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벌써 같은 영상을 다섯 번째 돌려 보는 중이다. 눈알이 시큰해진 교진은 뿔테 안경을 빼고 콧잔등을 꾹 눌렀다.
“아무리 봐도 별다른 점은 발견 못 하겠어. 네 말대로 피해 보상을 핑계로 차 수리도 우리 쪽에서 처리했는데 브레이크도 정말 끊어지기 직전이었어. 아예 끊어졌더라면 정문은 그냥 박살 났고, 고객들은 물론 제인 씨도 위험할 수 있는 상태였어.”
“그러니까 이상하지. 어중간하게 끊긴 브레이크는 차가 갑자기 튀어 나갈 명분이 되고, 사람은 죽지 않되 적당히 다치게 하기만.”
탁, 탁. 검지로 CCTV 영상을 돌려 보는 도운의 손길은 매서웠다.
“적당히 소란스러운데 또 적당히 무마되기도 딱이잖아.”
“네 직감대로 정말 제인 씨를 노린 사고라면 심창진과 심채연 중 한 사람이 아닐까?”
교진이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제시하자 도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단언하는데 심채연이야.”
“이유는?”
“오늘 결혼 이야기를 다시 나눈다고 했어. 그런데 심창진같이 영악한 인간이 복수의 기회를 앞두고 이런 소란을 일으킨다? 절대 아니야. 오히려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는 편을 더 선호할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으니 피가 차갑게 식는다. 감히 손댈 곳도 없는 손제인을 건드려?
어제 제인이 침착하게 그를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사람들 앞에서 무슨 짓을 벌였을지 모른다. 그대로 심채연에게 가 똑같이 차를 들이박는 잔인한 상상까지 했었다.
“그럼 심채연이 제인 씨한테 원하는 게 뭔데? 생명의 위협?”
“그것도 아니야. 그러려면 조용히 처리했겠지.”
“그럼 뭔데. 우리 전제는 두 사람이 자매라는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심채연은 어떻게 자기 친동생한테 그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교진은 참았던 답답함을 토해 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이든 이건 살인 미수였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마저 앗아 갈 뻔한 끔찍한 사고방식.
도운은 교진의 궁금증에 여러 증거를 열거했다.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손제인, 그 후로 결혼을 밀어붙이는 심채연, 어렸을 때부터 누나를 좋아했던 나. 내 과거를 생각하면 딱 감이 잡히지 않아?”
화면을 오래도록 바라본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로 교진을 직시했다. 교진은 문득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 제인 씨를 원해서?”
정답. 신호를 주듯 도운이 살짝 윙크하자 집무실 문이 열렸다. 예감대로라면 심채연이 원하는 손제인은 이곳에 있다. 바로 자신의 곁에.
“전무님, 지금 보셔야 할 기사가 있습니다.”
“뭔데?”
“어제 사고로 보인 전무님의 대응 방식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며 지금 에덴의 주가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대요.”
기쁜 듯 빠르게 말하는 제인을 바라보며 도운은 만족스러운 고양감을 느꼈다.
“웃네. 잘 안 웃더니 고작 이런 거로.”
난 네가 다쳐서 울고 싶은데. 또 너로 인해 웃게 되고.
미묘한 감정의 경계선에서 도운은 픽, 웃으며 눈썹을 느리게 문질렀다. 급변하는 도운의 분위기를 느낀 제인은 교진을 슬쩍 바라보았다.
교진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때, 다시 고개를 바로 한 도운이 말했다.
“네 희생으로 얻은 주가가 무슨 소용이야.”
“…….”
“제인아.”
“……네.”
마주한 눈동자는 짙었다. 하지만 그게 제인을 향한 차가움이나 분노는 아니었다.
“난 앞으로 무엇도 잃지 않을 예정이야. 그게 너라면 더더욱.”
단호하게 일갈한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트북을 제인에게 돌렸다.
“어제 사고 난 정문 사각지대 CCTV야. 혹시 아는 거 있어?”
난 이제 네가 내 누나라는 것도 알고, 이게 심채연 짓이라는 것도 알지만 관계가 청산되지 않는 이상 너는 말해 주지 않을 테니까.
도운은 느긋하게 기다려 주기로 했다. 누나는 날 21년간 기다렸을 테니까. 하지만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기에 개새끼의 성미는 급해 직접 먹이를 사냥하러 갈 것이다.
“한번 살펴볼게요.”
제인은 차마 심채연의 짓이라고 말하진 못했다. 구체적인 증거 없이 내뱉으면 기업 간의 싸움이 될 테고, 결국 힘없는 제인의 패배가 될 것이니까.
기자 생활을 하며 얻은 건 확실한 증거와 논거다. 그리고 눈썰미까지 얻게 됐다.
“그런데, 여기. 여기랑 여기도.”
제인은 여러 개로 띄워진 CCTV 영상을 하나하나씩 짚었다. 도운과 교진의 고개가 노트북 화면으로 기울였다.
“사고 전부터 사고 직후까지 같은 오토바이와 사람이 있네요.”
흐려서 식별은 어렵지만 확실하다. 영상을 보는 도운의 동공이 좁아졌다.
“그러게.”
심채연 곁엔 충성스러운 지원우가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 * *
집무실 창가에 선 창진이 몸을 돌렸다. 그는 접대용 소파에 앉아 있는 태웅에게 들고 있던 태블릿을 건넸다.
“에덴 호텔에서 사고가 났던데.”
“네, 저도 소식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 사진 속 여자. 또 손제인이더군.”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했던 태웅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태웅은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창진이 띄운 기사 위로 시선을 꽂았다.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제보로 뿌려진 기사 안에는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에덴 호텔 전담 기자’라는 명확한 신분 확인과 함께 모자이크 처리된 제인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또 손제인…….”
창진은 그 이름을 입속으로 굴려 보았다. 그럴 리 없는데 자꾸 어디서 본 것만 같고, 어딘가 모를 찝찝함으로 자신의 뇌리를 기분 나쁘게 건드린다.
“서도운하고 손제인. 정말 뭐 없는 거 맞나?”
기습적으로 찔러 오는 공격에 태웅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알고 있었더라면 제가 가장 먼저 회장님께 알렸을 겁니다. 혹시 회장님께서도 뭔가 알고 계신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알아보겠습니다.”
저는 금도의 사람이니까요.
충성의 뉘앙스에 창진은 만족스럽게 두 팔을 팔걸이에 넓게 펼쳤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오늘 대단한 기사 한번 준비해야 할 거야.”
“서도운과 심채연 씨의 결혼 기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오늘이야말로 이 결혼설에 종지부가 찍히는 날이니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다.
“나가 봐. 이따 보자고.”
“예.”
문을 거만하게 턱짓한 창진은 태웅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태웅이 나가자 창진은 곧장 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단아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창진의 입가엔 감미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예전에 보육원에 버리고 온 당신 막내딸. 어떻게 됐지?”
-전 모르죠. 그 후로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 목소리로 저를 향한 맹목을 알리니 온몸이 나른해진다.
“난 지금 이 질문을 들은 당신 표정이 너무 궁금해.”
-…….
“하지만 우선 믿어 보도록 하지.”
너는, 내 여자니까. 사국현이 감히 손댈 수 없는 나만의 여자. 누구의 엄마도, 가족도 될 수 없는 오롯한 나만의 소유.
그러니까, 사국현.
“자, 이제 만찬을 즐기러 가 볼까?”
아주 잘근잘근 씹어 주겠어.
* * *
에덴 건설 앞에 차 두 대가 나란히 대기해 있다. 기자들의 취재로 인산인해였던 호텔 앞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실금이 간 정문도 말끔히 교체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사고의 잔해가 남아 있나 살피던 국현의 시야에 문득 껄끄러운 장면이 걸렸다. 왈칵 인상을 찌푸린 국현이 경식에게 물었다.
“손제인 기자가 왜 저기 있지?”
“전무님의 전담 기자잖습니까. 어떤 결정이 오가든 오늘 금도와의 자리에 함께해야 합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큰 사고가 있었으면서 왜 제 몸 하나 보살피지 않고 저리 꼿꼿하게 서 있냐는 거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그래.”
국현이 회전문을 타고 나타나자 제인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국현은 매서운 꾸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제인을 훑었다.
피가 묻은 셔츠는 이미 다른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카메라는 다행히 심한 손상이 없는 모양인지 렌즈만 바꾸어 끼워져 있었고.
“이만 출발하지.”
도운이 저 녀석이 있는데 제가 뭐라고 매서운 꾸중을 하고 싶은 건지. 분명 도운이를 흔드는 위험한 존재라 경계하고 또 경계했는데, 왜 자꾸만 그녀가 다쳤다는 게 신경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질적인 마음을 덮고자 돌아설 무렵, 가만히 서 있던 도운이 국현에게 한마디 던졌다.
“회장님,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해 주십시오.”
애초에 대답은 바라지 않은 듯 도운은 곧바로 제인을 이끌어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 연이어 교진이 운전석에 올라탔고 차는 소리 없이 출발했다. 긴장된 정적을 깬 건 도운이었다.
“다쳤으면서 왜 자꾸 간다고 그래.”
“가야죠.”
약간 쓸렸을 뿐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다. 거기다 심채연이 제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나. 제게 오라고.
그런 말을 한 이유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기로 했다. 당한 사람은 이쪽인데 일을 저지른 사람의 심리를 애써 이해해 봤자 뭐 하나. 오라고 했으니 갈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대응하고 무엇을 원하든 엇나가 줄 생각이었다.
제인은 고개를 돌려 도운을 마주 보았다. 사고 때문에 화를 내고, 치료해 주며 욕망을 내보이고, 무엇도 잃지 않을 거라며 진지한 구석을 내보였던 눈빛에는 지금 아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인은 웬만한 여자보다도 매끈한 도운의 뺨에 가만히 손을 얹고 고개를 바로 돌려 주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전무님이나 잠시 눈 좀 붙이세요.”
고개를 기울인 도운은 바람 빠지듯 설핏 웃어 보였다.
“그럴까.”
손제인의 손을 원했던 제게, 그녀는 자신이 원할 때 손을 내어 준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손제인이 직접 손을 내밀어 주는 일이 많아진다.
그게 흡족한 도운은 아양을 부리듯 제인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힘을 약간 더 주어 그대로 제인의 어깨에 머리를 뉘었다.
“똑바로 주무세요.”
혼내는 말투지만 어깨에는 은근히 힘을 뺀다. 도운은 눈을 감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움직이지 마. 나 삼 일은 못 잤으니까.”
“…….”
“제인아.”
“네.”
“내가 널 거기에 데리고 가는 게 맞는 건가 싶다.”
제인은 살짝 커다래진 눈으로 도운을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이마에 제인의 턱 끝이 스쳤음에도 미동이 없다.
도운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이해가 되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가게 되는 억지 상견례. 과연 어떤 결정이 오고 갈지 제인도 초조하고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