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흉포한 기세가 사정없이 밀려와도 국현의 이성은 쉽게 휘말리지 않았다. 국현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손제인 기자, 왜 아직도 그러고 있지?”
제인은 그제야 자신이 꼼짝없이 굳은 걸 느꼈다. 침착한 국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애절해 보이는 채연에게 흘렀다가 다시금 도운에게 닿았다.
“제인 씨, 얼른 나가 봐요. 금방 따라갈 거니까.”
교진의 조용한 속삭임은 도운의 속마음을 대변한 것 같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도운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장난스러운 신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장님 말씀대로 이행하겠습니다.”
노트북 가방을 쥔 손아귀에 땀이 흥건했다. 돌아설 때 얼핏 시야 끝으로 사정없이 일그러진 심채연의 표정과 아리송한 최연정의 얼굴이 보였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이 그들을 밀어냈다.
곧장 밖으로 나온 제인은 아무 룸이나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쁜 짓을 저지른 것처럼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어떻게…….”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최연정과 자신의 아이에 대해, 그러니까 나에 대해, 뭔가 알아낸 건가?
그렇다고 그녀를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자가 어떤 사건에 대해 냄새를 맡은 것처럼 사국현 또한 심창진과 최연정의 행동을 통해 제 아이의 생존 여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숨을 길게 내쉰 제인은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깊숙이 눌렀다. 선명한 맥박은 어떤 기대감과 놀라움으로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아빠…….”
제인은 한 번도 입에 담지 못했던 호칭을 조용히 흘려 보내 봤다.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어미인 최연정은 저를 매몰차게 버렸다.
하지만 사국현은. 그러니까, 아빠는. 제 존재를 알지 못해도 본능적으로 딸의 생사를 의심했고, 마음으로 낳은 서도운의 감정마저 존중해 주었다.
“이 자리는 애초에 심창진을 떠보기 위한 자리였어.”
결혼 성사가 아닌, 심창진과 최연정에게 무언의 겁을 주기 위해.
놀라 날뛰던 생각이 차곡차곡 정돈될 무렵이었다. 제인이 들어온 여닫이문이 사납게 열렸다. 미처 막아내기도 전에 제인의 손에 있던 노트북 가방이 착취당했다.
“뭐 하는 짓이야!”
뒤를 돌아보니 채연이 제인의 노트북 가방을 머리 위로 높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바닥에 패대기쳐 기사를 못 쓰게 할 심산인 것 같았다.
“하지 마!”
“너야말로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분한지 심채연은 간헐적으로 숨을 떨었다. 제인이 잠시 멈칫한 사이, 채연이 노트북 가방을 사정없이 바닥에 내던지려고 할 때였다.
“꺼져.”
“윽!”
원우가 등을 지고 서 있던 문이 다시 한번 거세게 열리며 도운이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원우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도운은 채연이 들고 있는 노트북 가방을 빼앗아 교진에게 던졌다.
“야.”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도운이 채연에게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검게 다가오는 짐승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너 죽을래?”
쇳소리처럼 흘러나오는 거친 목소리에 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깊숙이 차 있던 울분이 치솟았다.
꼭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서도운이었다. 지금처럼 제인이를 가로막은 채, 제인이가 제게 오는 길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는다.
채연은 부들거리며 소리쳤다.
“네가 말하는 누나는 나라고! 나!”
채연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스산하게 내려간 도운의 눈동자가 채연의 어깨 위에서 새로운 초코칩을 발견했다. 도운은 진심으로 웃겨서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 진짜 채연아.”
바람에 휘날리듯 잘게 앞뒤로 흔들리던 도운의 어깨가 우뚝 멈춰 섰다.
“너도 참 가지가지 한다.”
서서히 내려간 손은 채연의 어깨를 잡았다. 즐거운 기색이 완연했던 얼굴은 차갑게 메말라 있었다.
“교진아.”
한없이 싸늘한 시선에 묶인 채연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자 친구 아이라이너는 잘 사다 줬어?”
“어.”
“그래서 눈 밑 점은.”
그렇게 방심하는 사이, 도운이 채연의 어깨 위를 엄지로 거세게 짓눌렀다.
“예쁘게 찍으셨대?”
도운의 뒤에서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제인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제 어깨 위에 있던 점과 같은 위치에 심채연은 점을 찍어 놨다. 그걸 알아차린 서도운의 손에 그 점은 또 형편없이 지워졌다.
“이미 내가 제인이 어깨 다 확인했어.”
서도운이 채연의 귓가에 선득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채연은 빳빳하게 굳은 채 제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도운의 협박을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감히 내 앞에서 손제인인 척 연기를 해?”
“…….”
“난 여자 안 때려.”
“…….”
“그런데 내 여자 건드리면, 그냥 죽여 버릴 순 있어.”
흐읍, 채연은 목구멍이 막히도록 숨을 들이켰다.
큰일이다.
원우는 잠시 서도운을 막을까 고민했지만, 재빨리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갔다. 몰래 전달된 채연의 명령이 있었다.
‘제인이가 여기 왔다는 건 이변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땐 나 신경 쓰지 말고 호텔 사고 낸 차량 운전자 입단속 제대로 시켜.’
하지만, 정말 채연이는 괜찮은 걸까?
오토바이에 올라탄 원우는 핸들을 부서질 듯이 쥐었다. 채연을 위한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녀를 지킬 순 없다. 그것이 자신의 위치였다.
에덴 호텔 사고든, 점을 찍는 채연이든, 어떻게든 성사시키려는 결혼이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 차라리 이대로 그냥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면. 채연이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치열한 욕심의 저울질이 시작되느라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도운은 원우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읏!”
원우는 오토바이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도운은 손을 뻗어 원우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였냐?”
오토바이를 주먹으로 쿵쿵 내리찍는 행동에 척추에서부터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알아차렸다, 서도운이.
“개새끼도 주인 말은 가려 가며 들어야지.”
“…….”
“날 봐. 주인 건드리니까 광견병 걸린 새끼처럼 날뛰잖아.”
“이거, 놔…….”
점점 조여 오는 손아귀의 힘을 뿌리치려고 해도 꼼짝할 수 없다. 애송이의 움직임에 도운은 차가운 웃음을 흩뜨렸다.
“지원우 씨.”
“…….”
“주인은 이렇게 지키는 거야.”
오만하게 뇌까린 도운은 원우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 * *
국현이 떠난 자리는 쓰나미가 덮친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악!”
의자까지 집어 던진 창진은 넥타이를 쥐어뜯듯 풀어 헤쳤다.
어떻게, 어떻게 사국현이 제 핏줄에 관한 걸 알아차린 거지?
그는 연정을 서슬 퍼렇게 노려보았다.
“최연정, 설마 너는 아니겠지.”
“제가 제 입으로 무덤을 팔 리가 있나요.”
“그럼 사국현이 어떻게 알았냐는 말이야!”
“진정해요. 감이 좋은 사람이니 이런 식의 소란은 오히려 정보를 넘기는 행동이 될 거예요.”
연정도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20년을 감추고 있던 진실이 손제인이 나타난 이후 하나둘씩 까발려지고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손제인은 친아빠를 보고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다. 당연했다. 솔직하자니 그 보육원 원장과 아이들이 걸릴 것이고, 작정하고 숨기자니 자신의 존재를 알아 줬으면 하는 어린 날의 유약함이 남아 있으니까.
최종적으로는 손해를 보긴 했지만, 그만큼의 이득을 얻기도 했다.
애초에 연정의 목표는 이 결혼을 어그러뜨리는 것이었다.
제인은 가장 큰 변수였고.
그러나 그녀가 그 애를 가만히 두는 이유는 간단했다. 안타깝게도 연정은 제인에게 아주 작은 모성도, 미움도, 원망도, 관심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두 남자의 사랑일 뿐.
그 애를 건드리는 것보다 그 남자들을 직접 건드리는 것이 더 의미 있었다. 그들이 반응한다는 건 연정을 사랑한다는 뜻이니까.
“어쨌거나 결혼은 없던 일로 해야겠네요.”
그러니 사국현은 사국현으로 남아야 한다. 사돈이 아니라 저를 열렬히 사랑하는 한 남자로.
그게 못내 만족스러운 연정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고자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
창진은 보고야 말았다. 연정의 미소가 품는 또 다른 야릇한 연정(戀情)을.
* * *
“제인 씨, 도운이가 먼저 집으로 가라고 했으니까 안심하시고…….”
“저 괜찮아요, 교진 씨.”
룸미러로 힐끔힐끔 자신을 살피는 교진에게 태연하게 말했다만 제인은 지금 기가 완벽하게 빨린 상태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놀람과 기대, 충격과 경멸 그리고 허탈함.
처음부터 끝까지 저인 척하며 점까지 찍은 심채연을 봤을 땐, 그야말로 헛웃음이 나왔다. 심채연이 정말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라도 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말하는 누나는 나라고! 나야!’
서도운에게 소리치는 심채연에겐 애정이란 없었다. 어떻게든 무언가를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패악을 부리듯 미친 듯이 소리쳐 댔다.
서도운을 내 곁에서 억지로 떼어 내려는 듯이. 내 곁을 본인이 차지하려는 듯이.
정말로 최악 중의 최악인 계집애.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었다. 바람대로 창밖에 제인의 오피스텔이 보였다. 익숙한 두 실루엣도 보였다.
“도운이가 미리 온 모양인데…….”
“하…….”
“하태웅 기자도 왔네요.”
제인이 차에서 내리자 서로를 노려보던 두 남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