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겉으로는 소박해 보였던 면세점의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제인은 에덴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욕심을 부려 잔뜩 찍은 사진을 살펴보았다.
적어도 에덴에 발을 들인 이상 도움이 되고 싶었다. 서도운의 명예에, 사국현이 평생을 가꾸어 온 에덴에.
“얼른 초코 놀아 주고…….”
기사를 올려야겠다.
산뜻한 계획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평일 오후의 호텔 앞은 한산했지만, 제인의 맞은편에선 흰색 승용차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러다 사고 나지.”
대수롭지 않게 차를 지나친 제인은 직원에게 맡겨 둔 초코에게 다가갔다. 초코는 얌전히 앉아 있다가 제인을 발견하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컹!”
“미안. 많이 늦었지.”
“컹컹!”
초코의 목줄을 풀어 주는데 어쩐지 초코의 짖는 소리가 사납다. 곳곳에서도 경악 어린 목소리가 터졌다.
“어? 저 차 왜 저래.”
“저 여자, 아니. 아기가 있어요!”
“컹! 컹컹컹!”
초코가 저렇게 격렬하게 짖는 것은 처음 들었다. 뒤가 이상하다고 느낀 제인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기묘한 감각에 공기가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기도 했다.
‘저러다 사고 나지.’
말이 씨가 된 것처럼 앞서갔던 흰색 승용차는 위압적이고도 날렵한 속도로 제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주변이 느리게 흘러갔다.
“어떡해!”
“얼른 피하세요!”
“컹!”
그 순간, 힘으로 목줄을 푼 초코가 제인을 향해 앞발을 쭉 뻗었다. 체지방이 거의 없는 도베르만의 견고한 힘이 제인을 옆으로 밀쳤다. 몸이 바닥과 부딪혔다. 그제야 멈췄던 시간이 빠르게 돌아갔다.
“초코야!”
제인이 있던 곳에 초코가 있다. 흰색 자동차가 다가오기 직전, 제인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초코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경로에서 비켜 섰다. 긴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리며 차가 향하려는 정문을 바라보았다.
“아악!”
웬 아이의 엄마가 유모차를 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제인은 상체가 앞으로 급히 쏠릴 정도로 내달렸다.
“안 돼!”
간절하게 뻗은 손끝이 유모차 손잡이를 잡았다. 아이의 엄마와 유모차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순간이었다.
쾅!
승용차가 에덴 호텔 정문을 박은 채 기적적으로 멈춰 섰다.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그렇게 뚝.
“응애! 응애!”
“어, 엄마 여기 있어. 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제인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는 쓰러진 유모차 속의 아이를 허겁지겁 달랬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사태를 파악하고 나자 그제야 상처의 통증이 느껴졌다.
“윽, 초코…….”
어느새 다가온 초코가 바닥에 쓸린 제인의 팔 상처를 핥아 주었다. 순식간에 보안 요원이 차를 에워쌌다.
초코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바닥에 나동그라진 제인의 카메라를 물고 어디론가 다급히 가기 시작했다.
“초코야, 잠깐! 읏!”
하지만 다친 제인이 초코를 따라갈 순 없었다.
* * *
운전자는 허겁지겁 차에서 나왔다. 실금이 간 에덴 호텔 정문과 사람들을 살펴본 그의 낯빛은 아연했다.
“괜찮으세요? 차 브레이크가 갑자기 안 먹어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남자는 원우가 고용한 연극배우였다. 인지도는 전혀 없지만, 실력은 아주 출중한. 곯는 배를 채워 준다고 하면 뭐든 다 하는 그런 광대들 말이다.
멀찍이 오토바이를 세우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원우는 바로 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친 곳은?
재빠르게 연결된 음성은 두려움으로 떨렸다.
원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친 곳은!
“……팔만 조금 다쳤어. 내일 참석 못 할 정도인 건 확실해.”
-하아, 알았어. 남자 입단속 잘 시키고.
살짝 떨리는 손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제가 사랑하는 심채연. 제 여자로 만들고 싶은 심채연.
그녀가 내일이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종말이지만, 그녀가 서도운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어차피 이 결혼의 목적은 손제인이니까. 그 어떤 것보다 화려한 집에서 살고 있어도 마음엔 가뭄이 일고, 거대한 비밀을 짊어지고 있는 채연이니까.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이런 비열한 짓을 해서라도 선물해 주고 싶다. 하지만……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질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미안해, 채연아.”
원우는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에 대고 속삭였다.
“손제인까지는 양보해도 서도운은 안 되겠어.”
그렇다면,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하태웅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가죽 재킷에 핸드폰을 넣은 원우는 곧장 헬멧을 쓴 뒤 에덴 호텔을 날렵하게 빠져나갔다.
* * *
도운이 내세운 면세점과 패키지 사업 건으로 회의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그럼 MZ 세대를 공략한 혼자 여행 패키지 식사는 어떻게 구성할까요?”
“혼자 호캉스를 즐기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여유와 감성을 동시에 즐기려는 거지. 식사는 조식처럼 가벼운 브런치로 꾸며 봅시다. 과일도 필수로 넣고요.”
“그럼 기존에 에덴 호텔이 추구하는 과일로 구성해 보겠습니다.”
“거기에 체리도 추가해 보도록 하죠.”
대담한 기백으로 의견을 쏟아 내던 도운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런 그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국현의 입가가 일순 꿈틀거렸다.
체리. 국현에게는 가장 거슬리는 단어이자 아픈 단어였다. 그걸 알 리 없는 도운은 고개를 까딱였다.
“체리를 먹어 봤는데 맛있더라고요.”
과일이란 말에 문득 손제인이 생각났다. 매번 상큼하게 톡톡 쏘아붙이면서도 때로는 결혼하지 말라는 솔직함으로 달콤함을 뿜어내는 손제인이.
아침만 해도 체리 에이드로 물든 붉은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말하는데, 그만 콱 씹어 먹어 버릴 뻔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장님?”
“……좋은 의견이야. 요즘 사람들은 흔해 빠진 과일보다야 품종 개량한 과일이나 열대 과일을 더 즐겨 먹으니.”
탐탁지 않지만 일과 개인적인 감정은 별개다. 적당히 들어 주고 과감히 선택을 내린 국현 덕분에 도운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런 중대 사항은 기사로 쓰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오늘은 그 기자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슬슬 비아냥거리며 시동을 거는 이사회의 시비도 웃으며 잘라 낼 수 있었다.
“김 이사님.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이해합니다만, 회장님에 대한 예의는 지켜 주셨으면 하는데요.”
“전 지금 서 전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요. 저는 회장님이 데리고 온 호랑이입니다. 장성해 은혜를 보답하고자 백방으로 머리 굴리고 있는데 이사님은 지금 손제인 기자를 받아들인 회장님의 선택마저 욕하고 계시네요. 저랑 척을 지시고 싶은 겁니까?”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니 기선 제압은 확실히 됐다. 고요해진 회의실 안에는 김 이사의 멋쩍은 헛기침만 울려 퍼졌다. 그때 교진과 경식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들은 각기 입가를 손으로 막고 고개를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에덴 호텔 서도운 전무님 비서…… 네?”
“호텔 정문에서 사고가 있었다고요?”
시선이 부딪쳤다. 동시에 회의실 밖에서의 음성도 겹쳤다.
“컹! 컹컹컹!”
“……초코?”
한순간에 평온이 깨졌다. 초코의 이름을 불길하게 읊조린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을 거세게 열었다.
“초코, 너…….”
“카메라? 피? 밖에서 인명 사고가 있었던 겁니까!”
초코 옆에 난감한 기색으로 선 직원을 뒤로 한 채, 우르르 쏟아져 나온 이사진들이 기함하며 초코의 상태를 살폈다. 초코는 제 앞발에 내던진 카메라를 도운의 앞으로 들이밀며 입가에 묻은 피로 상황을 설명했다.
교진은 수화기 너머로 경호 팀장이 이야기하는 걸 경악스럽게 읊었다.
“손제인 기자가, 다쳤다고요?”
이를 악다문 도운은 초코와 함께 내달렸다. 동시에 사태 파악을 위해 경식의 말을 기다렸던 국현 또한 익숙한 이름에 몸이 무의식적으로 멈춰 섰다.
이상하다. 한 걸음, 두 걸음이 어느새 뜀박질이 됐다. 국현은 도운을 다급하게 쫓아갔다.
제 여자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저 성정을 말려도 모자랄 판에.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도 온통 손제인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지금 그 아이를 걱정하는 건가?
“오셨습니까. 현재 바깥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아니요, 내가 직접 확인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보안 요원을 제지한 도운은 곧장 제인에게 달려갔다는 거고, 국현은 제인이 입은 흰 셔츠가 피에 젖은 걸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는 점이다.
도운은 긴 보폭을 넓혀 상황을 수습하고 있는 제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다쳤어?”
“아니요.”
“거짓말할래?”
도운은 말을 짓씹으며 제인의 팔로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사고와 사람들로 야단법석이 난 와중에도 도운의 눈에는 제인만 보였다.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쓰린 상처가 그의 시야를 쿡쿡 찔러 왔다.
“말했지.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다고.”
아주 낮은 음성이라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을 테지만, 제인은 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송장처럼 서 있는 국현을 보며 제인은 도운의 손을 떼어 냈다.
“지금 전무님이 신경 쓰셔야 할 건 제가 아니라 이 상황입니다. 하마터면 손님과 아이가 다칠 뻔했습니다.”
“손제인.”
“보는 눈이 많습니다, 전무님.”
손제인을 먼저 움켜쥐어도, 언제나 제 목줄을 잡은 건 그녀다. 성난 호흡을 가다듬은 도운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지금 손제인이 다쳤는데.
“어머님, 아이는 괜찮습니까? 어머님도 다치신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흑, 저하고 아이는 괜찮아요. 이분이 저와 제 아이를 도와주셔서…….”
“모든 피해는 저희 호텔 측에서 보상하겠습니다. 아이는 아직 어리다 보니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 사고 가해자분?”
수십 개의 눈과 카메라가 이 상황을 찍고 있으니 도운은 체면을 지켜야 했다.
내 여자가 아픈데, 빌어먹을 사회적 체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