은 이토록 간단하게 알아낸다.

그럼 혹시 이 녀석도 손제인을?

국현은 한잔 털어 넣은 술에 기대어 물었다.

“손제인 기자는.”

“지금 제 방에 있습니다. 이 나이 먹고 연애하는 걸 허락받는 게 웃기긴 하지만, 그렇다고요.”

“손제인 기자도 너랑 연애하겠다던?”

“두고 봐야 알 일이죠.”

“쯧. 사람들 눈에만 안 띄게 해.”

“노력은 해 보죠. 결심이 서시거나 알아내시는 게 있으면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왜. 결혼 파투 낸 게 미안하긴 해?”

“감사해서요.”

“…….”

“지금껏 먹이고, 재우고, 키워 주시면서 제 마음마저 존중해 주시니 감사하죠.”

은근슬쩍 손제인 기자가 신경 쓰인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서도운 이 녀석이 목구멍을 꽉 조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운이 떠난 자리를 경식이 대신 채웠다. 경식의 얼굴엔 희미하지만,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제 눈에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 찾아온 거로 보입니다.”

“나 참. 세상 살다 보니 별일이군.”

자꾸 가슴이 울컥하길래 술을 한 잔 더 들이부었다. 따지고 보면 국현의 삶은 늘 그랬다.

회장이란 이름으로, 심창진의 라이벌이란 이유로 누군가에게 속을 편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껍데기만 화려할 뿐, 그게 참 씁쓸하고 보잘것없는 삶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내 선택이 틀리진 않은 것 같아.”

* * *

방문을 연 도운은 낮게 감탄했다.

“아.”

씻고 나온 제인은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전무님 안 계시는데 아무렇게나 앉아 있기 좀 그래서요.”

막 씻고 나와 발그레한 뺨, 물기를 잔뜩 머금은 머리카락. 한참이나 큰 셔츠 아래로 절반을 드러낸 허벅지까지.

도운은 문을 닫으며 제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제인아.”

“……네.”

“나 기다리면서 내 생각 했어?”

도운은 손을 뻗어 제인이 입은 셔츠 깃을 살짝 스쳤다. 제인은 순간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안 그래도 서도운 방에 온통 서도운의 향이 느껴져서 여러모로 난감한데.

“예쁘네.”

“…….”

“확 안아 버릴까?”

속마음을 가감 없이 내뱉는 서도운의 솔직함에 뺨이 홧홧해진다. 이곳으로 오겠다고 한 건 또 제인 본인이라 도망갈 수도 없다.

“오늘만 신세 질게요.”

“평생 져도 돼. 팔은.”

“괜찮아요. 구급상자 있길래 제가 약 발랐어요.”

도운이 와서 약을 발라 준다면 또 저번과 같은 민망한 일이 있을 것 같아 선수 쳤다.

“지레 겁먹고 빠져나가긴.”

도운을 알지만 넘어가 주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 입고 나오면 될 것을 상의는 굳이 나와서 입는 그를 보며 제인은 제 궁금증을 문득 떠올렸다.

“그런데 심채연 씨 어깨는 뭐예요?”

“딱 봐도 쇼 같아서 지워 보니까 역시더라고.”

도운은 구태여 제인의 어깨 위 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네가 누나라는 걸 알아차렸다는 것도 우선은 잠가 두었다.

이제 도운이 해야 할 일은 제인과 금도 사이의 비밀을 확실히 파헤치는 것이다. 진실로 한 발자국 다가가 과거의 모든 비밀을 낚아채야만 누나를 되찾고, 누나를 아프게 한 금도를 뭉갤 수 있다.

그 기회가 왔을 때 도운은 제인에게 묻고 싶었다.

“제인아.”

누나.

“네.”

“얼른 자자.”

누나 이름은 뭐야?

먼저 침대에 누운 도운은 제인의 팔을 끌어당겼다. 비밀로 드리워진 간극이 좁혀져 제인이 도운의 품에 들어왔다.

“말했지. 안아 버린다고.”

마음 같아서는 죄다 벗겨 내 멋대로 취하고 싶지만 참았다. 제인의 어깨에 슬쩍 입을 맞춘 도운은 허공을 응시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도운의 표정은 무감해졌지만, 눈빛만은 새파란 살기를 띠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