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원우는 채연이 어떤 일을 벌일지 짐작했다.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싶지만, 점점 채연이 망가져 가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겉만 화려하지 속은 공허하여, 그 누구보다 외로운 채연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손제인을 가지고, 서도운과의 결혼을 막는다면?
채연과 흡사한 원우의 갈망이 마음속에 피어난다. 원우가 자리를 뜨자 채연은 잠시 물러서 있던 헤어 디자이너에게 손짓했다.
“요즘 인위적으로 점을 그리는 게 유행이라던데요.”
“아, 맞아요. 저희 숍에 다니는 아이돌이 아이라이너로 눈물점 그리는 걸 유행시켰거든요. 한번 해 보시겠어요?”
“전 이쪽에 해 보고 싶네요.”
채연이 자신의 어깨를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인정한다. 동생의 모든 걸 훔쳤어도 저는 채연이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채연이의 껍데기만 뒤집어쓰면 된다. 서도운이 알지 못하도록. 제인이가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어떻게 해서든, 이번 결혼을 성사시켜야 한다.
* * *
제인은 잘 벼린 칼날처럼 곤두선 신경을 온통 일에 쏟아부었다. 심채연과 하태웅의 구린 뒷공작을 구태여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요동치는 감정을 심채연에게 쏟아부은 뒤 깨달았다. 여러모로 아슬아슬한 요즘이지만, 서도운 곁에서 자신은 꽤 행복하게 설레고 있다고.
그러니 이 안온함이 흔들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 삶을 와해시키려는 이들을 떠올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전무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똑똑.
“전무님.”
자리에서 일어난 제인은 기사를 띄운 태블릿을 들고 응답 없는 전무실 문을 열었다. 아침에 발견한 도운의 치열한 번뇌만큼 제인의 업무 또한 늘어났다.
이래저래 말 많은 에덴 호텔 주가 기사를 취합하고, 떨어지는 주식을 막기 위해 도운의 경영 방식을 계속해서 기사로 뿌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도운의 승인이 필요하다.
“또 자나.”
그러나 집무실 안에 도운은 없었다. 그가 있을 곳은 이 공간에서 딱 한 군데였다.
“컹!”
“초코, 아빠 여기 있어.”
제인은 자신에게 들러붙는 초코를 차분히 떼어 놓고 목소리가 들린 도운의 방문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전무님, 기사 승인을……”
그게 실수였다는 건 잘게 조각난 등 근육과 돌아서는 우람한 맨몸을 보고 깨달았다.
“아.”
당황해 멈춰 서 버린 제인과 달리 도운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는 물방울이 타고 흐르는 제 가슴과 복근을 느긋하게 쓸어내렸다.
“잠깐 샤워 좀 했어.”
고개는 애써 빳빳이 세워 놓고 시선은 도운이 훑고 내려간 손의 궤적을 따라간다. 손가락 끝이 아슬하게 스친 곳은 하체를 둘러싼 흰 수건이었다.
모든 빛을 반사하는 색이지만 제인에게는 저 아래에 숨어 있는 도운의 진짜 몸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순결, 순수함, 깨끗함. 그것과는 거리가 먼 난잡한 욕망의 응집체가 말이다.
제인은 다시 길고 탄탄한 도운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명확한 선으로 구분된 복근을 눈동자로 덧그려 보았다. 정교한 조각상처럼 만들어진 몸을 보니 문득 욕심이 치솟는다.
“제인아. 나 방금 씻었다고.”
일정 거리를 유지한 몸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렇게 눈으로 애무하면 내가 또 씻어야 하잖아.”
도운은 기다란 검지를 뻗어 제인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멍하니 벌어진 입술 틈으로 숨결을 쑤셔 넣고 싶다는 충동이 끓어올랐다.
“어때.”
고작 몇 초의 시선이 불러일으킨 과열.
“손으로도 만져 볼래?”
제인의 시선 한 줌으로도 도운의 중심은 바짝 일어섰다. 도운은 슬그머니 자신이 갈망하는 예쁜 손을 복근 위로 끌어 올렸다. 긴장한 탓인지 피부에 닿는 손끝은 아주 찼다. 그건 전류를 불러일으키는 더없는 자극이었다.
나는 이런데. 너는?
도운은 제인의 두 손목을 잡은 팔에 힘을 실었다. 당기는 힘에 제인의 손이 도운의 근육에 닿았다.
“네, 만져 볼래요.”
그러니까 이건 도운만의 욕심이 아니었다. 서도운과 서도운이 가진 몸. 그리고 서도운이 가진 욕망, 욕구. 그걸 온몸으로 받아 본 제인은 문득 채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서도운을 이루는 모든 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독점욕이었다. 제인은 손바닥에 닿는 울룩불룩한 언덕을 어루만지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전무님.”
“말해.”
“전 전무님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너의 누나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심채연이 어디까지 손을 뻗었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말을 아껴야 한다.
자신이 나고 자란 보육원과 원장님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도운은 그녀의 말에 감미로운 향이라도 섞인 것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승인받으러 왔다고 했지.”
제인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긴 도운은 그녀의 손에 잡힌 태블릿을 등 뒤로 집어 던졌다. 놀란 제인이 태블릿을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기사도, 결혼도 네 말대로 다 승인 내려 줄게.”
“흣!”
갈라진 음성을 토해 낸 도운은 누구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도장을 찍었다. 멀거니 벌어진 입술 틈새로 뜨겁고 축축한 혀가 들어왔다.
도운은 거칠게 제인의 입술을 머금으며 열린 집무실 문 뒤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제인의 마른 등이 벽에 닿았다. 제인이 머리를 박기 전에 도운은 제인의 뒤통수를 감쌌다. 따뜻한 손마디가 잠시 제인의 머리를 헤집었다.
서도운이 이러니까, 온전하고 완벽한 이 애정을 혼자 누리고 싶은 것이다.
제인은 다리 사이로 여실히 닿아 오는 도운의 존재감을 느끼며 얽히는 숨결에 화답했다. 말캉한 속살을 헤집는 감각이 선연하다.
“예뻐 죽겠네.”
도운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네 말이라면 개처럼 복종할 거 알고 이러는 거지, 어?”
“읏…… 말하면서, 키스, 하지…….”
“응, 알았어. 키스해 줄게.”
고분고분, 그 말을 따르듯 입술과 입술이 끊임없이 지분거렸다. 여기가 집무실이고, 지금은 업무 시간이라는 것까지 잊을 만큼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던 때였다.
“서도운.”
문이 열리고, 국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심취해 있었던 제인과 도운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초코야, 네 아빠 어디 있어.”
초코가 여기를 알리기라도 한다면. 뚜벅뚜벅, 말보다 묵직한 걸음이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끝장이다. 긴장한 제인은 숨을 삼킨 채 도운의 품으로 몸을 말아 넣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제인의 어깨를 끌어안은 도운은 고양된 목소리를 흘려 보냈다. 다행히 방으로 오던 국현의 인기척이 멈추는 게 느껴졌다.
“업무 시간에 뭐 하는 거야?”
“하도 골치 아픈 문제가 많아서 샤워 좀 했습니다. 시간과 장소만 이야기해 주세요.”
열린 집무실 문은 외설적인 두 사람을 가리기에 효과적인 방패였다. 덕분에 도운의 행동은 더욱 과감해졌다.
“그래도 왔는데 얼굴은 비추지 그러냐. 또 반항이야?”
국현이 돌아서 소파에 앉았다. 소파 가죽이 꺼지는 소리에 도운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인의 입술을 진득하게 머금었다.
“심술부리는 거죠.”
하지 말아요.
경악한 제인이 입을 벙끗댈수록 도운의 입술은 과감하게 미끄러져 내렸다. 제인이 할 수 있는 건 터져 나오는 숨결과 새된 신음을 도운의 입 속으로 흘려 보내는 것뿐이었다.
“나 먹으라고 손 기자 시켜서 샌드위치 올려 보낸 놈이 심술은 무슨 심술.”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국현은 확인차 툭 던졌다. 그 말은 효과와 역효과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제가요?”
입술은 떨어졌지만, 정말 그랬냐는 듯한 진한 시선이 제인을 옭아맸다. 도운의 말에 국현은 역시 도운의 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배 실장 말로는 손제인 기자가 샌드위치를 내게 줬다는데 이유를 도통 모르겠구나.”
“손제인이 아무한테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데…….”
도운은 통통하게 부어오른 제인의 입술을 엄지로 문질렀다. 타액이 매끄럽게 스치는 만큼 기묘한 짐작이 곤두선다.
사국현의 아이. 세탁된 손제인의 출생. 그리고 그가 요즘 머리 빠지게 찾고 있는 누나에 대한 기억법.
“여하튼 내일 시간 비워. 금도랑 만나야 하니까.”
“회장님도 알아 두세요. 저 심채연이랑 결혼 안 합니다.”
“쯧.”
국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냐는 배 실장의 말이 자꾸만 이명처럼 맴돌았다. 결국 경식을 불러 묻고 말았다.
‘배 실장,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전 회장님은 물론 심 회장도 오래전부터 봐 왔습니다. 두 분 사이엔 금기어처럼 아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죠.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심 회장이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거로 봐서 뭔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온 것뿐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보니까 손제인 기자가 없던데.”
자꾸만 손제인이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스치는지.
“샌드위치 잘 먹었다고 전해 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