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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38화 (38/79)

38화.

“제, 제가 사고를 낸 건 맞지만, 갑자기 브레이크가 안 먹어서…… 저, 정말 죄송합니다!”

“브레이크가 안 먹었는데, 갑자기 차가 멈춰서 유리문에 실금만 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다 저희 쪽 정리가 덜 돼 일어난 사고입니다. 저희가 병원비와 차량 피해비를 전액 보상할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동의하십니까, 회장님?”

선득한 직감이 뇌리에 스친 도운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국현을 돌아보았다. 국현은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만, 서 전무의 말대로 다 저희 측 불찰입니다. 신속히 처리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그 틈을 타 도운은 제인의 손을 잡고 한산한 호텔 로비로 이끌었다.

“넌 올라가서 치료해.”

“하지만 대응 기사를 먼저…….”

“기어코 내가 여기서 네 옷 벗기고 치료해야 하지.”

사납게 터진 음성이 제인의 입을 봉쇄했다. 제인은 서도운이 화난 모습을 처음 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알겠습니다.”

제인은 결국, 한발 물러서기를 택했다. 제인을 혼자 올려 보내야 하는 이 상황이 도운은 미치도록 싫었다.

“씨발, 진짜.”

욕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제인이 떠난 자리엔 수리 업체에 연락을 취한 교진이 왔다.

“아직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도 모르는데 전액 보상이라니.”

“그러니까.”

도운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병신처럼 눈 가린 척하고 진실을 알아보자고.”

도운은 정문 CCTV를 턱짓했다.

“당장 영상 확보해.”

* * *

[단독] 에덴 호텔, 승용차 브레이크 오작동 사고로 정문 산산조각.

치료하라고 했지만, 제인은 쉴 틈이 없었다. 이미 손 빠른 몇몇 기자들은 냄새를 맡고 득달같이 사고 기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바쁘게 공식 기사를 쓰는 제인은 손만큼이나 머릿속도 빠르게 돌아갔다.

‘선택권을 줄게. 한 시간 안으로 나한테 와.’

심채연이 한 말은 진짜였다.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자 의문의 사고가 벌어졌다. 누구보다 심채연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또 한 가지 생각이 예리하게 스친다.

“처음부터 서도운이 아니라 나를 끌어들이려고…….”

그러고 보니, 옛날에 심채연이 서도운을 싫어하지 않았나. 그녀를 자꾸만 빼앗아 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설마 그런 거라면…….”

대단히 나쁜 년이다. 채연에게 일말의 애정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것마저도 쓸려 내려갈 정도의 악독한 짓이었다.

그때,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걸어온 도운은 제인의 팔을 낚아챘다.

“잠깐만요, 전무님.”

쾅!

골이 울릴 만큼 방문을 세게 열어젖힌 도운은 제인을 침대에 앉힌 뒤 서랍 이곳저곳을 열기 시작했다. 흉포하게 부푼 등 근육이 도운의 심기를 말해 주고 있었다.

“전무님, 저 괜찮습니다. 일을 먼저…….”

제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급상자를 침대에 패대기친 도운이 밖으로 나가 제인의 노트북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의 무릎 위에 노트북이 올라왔다.

“됐지. 벗어.”

“네?”

“벗으라고.”

사나운 눈빛은 그녀의 셔츠를 찢을 기세였다.

“셔츠에 피가 떡칠이 돼 있는데 치료 안 하게? 네가 내 곁에 있으면서 벌써 두 번이나 다쳤어.”

처음은 엿 같은 심창진의 술수로 제인이 오는 걸 알지 못했던 때였다. 그때 제인은 뜨거운 그릇에 예쁜 손등을 데었다.

“근데 난 그 두 번 다 너한테 달려가지 못했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으면 너도 한 번쯤은 내 말대로 해.”

“…….”

“빨리.”

셔츠를 가리키는 턱짓에 제인은 하는 수 없이 사선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기억법을 찾았다더니, 순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제인은 순순히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모르니 보여도 상관없겠다.

옷감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야릇하게 났다. 팔뚝에서 멈춰 선 셔츠는 제인의 어깨를 드러냈다. 도운의 눈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어떻게 알고 내려오셨어요?”

“초코칩.”

“네?”

찾았다, 내 초코칩.

어색하게 던진 질문에 도운은 뜻 모를 말을 했다. 갑작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는 아까완 전혀 다른 기분을 보여 주고 있어 제인을 당황케 했다. 도운은 축축한 연고로 제인의 상처를 훑었다.

“흣.”

약간 쓰라려 제인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럴수록 도운의 시선은 정확히 제인의 어깨 위에 있는 점 세 개에 박혔다.

밤새 기억을 뒤지며 떠올린 것이 있다.

‘내 이름은 네가 앞으로 2주 동안 다른 집으로 안 가면 알려 줄게.’

‘왜 그때 알려 주는데?’

‘이름 알려 주고 가 버리면 어차피 넌 나를 잊어버릴 거잖아.’

‘아니야, 나 누나 안 잊어.’

‘맞아, 나 잊지 마. 나는 왼쪽 어깨에 점이 세 개나 있어. 그건 무조건 나야.’

그의 근간이었던 누나와의 약속. 그 속에 담긴 누나의 간절함. 그게 지금, 도운의 눈앞에 찬란히 떠 있다. 당장 맛보고 확인하고 싶다.

“읏! 지금 뭐…….”

제인은 어깨에 닿는 촉촉한 혀에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뱀처럼 허리를 옥죄는 손에서 벗어날 수도 없어 더 바르작거리게 됐다.

“아파하는 것 같아서.”

도운은 혀를 내밀어 제인 모르게 나란히 이어진 점 세 개를 핥아 내렸다.

“안 아프게 해 주려고.”

입술을 지분거려도, 몰래몰래 잘근잘근 피부를 씹어 봐도. 사랑스러운 초코칩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제인아. 누나.”

“하아…… 좀…….”

“너 어떡하냐.”

딱 들켜 버렸네, 내 누나라는 걸.

* * *

“어제 참 재미있는 짓을 했더구나.”

청담동의 고급 에스테틱. 마사지 베드에 누워 AC 에센스 관리를 받던 연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옆 베드에 누워 골드링으로 뭉친 어깨를 마시지 받던 채연이 눈을 떴다. 모녀의 묘한 분위기에 관리사들은 눈치껏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잠깐 장난 좀 쳐 봤어요. 너무 걱정은 마세요. 제인이 별로 안 다쳤으니까.”

“…….”

“아, 그럴 마음도 없으시죠?”

비아냥과 조소를 곁들인 채연은 매끈한 턱을 돌렸다. 어느새 연정은 감은 눈을 뜨고 채연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두 모녀의 팽팽한 시선이 이어졌다.

“엄마 속셈 다 알아요. 아직도 사국현한테 마음이 있는 거죠? 그런데 내가 제인이 들쑤실수록 아빠는 아빠대로 멀어지고, 사국현에게는 저와 제인이에게 벌인 만행이 드러나 미움받을까 봐 그러는 거잖아요.”

“접근은 좋았지만, 틀렸어.”

흥미가 드리운 듯 연정의 입꼬리는 은은하게 늘어났다. 눈썹을 구긴 채연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연정의 변명을 들어 보았다.

“정확히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 제인이를 네 아빠한테든 국현 씨한테든 들켜서는 안 되는 건 사실이야.”

“두 남자를 사랑하니까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연정은 채연이 가장 가까운 진실은 알지 못하게 빙빙 돌려 말했다. 그럴수록 의중을 알 수 없는 채연은 혼란스러웠다. 또 굳이 부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평정심을 잃었다.

채연은 필사의 오기를 부렸다.

“엄마 말대로 팔자는 정말 어쩔 수 없나 봐요. 저도 지금 원우랑 도운이 사이에서 이러고 있으니.”

“…….”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세요. 엄마 소원대로 제인이는 오늘 안 올 거고, 전 제인이가 절 필요로 하길 바랄 뿐이거든요. 원장님?”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린 채연은 원장을 불렀다. 그래서 제인이 오지 않는다는 말에 반짝이는 연정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불편하신 곳 있으세요?”

채연은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원장에게 요구했다.

“요즘 아이라이너로 점을 찍는 게 유행이라던데. 저도 그것 좀 해 보려고요. 관리 끝나고 어깨에 부탁해요.”

어깨에 점. 채연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그려지는 연정은 피로가 느껴져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말릴 생각은 없다. 채연이가 끝까지 채연인 척한다면 그건 연정에겐 고마운 일이니까.

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념은 역시 저를 닮은 딸이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은선에게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고민한 제인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은선의 마음을 알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원장님.”

-제인아! 너 괜찮은 거니?

최대한 발랄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은선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그 걱정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제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괜찮아요. 기사 보신 거죠?”

-그래, 에덴 호텔 사고 기사 보고 놀랐는데 네가 떡하니 있어서 더 놀랐어. 모자이크 처리됐어도 내가 제인이 널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알아본다. 별것도 아닌 정체성의 부여에 마음이 아늑해지는 제인이었다.

-제인아, 그 사고 혹시…….

“네, 심채연 짓이에요.”

제인은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9시, 출근 시간이 되자마자 교진은 에덴 호텔 정문에 배치된 CCTV 영상을 모조리 확보해 왔다.

분명 도운은 어제 선언한 대로 피해자와 다친 고객들에게 모든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보상했다. 모든 언론사도 그렇게 알고 있고 심지어는 제인도 그렇게 대응 기사를 뿌렸다.

그런데 도운은 뭔가를 알아내려는 사람처럼 지금 교진과 집무실 안에서 CCTV 영상을 돌려 보고 있었다.

설마, 심채연 짓인 걸 눈치챈 건가?

제인이 한동안 말이 없자 은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인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네, 저 정말 괜찮아요. 원장님도 당분간 몸조심하세요.”

통화를 마무리한 제인은 포털 사이트에 금도 그룹을 검색해 보았다. 사고의 뒤탈이 이쪽과 관련되어 있다면 분명 암암리에 퍼졌을 텐데 금도 그룹의 기사는 깨끗했다.

“그럼 정말 심채연의 단독 범행이라는 건데…….”

‘선택권을 줄게. 한 시간 안으로 나한테 와.’

모기처럼 맴도는 의미심장한 말을 곱씹으며 의미 없는 마우스 클릭을 반복할 때였다. 무려 3분 전 뜬 새로운 기사 헤드라인이 제인의 눈을 사로잡았다.

“어?”

제인의 눈엔 일순 생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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