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채연과 연정은 창진의 호출이 오자 금도로 향했다. 그들을 알아본 직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길을 터 줄수록 채연은 연정의 뒤통수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껍데기만 순결해 보일 뿐, 그 속내는 추악한 비밀로 가득하면서.
참다못한 채연은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자마자 말을 토해 냈다.
“제인이도 아빠 딸일 텐데 왜 안 데리고 오셨어요?”
연정은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채연을 돌아보았다.
“옛날 일을 구태여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모성은 본능이라던데. 엄마는 제인이랑 저한테 그런 게 없어 보여서요.”
“아가씨.”
맹독을 띤 혀를 놀리자 뒤에서 듣고 있던 원우가 채연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언행이었다. 연정은 채연을 응시했다.
“피곤하구나, 자꾸 그렇게 애정을 갈구하는 거.”
“…….”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놔뒀는데 뭐가 문제니. 원우랑 놀아나는 거, 채연이 이름 빼앗은 거, 다 묵인해 주고 있는데.”
“원우랑 제 관계도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게 더 황당하고, 마음을 삐뚤게 어지럽힌다. 채연의 뒤에 선 원우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니?”
“그럼 채연이는 왜 아빠한테 비밀로 하는데요. 우리 둘 다 아빠 딸 맞잖아요. 나도 아빠 딸이 맞는데, 왜 아빠는 나를!”
왜 그렇게 미워하냐고.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감정이 복받쳐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 순간에 열린 엘리베이터 문이 채연의 울먹임을 실어 보냈다.
“웬 소란이야.”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창진은 채연과 연정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연정은 태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모녀 사이에 다툴 일도 있는 거죠. 무슨 말을 하려고 호출까지 했어요?”
울 것 같은 채연의 눈가로 손을 뻗던 창진은 연정의 물음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국현이 내일 만나자고 했어. 애들 결혼 문제 결정지었다고.”
창진의 말에 채연과 연정의 상황은 역전됐다.
“채연이 넌 결혼 준비하고, 당신은 사국현 사돈으로 맞을 준비해.”
채연은 눈물이 멎은 눈으로 연정을 주시했다. 미세하게 균열이 가 있는 연정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 * *
“제인 씨. 도운이랑 같이 점심 먹으러, 윽.”
칼같이 점심시간을 알리던 교진이 핸드폰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막 어깨를 주무르며 집무실에서 나온 도운도 의아한 듯 교진을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제인의 물음에 교진은 축 늘어진 채로 지갑을 챙겼다.
“오늘 여자 친구랑 데이트하는데 아이라이너 좀 사 오래요. 꼭 비에드 제품으로. 왜, 요즘 어떤 아이돌이 이 제품으로 눈물점 찍고 나와서 난리잖아요.”
비에드 제품이라면 국내에 매장이 딱 하나뿐이다. 에덴에서도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도운에겐 아주 고마운 기회였다.
“그럼 밥은 나랑만 먹어야겠네. 가자.”
도운은 곧장 교진을 버리고 임원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운을 뒤따른 제인은 맛있는 밥을 식판에 담았다.
“저번에 아침 준비해 줬으니까 점심은 내가 쏘는 거야.”
“그래 봤자 이거 다 아주머니들이 만드시는 건데.”
“여기 나오는 재료 다 내 지갑에서 나가.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영양가도 훨씬 높고.”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은 없지만, 그녀와 달리 여기저기서 꽂히는 시선은 그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모양이다. 제인은 쏟아지는 눈총을 무시한 채 도운의 앞에 앉았다.
“잘 먹을게요.”
제인은 새빨간 닭개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짜지도, 아주 맵지도 않은 맛이 훌륭했다. 도운은 조용히 밥을 먹는 제인을 보며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앞으론 교진이랑 여기서 밥 먹어. 사 먹는 건 돈도 많이 들고 건강에도 안 좋으니까.”
“저 통장에 1억 있어요.”
“지금 내 앞에서 돈 자랑 하는 거야?”
생글거리는 웃음이 문득 눈에 크게 박혔다. 어쩐지 낯간지러운 느낌이라 제인은 간장 양념이 듬뿍 묻은 갈비를 젓가락으로 푹 찍었다.
“갈비는 제가 더 많네요.”
“농담도 할 줄 알고.”
제인은 확실히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또 느끼는 속마음에 비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서툴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대화가 이어지면 도운은 그 기회를 붙잡고만 싶었다.
생각해 봐라.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얼음 같은 여자가 서서히 자신에게 녹아 토닥토닥 재워 주기까지 하는데. 또 단답만 하던 여자가 불쑥 농담을 던지기도 하는데.
어느새 밥 먹는 것도 잊은 도운은 턱을 괸 채 오물오물 움직이는 제인의 입술을 주시했다. 손으로 시작했던 이 욕심은 이제 손제인을 이룬 전부를 가지고 싶어지기에 이르렀다.
“나랑 앞으로도 밥 같이 먹어 줄래?”
“알았어요.”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척하지만, 직설적으로 와 닿는 시선에 숨마저 체할 것 같았다. 억지로 이 간지러움을 참고 있는데, 그녀는 도운의 말에 기어이 식판을 들고 일어나고 말았다.
“겁도 없지. 나 지금 청혼한 건데.”
도대체 어느 누가, 이런 말을 구내식당에서 하느냐고.
얼굴이 뜨거워진 제인은 도운을 흘기고 먼저 집무실로 올라갔다.
안 되겠다. 아까 못 한 초코 산책이라도 시키면서 소화라도 시켜야지.
그런데 자꾸만, 서도운의 말이 고막에 한 겹 한 겹 쌓인다. 빨라진 걸음은 어느새 느려지고 제인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네, 원장님.”
그래서 때마침 온 은선의 전화도 아주 기쁘게 받을 수 있었는데.
-제인아, 혹시 하태웅 기자라고 아니?
숨 가쁘게 이야기하는 은선의 말에 제인은 명치가 턱 막혀 왔다.
* * *
“하.”
은선에게 이야기를 들은 제인은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내가 알던 태웅 선배가 맞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짜증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은선의 말을 복기했다.
‘하태웅 기자가 갑자기 보육원으로 찾아왔어. 네가 지금 무척 위험한 상황이고, 너를 돕고 싶다고.’
‘제가 위험하다고요?’
웃기는 소리. 자신은 지금도 서도운과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했다는 되물음에 은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상해. 에덴과 금도 사이에서 너한테 어떤 문제가 있냐고 물어봤고, 채연이가 널 위험하게 할 수 있으니 네가 다치기 전에 말해 달라고 했어. 정말 네가 위험하기라도 한 것처럼.’
‘태웅 선배는 지금 심창진 밑에 있어요. 심창진은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구요.’
‘그럼 그 기자도 뭘 알고 그런 거 아니니? 우선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는데 채연이 이야기까지 나오니 무시할 수가 없었어.’
‘……우선은 말해 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꼭 연락해 주세요.’
‘그래, 제인아. 채연이를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은선의 의심처럼 둘 중 하나였다. 태웅의 독단적인 움직임이든가, 심창진 몰래 심채연이 태웅에게 내린 지시든가.
뭐가 됐든, 심채연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하태웅은 선을 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하태웅은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이 설령 심채연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절대 안 하려고 했는데.
입술을 지그시 깨문 제인은 기자 일을 하며 수집한 채연의 번호를 눌렀다. 쿵쾅대는 심장과 달리 심채연의 목소리는 어딘가 들떠 보였다.
-여보세요? 제인이니?
기다렸다는 듯 받는 전화에 제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곱게 대처하지 않겠다.
“기분 좋니? 태웅 오빠 이용해서 나 다치게 할 거라고 협박하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제발 모른 척 좀 하지 마. 언제까지 네가 한 짓 부정하며 살 건데?”
-…….
“너랑 나, 이미 틀어졌어. 나한테 뭘 더 바라는진 모르겠지만 사람 시켜서 하는 같잖은 협박 따위 그만둬.”
회사를 다니고, 서도운의 얼굴을 보고, 같이 밥을 먹고,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것. 이 모든 소소함은 전부 제인이 바라 왔던 삶이었다.
비로소 찾아온 행복을 감히 또 타인의 손에 넘길 순 없다.
“난 절대 네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거니까.”
제인은 힘주어 말했다. 반드시. 두 번은 뺏기지 않을 거야.
손에 쥔 핸드폰은 뺨을 타고 스르륵 내려왔다. 액정에는 1분도 채 안 되는 통화 시간이 찍혀 있는 숫자가 반짝였다.
“누구야?”
심상치 않음을 느낀 원우가 보고 있던 잡지를 놓고 다가왔다. 길던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채연은 거울 속 자신을 주시하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제인이.”
내 마음, 내 간절함 하나 모르는 내 동생. 나는 네 이름을 훔치고, 그토록 미워하는 서도운을 내 것으로 만들면서까지 네 곁에 있으려고 하는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고약하게 비틀렸다.
“하태웅 기자가 내 신분으로 손은선을 협박한 모양이야.”
“뭐라고?”
“내가 제인이를 다치게 하기 전에 과거 일을 말하라고. 하태웅 번호 좀 줄래?”
표정을 차갑게 굳힌 원우는 태웅의 번호를 넘겼다. 채연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전화를 연결했다. 동시에 미용사가 채연의 몸을 감싼 커트 보를 치워 냈다.
-네, 건국 일보 사회부 하태웅입니다.
“저를 팔아서 손 원장을 협박하셨더라고요.”
-…….
다급히 숨을 참는 당혹감이 귓가를 스친다. 채연은 거울 속으로 드러난 매끈한 제 어깨를 보며 소름 끼칠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인이를 향한 하 기자의 마음 잘 알겠네요. 탓하진 않을게요.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하 기자 말대로 다치게 해서라도 제인이가 절 원하게 하겠다는 뜻이에요. 내일 봐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니까.”
전화를 끊은 채연은 바로 원우에게 명령했다.
“에덴에서 제인이 혼자 있는 스케줄 좀 알아 와. 사람도 한 명 구하고.”
“……알았어.”