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40화 (40/79)

40화.

비로소 약속 장소인 고급 일식집에 도착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오늘 이곳을 통째로 빌렸다고 교진에게 들었다.

그래서인지 금도 가족께서는 친절히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부속품처럼 태웅도 껴 있었다. 어느새 잠에서 깬 도운은 목덜미를 주무르며 헛웃음을 흘렸다. 슬며시 짜증이 일었다.

“내리기 전에.”

먼저 내린 교진에게 문을 열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 도운은 제인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오늘 회장님이 어떤 대답을 할지 난 몰라.”

다시 한번 진지하고 새까만 눈동자가 제인의 마음에 깊숙이 와닿았다.

“하지만 이 결혼이 성사된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뒤엎을 거야. 에덴과 회장님을 버려서라도. 나한텐 너 하나면 충분하니까.”

뒤이어 봉긋한 이마에 맹세의 키스가 진득하게 찍혔다.

“나가자.”

도운이 멀어지자 제인은 감은 눈을 떴다. 도운은 마지막까지도 그녀의 손에 힘을 실었다가 밖으로 나갔다.

“반갑습니다, 심 회장님.”

“회장님이라니. 이제 장인어른이 될 수도 있는데. 아, 내가 너무 앞서 나가는 건가?”

제인을 잡았던 손이 심창진의 손을 잡았다. 잠시 내리지 않고 차 안에서 상황을 살핀 제인은 명확히 보았다. 저의 존재가 없는 걸 확인하고 미소 짓는 심채연을.

제인은 그 표정을 보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운의 곁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보란 듯이 생긋 웃어 주자 심창진을 뺀 금도의 모든 사람은 얼굴이 굳었다. 예상이 빗나갔다는 듯한 표정의 심채연과 그녀의 기분이 곧 자신의 기분인 지원우. 그리고 그녀가 안 올 거라 믿고 있었던 최연정. 오랜만에 제인을 본 태웅까지도.

“그럼 들어가 보지.”

국현이 싸늘하게 일갈하자 모두 일식집 안으로 들어섰다. 단, 딱딱하게 굳어진 채연을 끝까지 마주하던 제인은 딱 한 마디를 던지고 돌아섰다.

“왜 그래. 오라고 해서 왔는데.”

* * *

“채연아.”

“……가자.”

채연은 진정하라는 원우의 다독임에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또다시 제게 뒷모습을 보이는 제인의 어깨를 잡아채며 소리치고, 원망하고 싶었다.

너는 왜 내 뜻대로 해 주지 않느냐고.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굳이 제 눈으로 결혼이 성사되는 걸 보겠다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그 후에 그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건 결국 제인이 될 테니까.

채연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짓씹으며 다른 테이블에 앉은 제인을 의식했다. 가족이 만난 자리엔 시원하게 열린 여닫이로 문밖의 물레방아 소리만 졸졸 흘렀다.

따뜻한 녹차로 목을 축이며 먼저 말문을 연 것은 국현이었다.

“기자까지 대동한 거 보면 내 대답을 예상한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 그러는 넌, 사고로 다친 손제인 기자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아?”

즐거움이 묻어난 창진의 음성은 제인에게로 향했다.

“어때. 손제인 기자, 몸은 괜찮아요?”

그 질문에 긴장한 건 도리어 태웅이었다. 제인은 태웅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기계적으로 응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두 사람, 같은 언론사에서 일했는데 뭘 그렇게 딱딱하게 있어. 인사라도 하지 그래.”

“여유로우시네요, 심 회장님.”

“서 전무와 내 오랜 친구가 너무 긴장한 것 같길래 말이야.”

창진은 흘러가는 분위기의 승기를 잡은 태도였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가벼움에 도운은 창진을 서늘하게 주시하며 미소를 덧그렸다.

“그럼 최 여사님도 우리 회장님과 인사 좀 나누시지 그러십니까.”

“서 전무.”

“왜요. 명색이 연이 닿았던 사이인데.”

육중한 농락에 창진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도운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요, 심 회장님.”

맹수들의 사나운 기 싸움이 시작됐다.

“긴장 좀 하시라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때, 침묵을 유지하던 연정이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사고 소식 들었어, 국현 씨. 호텔 피해도 막대할 것 같은데 괜찮아?”

온화한 음성과 걱정은 지금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창진은 험악한 눈빛으로 연정을 할퀴듯 바라보았고, 채연은 미간을 사정없이 구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채연은 연정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간드러진 교태로 국현을 흔들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갈 생각이었다.

오로지 본인의 사랑과 만족을 위해.

이 자리가 시작된 지 불과 10분 만에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테이블 위로는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이 가득하다. 제인은 손바닥에 맺히는 긴장감을 느끼며 느리게 이어지는 국현의 반응에 귀를 기울였다.

“의문에 의문뿐이군.”

“무슨 뜻이지?”

국현의 반응을 기다렸던 창진이 득달같이 물었다. 하지만 국현의 시선은 의의로 채연에게 돌아갔다.

“그 전에 내가 채연이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도운이를 사랑하나?”

원초적인 애정에 관해 묻자 모두의 시선은 대답을 원하는 상대를 향해 화살표를 그렸다. 제인은 채연에게로, 도운은 국현에게로, 태웅은 제인에게로, 원우는 다시 채연에게로.

서로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무슨 속내인지 알아보려는 곤두선 눈빛이었다. 때가 왔다고 생각한 채연은 눈가와 입매에 사랑과 설렘을 끌어모았다.

“네, 그럼요.”

“도운이 너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단번에 튀어나온 말에 거짓은 없었다. 도운은 그 순간 눈이 마주친 제인에게 살짝 윙크했다.

그 대답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창진은 조급한 성미를 드러냈다.

“이 세계 결혼이 원래 그런 건데 새삼스럽게 뭘 묻지? 네 의중이 뭐야.”

금방 결정될 거라고 생각한 결혼이 끝도 없이 늘어진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도운이 너, 보육원에서 누나를 만났다고?”

예감은 적중했다. 보육원과 누나. 국현의 입에서 절대 나와선 안 되는 단어에 창진과 연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제인이 커다래진 눈으로 국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가진 의문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원정 출산이라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심채연이 세상에 공표된 시기, 도운이가 울며불며 찾던 누나, 그리고 어린 심채연을 보자마자 귀신같이 눈물을 그치던 어린 날의 도운.

시간이 흘러 아이에 관해 은근히 묻던 심창진. 그리고 이 상황과 관련이 없지만…….

“…….”

사뭇 흔들리는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손제인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심채연이 내 딸이었다면, 난 심창진처럼 사랑하는 내 딸을 쉽게 넘겨주지 못했을 거라고. 그리고 그게 도운이라도 마찬가지다.

굳은 결심이 선 국현은 창진과 연정에게 소름 끼치도록 냉랭한 의문을 던졌다.

“심창진, 넌 딸이 도운이의 아이를 가질까 봐 걱정하면서 막상 딸은 너무 쉽게 팔아넘기는 거 아닌가?”

“요지를 정확히 말해, 사국현.”

“최연정 너도 마찬가지야.”

특히 강조한 국현은 숨겨 둔 그 날의 진실을 끄집어냈다.

“난 우리 사이의 애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런 생각은 못 했을 것 같은데.”

“사국현!”

주먹으로 테이블을 친 창진이 거센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정은 창백해진 얼굴로 국현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부부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거의 일을 알아 버린 건가?

호흡이 흐트러진 창진과 달리 국현은 안정적인 소나무 같았다.

“이제 애들도 알 때가 됐는데 뭘 감추고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가정사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데. 아니면…….”

도운은 정확히 간파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사국현과 최연정 사이의 아이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죽었다고 했던 내 아이가, 살아 있기라도 한 건가?”

두 사람 사이의 아이는 살아 있다. 분명 어디엔가.

도운은 숨을 급하게 들이쉬는 제인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예리하게 파고든 국현은 잠시 채연을 보고 저도 모르게 제인을 보았다.

창진은 채연을 본 국현의 시선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반대로 연정은 제인에게 향한 국현의 시선을 읽고 물잔을 부술 듯이 움켜쥐었다.

“아이 문제로 날 들쑤시면 원하는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큰 오산이야. 오히려 심창진 네 말 덕분에 정신이 바짝 들었으니까.”

국현은 짓씹듯 내뱉었다.

“도운이도 내 자식이야.”

“…….”

“이 결혼 안 시켜.”

그리고 국현은 곧장 제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손제인 기자?”

“……네.”

심장이 뜨끔해진 제인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나운 분위기는 어디 가고, 국현은 잠시 제인이 다친 팔 부근을 주시하더니 혀를 찼다.

“다친 팔로 힘들겠지만, 지금부터 내가 한 말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쓰지.”

“…….”

“에덴과 금도의 결혼은 앞으로 없을 거라고.”

거침없는 결단이 떨어졌다. 국현의 한마디로 룸 안의 공기는 균열을 일으켰다.

“사국현, 어디서 어떤 개소리를 들었는진 몰라도 아이 이야기는 오늘 결혼과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아까 도운이가 경고하지 않았나. 긴장 좀 하라고.”

“사국현.”

“그리고 방금 말했잖나. 도운이 결혼, 안 시킬 거라고.”

언어 배열을 바꾼 국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더욱 강한 강조의 색을 띠었다. 도운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대반전의 결과였다.

“그러게, 제 말 좀 들으시지.”

“이 미친 새끼가.”

길게 찢어지는 도운의 입꼬리를 보며 창진은 이를 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